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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일자 미주 뉴욕판 중앙일보 Opinion [글로벌 아이] 칼럼 '한국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 필자 이영희 도쿄특파원은 "양국간 관광 격차도 사라지는 시대, ‘랜선 한국’이 아닌 진짜 한국을 보여주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이렇게 적고 있다.
빨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서 벗어나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에 요즘 일본에서 핫하다는 ‘한국여행 검정’을 치러보았다. 한류드라마·한글·공연·관광 등 네 분야 중 나름 자신 있는 ‘한류드라마’를 택했다. “미국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로는 처음으로 1위를 기록한 작품은?” (정답 : 오징어 게임) 당연히 맞췄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제5중대 막내 은동이 전투 게임에서 사용한 닉네임은?” 어, ‘토마토 재배자’ 였던가…(정답 : 피타는 노력). 최종 점수는 60점. 70점 이상을 받아야 검정 통과다.
한국관광공사 도쿄지사가 지난해 시작한 ‘한국여행 검정’은 4차에 이르는 동안 100만이 넘는 페이지뷰, 누적 응시자는 3만 명을 넘었다. 코로나19로 왕래가 막힌 상황에서 한국으로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을 퀴즈로 달래는 사람들이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도한놀이(渡韓ごっこ)’라는 태그를 단 게시물이 넘쳐난다. 집이나 호텔에서 떡볶이·치킨 등을 사다 놓고, 한국 드라마나 아이돌 영상을 보며 ‘한국 여행 기분’을 내는 놀이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하루 300명대로 떨어지며 ‘위드 코로나’로 접어든 일본에선 한국 여행에 대한 열망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다. 한국인 기자인지라 더민감하게 느끼는 측면을 감안해도 확실히 그렇다. 왕래가 뚝 끊긴 지난 2년간 일본에선 한국 드라마·영화·문학·웹툰·음식·화장품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타올랐다. 지난 주말엔 일본 콘텐트회사 가도카와가 주최한 ‘미트(MEET)-K’ 행사에 다녀왔다. 조금 이르다 싶었는데 ‘여신강림’ 등의 한국 웹툰, 달고나 등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에 놀랐다. 행사는 계속된다. 29일부터 한 달간 한국관광공사의 ‘다카라KOREA-한국관광 가을축제’가 이어지고, 11월 16~21일에는 한국 문학을 조명하는 ‘K북-페스티벌’도 열린다.
코로나19 이전인 2018년, 한국과 일본을 오간 사람은 1000만 명이 넘었다. 이 중 일본을 찾은 한국인이 753만 명, 한국을 찾은 일본인이 295만 명으로 7대 3 정도 비율이었다. 당시 한국 젊은이들 사이엔 저비용항공사(LCC)를 이용해 일본 소도시를 찾는 게 인기였다. 다시 관광 교류가 시작되면 이 수치는 뒤집힐 수도 있다. 한 여행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몇 년은 한·일 간 방문객 수가 50대 50 정도가 될 것 같다”고 예측했다. 양국간 관광 격차도 사라지는 시대, ‘랜선 한국’이 아닌 진짜 한국을 보여주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이영희 도쿄특파원>
같은 일자 오피니언 [아름다운 우리말] 칼럼 '우리말과 깨달음' 필자 조현용 경희대학교 교수는 이렇게 칼럼을 끝맺고 있다.
"아름답다는 말은 어원적으로 보자면 나답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을 흉내 내지 않고 나의 가치만 발견해도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만고의 진리가 아니던가.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1877-1962)가 1916년 발표한 단편소설 '청춘은 아름다워라(독일어: Scho"n ist die Yugend 영어: Youth, Beautiful Youth)'는 헤세의 청소년 시절 자화상이다.
지난 수십 수백 수천 년 동안 선진(?) 자본주의 서구 물질문명이다, 중국의 중화사상이다, 일본의 군국주의다, 특히 종교에서 서양의 기독교다, 인도의 불교다, 중국의 유교다 하는 사대주의에 찌들어 온 한국에서 이제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 곧 단군의 홍익인간/홍익만물 그리고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 바탕한 '코스미안 개명천지'를 열 때가 도래하였어라.
2019년 9월 8일자와 2021년 8월 21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둘 옮겨보리라.
