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생각나는 ‘007가방을 든 사나이’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어 정부투자기관 이사장을 하고 있는 대학 동기에게 주례를 부탁했더니 흔쾌히 승낙하면서 조건을 하나 내건다. 자신은 예식 전에 꼭 예비 신랑 신부를 만나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인과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부탁하는 입장이라 군소리 없이 그리하기로 하고 약속 시간 보다 30분 정도 일찍 약속 장소인 한정식 집으로 간다. 친구가 회사 직원들과 같이 이용하는 한정식 집은 평일 초저녁인데도 손님들로 북적인다.
제법 유명한 식당이려니 생각하고 카운터로 가서 예약자 이름을 대고 룸 번호를 물어본다. 주문 전표를 확인하고 있던 머리가 약간 벗겨진 초로의 아저씨가 고개를 들면서,
“계봉아! 네가 여기 어쩐 일이냐? 반갑다!” 큰 소리로 외치면서 카운터를 빠져 나와 갑자기 끌어안는다. 일순간 식당 홀에 있던 손님들이 의아해하는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어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가만히 살펴보니 바로 30년간 연락이 끊긴 ‘007가방을 든 사나이’다. 나도 너무 놀랍고 반가워 친구를 부둥켜안고 식당 밖으로 나온다.
식당 밖에 있는 작은 벤치에 앉자마자 둘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브리태니커 회사를 그만둔 친구는 고향 친구가 하는 일을 돕다가 여의치 않자 선원이 되어 외항선을 타게 된다. 몇 년씩 선상 생활을 해야 하는 바람에 저절로 지인들과 연락이 두절되고 혼자만의 외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다가 잠시 한국에 나왔을 때 마침 초등학교 동기를 만나 억지로 동창회에 끌려 나가게 된다. 동창회 모임에 나온 동기들 중 미혼은 딱 둘, 바로 이 친구와 여자 동기 하나. 친구들이 두 사람 등을 떠밀어 둘은 반강제로 사귀게 되고 눈이 맞은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 친구는 부인이 서울서 하는 식당 일을 돕기 위해 선원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땅을 밟게 된다. 그 이후 두 사람은 억척같이 식당 일에 매달리게 되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서울 도심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한정식 식당을 두 개나 운영하기에 이른다.
식당에 도착한 아들과 예비 며느리가 식당 앞에 있는 나를 부르는 바람에 30년 전으로 떠난 우리 두 사람의 여행은 꿈결에서 깨어난다. 제일 마지막에 도착한 친구에게 이런 사연을 말하자 친구도 “세상 정말 좁다.”라고 하면서 “결혼을 앞두고 좋은 징조다.”라고 덕담을 건넨다.
주례를 할 친구가 아들과 예비 며느리에게 건네는 덕담은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고, 형형색색 맛난 음식들이 상다리를 휘청하게 만드는데도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머릿속은 오직 30년 만에 만난 친구 생각뿐이다. 긴 한정식 풀코스가 끝나고 친구가 계산하러 나간 사이에 아들과 예비 며느리에게 한 마디 한다.
“얘들아. 너희 둘은 정말 천생연분이다. 그리고 정말 고맙다.”
두 사람은 이 말이 결혼을 앞둔 자녀에게 부모가 하는 의례적인 인사말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30년 동안 헤어진 친구를 만나게 해 준 두 사람이 오늘 너무 예쁘고 고맙다.
아들 결혼식에 온 친구는 혼주에게 부담되는 고액의 축의금을 낸다. 결혼식이 끝나고 한 달 뒤에 만난 친구에게 축의금이 과분하다고 얘기했더니 그냥 씩 웃기만 한다.
나는 그 친구에게 30년 전 브리태니커 장학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직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글로 써서 심경을 표현하니 체기가 내려간 듯 속이 너무 시원하다.
30년 동안 가슴에 담고 있었던 말.
“보고 싶다. 친구야!”
이제 그 말은 미래형에서 과거형으로 시제만 바뀐다.
“보고 싶었다. 친구야!”
친구가 이 글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