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생각나는 ‘007가방을 든 사나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그해 봄, 군대 동기가 사무실로 불쑥 찾아온다. 키가 크고 얼굴도 미남인데다 말쑥한 양복 차림에 멋진 007 가방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서자 그 친구에게 직원들의 시선이 모두 쏠린다. 사전에 연락을 받지 못한 터라 나도 잠시 당황한다.
“아니, 사무실로 어쩐 일이냐? 미리 연락하지 그랬어.”
“지나는 길에 들렀어. 퇴근 시간 다 되어가지?”
친구와 함께 사무실을 나선다. 전철역 근처 단골 식당으로 가서 곱창전골에 소주 한잔을 나눈다. 2년 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에는 그늘이 짙다. 평소에 말수가 적은데다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광주에 있는 여관은 잘 되고 있지?”
“그 여관 벌써 처분했어.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는 바람에 여관도 집도 다 날라 갔어.”
가벼운 탄식과 함께 소주를 입으로 털어 넣는 모습에 분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무슨 소리야? 어떻게 갑자기 이런 일이...”
광주에서 건축업을 제법 크게 하시던 친구 아버지께서 평소 거래가 많았던 대형 시행업체의 부도로 공사 대금을 받지 못해 연쇄 부도를 당하자 친구가 광주에서 직접 운영하던 제법 큰 여관도 넘어가고, 채권자들의 빚 독촉을 피해 가족들도 대학원생인 동생이 사는 인천 구월동의 조그만 주공 아파트로 몰래 이사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상심한 친구를 위로하며 소주잔을 건네자 소주를 원샷 하면서 한손으로 계속 검은 색 007가방만 만지작거린다.
“집안이 풍비박산 났는데 몸뚱이 멀쩡한 내가 놀아서 되겠니? 지난달부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영업하고 있어.”
내가 아는 브리태니커 사전은 세계 최고의 대백과사전이다.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 등 소위 ‘사’자 달린 사람들과 기업체 사장, 임원들 사무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부와 권위와 명성을 과시하려는 장식 용도의 책이기도 하다.
“그래? 책이 비싸 팔기 힘들 텐데. 좀 팔았어?”
친구는 대답 대신 자기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입에 털어 넣기만 한다. 이런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술에 약한 나도 덩달아 소주를 들이킨다. 능력만 되면 한 질 팔아주면 좋으련만 책값이 워낙 비싸니...
식당에서 나와 배웅하러 전철역으로 가는데 앞장서서 걷는 친구의 축 쳐진 어깨를 보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냥 보내기 아쉬워 근처 호프집으로 친구를 데리고 들어간다.
다음날 아침 과음한 탓에 약간 늦게 출근해서 업무를 챙기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어제 만난 친구의 밝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어제 집에는 잘 들어갔니? 술이 많이 취했을 텐데. 어쨌거나 그 비싼 책을 사줘서 너무 고마워.”
“뭐? 내가 언제? 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니?”
“무슨 소리야? 어제 호프집에서 책값 150만원을 카드로 24개월 할부 결제까지 했는데. 그나저나 책을 어디로 보낼까? 책 보낼 주소 좀 불러줘.”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몸속 깊은 곳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발생한 지진 때문에 온몸이 떨린다. 뒤이어 특대형 쓰나미가 온몸을 휩쓸고 지나간다. 150만원이면 4개월 치 월급인데 이 일을 어찌할꼬.
이왕 엎질러진 물. 더 궁색하게 굴면 싸나이가 아니다. 친구 입장도 있는데.
마음을 굳게 다잡고 별 일 아닌 듯 친구에게 한 마디 한다.
“사무실로 보내줘.”
며칠 후 사무실에 도착한 책은 거의 이삿짐 수준이다. 초호화 고급 양장 카버에 덮인 27권의 영문판 칼라 브리태니커 사전은 책장도 열리지 못한 채 창고로 직행한다. 만일 이 책을 집으로 보냈더라면 마누라 표정이 어떠했을까? 사무실을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다.
친구는 그 후로도 몇 달을 고객들을 찾아 다녔지만 실적이 전무하다. 결국 내가 친구의 처음이자 마지막 브리태니커 사전 고객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해 여름 브리태니커 사전 영업을 그만둔 친구와 소식이 끊긴다.
카드 할부금을 어렵게 갚아 나가던 그해 12월 중순 사무실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ooo고객님, 잘 지내셨나요? 브리태니커 사전 △△△영업부장입니다. 저희 사전 잘 보고 계시죠?”
심각한 경제 위기를 초래한 원인 제공자 브리태니커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가 뇌리에 박혀있는 상황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사람의 심기를 뒤틀리게 만든다.
“아니 무슨 일이죠? 제가 바쁘니 용건만 말씀하세요.”
“모레 고객님께서 저희 회사 송년회장으로 좀 나오셔야 하겠습니다.”
“제가 거길 왜 가요?”
“일단 축하부터 드립니다. 저희 회사가 매년 브리태니커 사전을 구매하신 고객님들 가운데 한분을 추첨으로 뽑아서 책 대금을 장학금으로 돌려 드리는 행사를 하고 있는데, 올해는 고객님께서 당첨되셨습니다. 그래서 송년회 행사 때 영국에서 오신 회장님이 고객님께 직접 장학금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반신반의하면서도 영업부장에게 시간과 장소를 두어 번 확인을 한다.
송년회장인 서울 중구 앰버서더호텔 그랜드볼륨에는 말쑥한 정장 차림을 한 수백 명의 브리태니커 회사 직원들이 모여 있다. 모처럼 양복을 입고 귀빈석에 안내받아 앉아 있는데 통화한 영업부장이 와서 인사하면서 시상이 끝난 후 뷔페 식사를 하고 자기를 꼭 만나고 가라고 당부한다. 영업 우수 사원 시상이 끝나고 드디어 내 이름을 호명해서 단상에 올라가니 영국인 회장이 웃으면서 봉투를 준다. 그 봉투를 받고 원래 자리인 귀빈석이 아닌 화장실로 직행한다. 봉투를 열어보니 100만원 수표와 50만원 수표가 각각 1장 들어있다.
이런 횡재가 나한테도 찾아오다니! 마음을 추스르고 뷔페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가다가 복도에서 영업부장을 우연히 만난다.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고객님,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캄톤 백과사전이 새로 나왔는데 이번 기회에 한 번 장만하시죠.”
“네. 제가 오늘 일이 바빠 사무실로 바로 들어가 봐야 합니다. 다음에 시간 내어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비싼 특급호텔 뷔페도 본의 아니게 포기한 채 전철을 타고 사무실로 돌아오지만 양복 안주머니에 든 수표 덕분에 배고픔은 잊은 지 이미 오래다.
시상식에 다녀온 후 엉뚱한 행운을 안겨준 친구 소식이 궁금해서 동생한테도, 알만한 주위 지인들한테도 연락해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요즘 같은 연말이면 더 보고 싶은 ‘007가방을 든 사나이’
집 서재에 있는 브리태니커 사전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친구.
이 친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30년이 지났지만 보고 싶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