[항간세설] '붕어빵이 될 순 없지'
수학논리에 역진(逆眞)이라는 말이 있다. 반(反)공식이 통한다는 말이다. 몇 년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강남스타일'의 싸이에 이어 최근에는 방탄소년단(BTS)이 큰 인기다. 기존 아이돌과 달리 특색 있는 개성을 살린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각자의 개성을 찾아 유일무이한 스타일을 개발해야 해야 한다. 몰개성이야말로 자신을 망각한 자기부정이고 자기포기며 자아배신이며 자아상실이다. 세상사는 방식은 모두가 다른 천차만별이다. 모두 획일적인 붕어빵이 될 수는 없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고유의 삶을 살 때 기적이 일어난다.
아인슈타인은 “네 삶을 사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세상에 기적이란 없다. 또 하나는 세상만사 다 기적이다. There are only two ways to live your life. One is as though nothing is a miracle. The other is as though everything is a miracle.”라고 말했다.
아주 먼 옛날 옛적에 동물들이 그들이 직면한 신세계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키 위해 대응책을 강구했다. 그 결과 학교를 하나 세웠다. 교과 과목으로는 달리기, 오르기, 헤엄치기, 날기가 채택되었다. 이 교과과정을 철저히 이행하기 위해 모든 동물들이 전 과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수토록 했다.
오리는 헤엄치기에 있어서는 우등생으로 선생님보다 잘했으나 날기는 겨우 낙제점수를 면했고 달리기에서는 낙제 수준이었다. 그래서 달리기를 좀 더 잘해보려고 헤엄치기 시간을 빼먹으면서까지 방과 후에도 계속 달리기만 연습하다 보니 발바닥이 다 닳아 그 잘하던 헤엄치기가 보통 수준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보통 수준이면 되는 까닭에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토끼는 달리기를 반에서 일등을 하지만 헤엄치기 보충수업을 받느라고 다리 근육에 신경성 경련증이 생겼다. 다람쥐는 오르기를 기차도록 잘했지만 날기에는 언제나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날기를 나무 꼭대기로부터 아래로 시키지 않고 꼭 땅에서부터 위로 날아보라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 너무 애쓰다 보니 그의 팔다리 근육이 고통스럽게 오무라드는 비수의(非隨意) 발작성 수축증에 걸렸다.
그런가 하면 독수리는 문제아였다. 다른 학생들과 동조하지 않고 선생님 말씀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는 그의 타고난 반골기질과 독자적인 주체성과 창의성 때문에 동급생들로부터 왕따는 물론 선생님의 심한 벌과 고문까지 당했다. 그래도 그는 언제나 끝까지 굽히지 않고 제 방식과 제 뜻을 고집하여, 날기 시간마다 다른 학생들을 다 제치고 나무 꼭대기 위로 제일 먼저 날아올랐다.
이상은 내가 세 딸들 어렸을 때 읽어주던 동화책 내용 일부를 좀 수정 요약해본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떤 출발점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결정해준 것은 제 선택이나 멋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 또는 사주팔자 소관이거나 아니면 우연인지 필연인지 간에 그의 출생과 사회적 환경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독수리가 저는 독수리로 태어났다고 달팽이로 태어난 달팽이 보고 너도 나처럼 하늘 높이 날아보지 못하고 어찌 그리도 느리게 기어 다니냐고 비웃을 수 없다. 나의 삶이 너의 삶보다 못하다고 탓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이다. 우리의 삶이 붕어빵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이태상 칼럼] '코스미안주의Cosmianism는 우리 배달겨레의 진정한 주체사상'
2021년 8월 19일자 뉴욕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발언대] 칼럼 '월남과 아프가니스탄'에서 필자 폴 오 전직교사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를 이렇게 상기시킨다.
"프랑스의 유명한 배우 알랑드롱이 50년도 초에 참전했던 인도차이나 전쟁은 프랑스가 구축했던 캄보디아, 라오스 그리고 베트남 일대 메콩강일대의 식민지 지역에서 벌어졌던 본토인들과 서구인들의 전쟁이었다. 고등학교 수학선생이었다가 후에 월맹의 수반이 되었던 호지명도 자기 직업을 뒤로하고 이 전쟁에 뛰어들어 베트남의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위하여 게릴라 지도자가 된다.
미국 주류 언론들은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을 월남 패망 직전과 비교하며 사이공 미 대사관 옥상에서 헬리콥터로 직원과 월남 고위층들을 근처 해역의 미 항공모함으로 탈출시키던 그 사진들의 생생했던 과거 역사들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이 아프간주둔 미군 완전철수를 계획 했던 데드라인은 원래 5월 말이었다. 그런데 바이든 행정부가 코로나 문제와 다른 인프라 스트럭처 등의 문제로 발이 묶여 결국 철수 시한을 8월 말로 바꾸었다.
