마치 이른 봄 낯선 곳에 피어 올라온 작은 새싹 같은 기분이다. 가을의 초입에서 3회 코스미안상 인문칼럼’ 공모를 발견하고 주제에 끌려서 정신없이 써 내려갔다. 코스미안뉴스를 만난 것은 사내에겐 큰 행운이었다.
덜컥 금상이란다. 반갑기도 했지만, 칼럼니스트로 활동할 수 있다는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해보고 싶었던 일이다. 35년간 일기를 쓰면서 내내 지니고 있던 속가슴이었다. 누구나 자신에게 부여된 ‘그것이 있다면’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깊었었다.
천성이 둔한 사내에게 있어서 재주라고는 돈이 적게 드는 독서, 일기 쓰기, 그리고 운동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등산이 전부였다. 이순(耳順)을 넘긴 나이에 겨우 책 두어 권 내었고, 지금도 미련하게 고전과 위인 공부에 전념하면서 배우고 있다. 사내의 배움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배움으로 인해 새로 알게 되는 기쁨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어떤 맛있는 음식보다 배움에서 더욱 깊은 그 무엇을 느낀다.
새싹에게는 꿈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는 못해도 여름에 작은 그늘이라도 만들 수 있는 나무는 되고 싶다. 길 잃은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기다릴 수 있는 키가 좀 큰 나무, 또 무더위에 지친 나그네가 잠시마다 쉴 수 있는 그런 나무가 되고 싶다. 그런 나무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나무라서 더 좋다.
다소 모자라 보이기도 한 그는 걸인을 보면 한 번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내 집 앞 땅 한 평을 쓸면 지구 한 평이 깨끗해진다는 단순한 생각의 소유자였다. 그는 또 계산에 어두웠다. 그런 탓에 늘 손해 보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인생 총량의 법칙을 미련스럽게 믿는다. 복을 내가 받지 못하면 자식 손주들이 받으면 되고 이웃이 받아도 된다면서.
사내의 둔한 어리석음은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낮은 산 둘레길을 걷다가 작은 돌탑을 발견하곤 돌을 두 개 올려놓으셨다. 철없이 나이만 먹어버린 그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니, 한 개는 내 것이고 한 개는 어머니 것이지요?” 돌아온 대답은 큰 범종 소리가 되어 머리를 친다. “아닐세, 한 개는 자네 것인데 한 개는 어디서 힘든 사람 있으면 그 사람 좀 살펴달라고 올려놓았네.” 어머니가 올려놓은 그 돌(철학)은 단순한 기복(祈福)의 행위가 아니었다.
‘연재되는 칼럼’이 읽는 사람에 따라서 ‘이런 것도 칼럼에 들 수준이 되나?’ 하는 책망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서툴러도 그것이 한 사람이라도 가슴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면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 든 작은 새싹은 큰 꿈을 꾸며 용기를 내었다. 비록 천학비재(淺學菲才)이지만 ‘그것이 홀로의 작음’일지라도 미소를 머금고 해 봐야지.
‘하진형 칼럼’은 깊이는 좀 얕아도 따뜻하고 순수하며 부드러운 내용으로 쓸 것이다. 어쩌면 가족과 이웃들의 두런거리는 얘기이기도 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영혼이 맑은 사람, 길가의 잡초 얘기도 있을 것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괘념치 않을 것이다. 어차피 사내는 계산과 거리가 먼 사람이므로 서운함도 없는 것이다.
이 코너는 순수한 인문 칼럼에 에세이를 접목시켜 가는 바람 한 줄기, 편안한 여유, 그리고 서로의 볼을 부빌 수 있는, 우리들 일상 속의 인문학을 끌어올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게 해볼 참이다.
[하진형]
행정안전부 등록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
칼럼니스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