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정하여 놓고 다니는 절도 없으면서 등산을 하다가 절을 만나면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어떤 때는 집에 있다가 휑하게 차를 몰아 절에 다녀오기도 한다. 오늘은 오전에 일을 마치고 공양미까지 한 포 사서 불전에 올렸다. 그리고 법당 출입구 반대편 한쪽 구석에 앉아 묵상(黙想)에 빠진다. 머릿속 잡념을 비우려 노력하지만 쉽지가 않다. 밖엔 공사하는 일꾼들의 소리가 사방으로 퍼지고 곁에서 절을 하는 참배객들의 무릎 닿는 소리가 들린다. 집중해야지 하는 마음을 먹을수록 온갖 번뇌가 피어오른다.
‘왱왱~’ 어디서 날아왔을까, 똥파리 한 마리기 법당 안의 정적을 깬다. 부처님은 한낱 미물도 내치지 않으신다. 문밖의 까마귀 소리, 물소리, 인부들의 자갈 밟는 소리까지 품으신다. 이것도 부처님의 오온개공(五蘊皆空)의 한 자락인지 모르겠다.
오늘의 일을 모두 마치고 인사하며 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산사 마당에 청아하게 퍼진다. 그들의 안식처는 어디일까? 슬쩍 눈을 뜨고 창밖을 본다. 귀는 줄창 열려있어서 일부러 듣지 않아도 들린다. 노란을 넘어선 노오란 가을국화가 향을 뿜어내고, 착한 바람이 그 향을 실어 나른다. 천리향이 되어 퍼져 나간다. 그리고 나는 들리지 않는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
그래, 잡념도 생각이다. 굳이 내쫓으려 생각지 말고 머리를 생각의 한가운데에 놓아주자. 머리의 정수리를 활짝 열자. 자연과 문명의 구분이 없는 공간에 나를 놓아두니 동그란 바람이 몸 주위를 동그랗게 맴돈다. 머리를 뒤로 젖힌다. 천장의 등에 매달린 명패가 흔들린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처럼. 그나마 흔들리는 것이 살아있다는 몸짓이기도 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부처님이 앉아계신 옆으로 한세상을 먼저 살다 건너간 이들의 흔적이 굳게 서 있다. 먼저 건너간 이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다. 부처님, 탱화, 불전함, 목탁, 촛불, 빈 방석 등등 여러 존재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눈을 감는다. 집중이 되지 않아도 좋다. 공존하는 공간에 머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똑딱 똑딱~’ 법당 안에도 시계가 있다. 초침소리를 이제야 들었다. 내가 법당에 들어설 때도 초침은 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지금껏 무엇을 듣고 있었는가? 세상의 흐름을 모두 알 필요는 없다. 그런 흐름이 있으면 같이 흘러가면 되는 것이다. 손등이 가렵다. 모기가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반사적으로 모기를 잡으려다가 부처님 면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순간 멈춘다. 그 시간과 공간에게 살생의 한계와 구분은 어디인지 묻는다. 해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부처님은 말없이 내려다보고만 계실 뿐이다.
사방이 조용하다. 촛불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보니 어둠이 그리움을 찾아 내려오나 보다. 조금 있으면 예불할 시간이다. 조용히 일어선다. 절방석도 덩달아 부풀어 오른다. 엉덩이 밑에 깔려 있느라고 얼마나 답답했을까. 마당의 자갈을 조심스레 밟으며 절문을 나선다.
일주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불이 켜진 속세의 ‘카페’ 광고판이 보인다. 산 중턱에 가까운데도 현대식 건물에 고급차까지 줄지어 엎드려 있다. 그네들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요즘은 어디어디가 핫플레이스라더라, 나 거기 가봤다.’ 라는 말보다 맑은 영혼을 나누고 위로해 주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가벼운 일상사의 나눔도 힐링이 된다. ‘영혼 나눔과 일상의 대화가 조화’를 이룬다면 지금보다 절집에 더욱 가까이 있어도 좋을 듯싶다.
초저녁 내리막길을 조용히 내려가는 작은 승용차처럼 자연스럽게 건너가기를 소망한다. 아무리 작은 지혜의 쟁반일지라도 의식적이기 보다 자연스런 몸짓, 호흡으로 건너가고 싶다.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행정안전부 등록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제3회 코스미안상 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