한 가지 나토 동맹국들과 미국이 실착한 것은 탈레반의 공격 속도였다. 그들은 아프간 전역이 탈레반에 넘어가기까지 지난달로부터 6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3대 도시 하랏이 주초에 떨어지더니 2대 도시 칸다하르도 어제 탈레반의 손에 넘어갔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미 대사관이 위치한 수도 카불을 탈레반이 포위하고 아프간 정부 요인들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민병대를 포함해 아프간 정부군의 숫자는 35만 명이 넘는다. 반면에 샌달을 신고 조그만 오토바이에 이불을 싣고 AK 47소총을 어깨에 메고 움직이는 아프간 내의 탈레반 세력은 7만 명이 조금 넘는다. 아프간 정부군은 20년 전쟁 동안 전투기를 포함해 상당한 첨단 무기들을 미국으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럼에도 지금 짧은 시간 안에 파죽지세로 무너져 내렸다. 아니 싸우지 않고 항복하거나 도주해 버렸다.
이 정부군들에게는 그 월남 프랑스 전쟁에서 싸웠던 그 월남인들의 정신이 없는 것이다. 항복하거나 기지를 포기하고 도망간다. 항복하며 백기를 들고 접근하는 아프간 정부군들을 탈레반들은 사정없이 사살한다. 그들은 정부군을 부패한 정권의 하수인들로 보기 때문이다.
아프간 정부에서 지급하는 군인들의 급료 중에 거의 30% 이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거나 심지어 80세 나이의 자기 할아버지 이름으로 지급되는 등 군인사회의 만연한 부패의 실상이 지금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부패한 정권은 생존의 기반을 잃게 된다. 그것은 민심이다. 국민들은 더 이상 그 부패한 정부와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자기들을 보호해줄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즉 탈레반이나 그 정부를 별로 다르게 보고 있지않는 것이다.
미국의 후원으로 정권을 잡은 월남 대통령 고딘 디엠은 부패한 정권이었다. 온 가족이 사치의 극에 달하는 생활을 하며 프랑스를 비롯해 전 세계에 천문학적인 재물을 도피시켜 놓았다. 국민들을 바보로 아는 지도자들은 반드시 망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이들은 남긴 것이다.
미국은 20년 아프간 전쟁 동안 8,300억 달러를 쏟아부었지만 지금 그 사이공 대사관 옥상탈출처럼 퇴각하고 있는 중이다. 아프간 사태를 보며 후에 독재자였지만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이 공항에서 한 유명한 명언이 새삼 뇌리에 떠오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아주 특별한 곳이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뉴스에 비치는 것보다) 엄청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 'It's a Very Special Place.' There's so much more to Afghanistan."
최근 8월 15일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프간을 탈출하려는 카블 시민들이 하마드카르자이 국제공항으로 몰려들어 삽시간에 피난민 수는 순식간에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 같은 사태를 보면서 2003년 미국에서 발행된 장편소설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의 의사 출신 작가로 1980년부터 미국에 거주해온 카블 태생의 할레드 호세이니Khaled Hosseini가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아, 어디 아프가니스탄뿐이겠는가. 한국, 아니 이 지구별, 그 어디나 다 특별하고 그 어디에나 그리고 우주엔 그야말로 무궁무진 무한히 많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가.
자, 우리의 진정한 주체사상이 뭔지 생각 좀 해보자.
나는 일찍부터 어른들이 갖고 있는 편견과 화석처럼 굳어버린 고정관념이 몹시 싫었다. 사내 자식은 어때야 하고, 판-검사나 의사, 박사가 돼야 한다느니, 외국 유학 가라는 등, 이런 말들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나 자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어떤 사람, 어떤 성별, 어떤 직업에 대한 편견도 갖지 말자고. 그러면서 온갖 독선 독단적인 주의 주장과 위선에 찬 허례허식에 반발, 생리적인 거부반응을 보여 왔다.
그 실례로 대학 진학 때 가라는 법과 상과 의과 정치 외교학과가 아닌 종교철학과를 선택했고, '멀리하라는 전라도 출신' 친구들도 아무 거리낌 없이 사귀고 '수전노라는' 개성 출신 여자하고 결혼까지 했으며, 내 처가 딸만 셋 낳았어도 나는 털끝만치도 섭섭하거나 아들을 아쉬워한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남들이 머리 싸매고 파고드는 사법 고시 공부도 외면했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도 외국 유학을 마다했다.
어디 그뿐이랴. 대학 다닐 때 잠시 서울 용산에서 약국을 했었다. 약제사 면허증을 돈 주고 빌려 쓰면서. 그런데 하루는 어떤 여자 손님한테 내가 약을 잘못 팔았다. 외과용 페니실린 질膣 정을 내복약으로. 질겁을 하고 백방으로 그 손님을 찾아내서 위급한 사태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예부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하마터면 내가 그럴 뻔했었다. 혼비백산하여 나는 그 즉시 약국에서 손을 뗐다.
이처럼 나는 남들이 잘 안 하는 짓만 골라가며 해온 것 같다.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것이 다 내가 어려서 들은 말, '죽은 물고기는 떠내려가지만 산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말을 잊지 않아서인지 모를 일이다.
1978년 외국 생활하다 6년 만에 내가 서울에 갔을 때 언론계 선배이신 모 인사께서 댁으로 저녁 초대를 해주셨다. 그 자리에는 전에 코리아타임스에서 같이 근무했고 나와 친하게 지냈던 옛날 동료 기자 두 명도 있었다.
저녁을 먹고 술 한 잔씩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 중에 그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있던 모씨가 내가 1972년 초 영국에 가서 개인적인 친분을 갖게 된 외교관 모 인사(주영대사관 공사, 그 후로 네덜란드 및 유엔대사 역임)를 '하우스 보이house boy' 출신이라 지칭했다. 이 말에 나는 "아니, 대한민국이란 나라 자체가 미국의 하우스 보이 같은 종, 똘만이라면 대한민국 국민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 있겠느냐?"고 대성일갈大聲一喝했다.
옆에서 듣기 좀 민망하셨는지 우리를 초대해주신 선배께서 그 자리 분위기가 좀 누구러지도록 "이 형, 영국생활 어떠십니까?"라고 물어 화제를 돌리려 하셨다. 그래도 부족했는지 나는 동문서답을 하고 말았다.
"영국 사람들은 저 혼자만 잘났다고 깝죽, 깝신거리지도 않지만, 누가 까불까불 채신없이 까불거려 봤자 아무도 알아주는 것 같지 않더라."
이토록 민감하고 과격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 나 자신이 6.25 동란 중 미군의 하우스 보이 출신이라는 자격지심에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이며 실존적인 한국인의 자존자립自存自立을 위한 역설적逆說的 자존감自尊感과 자긍심自矜心의 발로였으리라.
돌이켜 보면 8.15해방 이후 한반도에 불어닥친 시베리아 북풍삭풍北風朔風과 서양의 양풍열풍洋風熱風을 타고 밀어닥친 구호물자 화주火酒 보드카Vodka와 '고드름 고추' 얼음사탕 아니면 독초毒草 양담배와 '츄잉검 고추' 껌을 막 빨고 씹으면서 너도나도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우리 모두가 어지럽게 살아오지 않았나 종교, 학문, 예술 할 것 없이, 그야말로 '골빈당' 무골충無骨蟲이 되어, 골이 비다 못해 골 속은 물론 뱃속에까지 전쟁의 회오리바람이 불어치게, 골수骨髓는 물론 오장육부五臟六腑 다 빼버리고 말이어라.
사람이고 들짐승 날짐승이고 간에 사람답게 짐승답게 생긴대로 자연스럽게 제대로 살려면 두 팔, 두 다리, 두 날개 다 있어야 하는 자연의 이치, 천리天理를 거슬러 '좌익' 아니면 '우익', 빨갱이, 파랭이 또는 노랭이로 '연지 찍고 곤지 찍고' 억지 분장까지 해가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생으로 멀쩡한 한 눈, 한 팔, 한 다리. 한 날개, 한 허파까지 떼어버린 천하의 해괴망칙한 기형아 '곰 새끼'나 '독수리 새끼'가 되어 북극의 백곰'과 남극의 '백독수리'가 추는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 장단에 미쳐 날뛰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르고도 70여 년째 그 후유증이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있는 재주 없는 재주 다 부리면서. 옆에서 지켜보는 음흉하고 약삭빠른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이 실속 다 차리도록 말이다.
그렇다면 뭣보다 먼저 우리 배달겨레의 배알부터 추스르고 볼 일 아닌가.
자, 이제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지난 2020년 2월 26일자 칼럼 '진정한 자의식과 주체사상이란 무엇일까'와 2021년 6월 16일자 칼럼 '진정한 교육은 자습자득이다' 그리고 2021년 8월 2일자 칼럼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 우리 다시 한번 반추해보자.
'진정한 자의식과 주체사상이란 무엇일까'
“세상이여 반갑다. 사람들이여 고맙다.”
신문기자 출신 평론가 김병익 씨의 회고록 ‘글 뒤에 숨은 글 : 스스로를 위한 단상 (2004)’의 마지막 문구이다.
미국의 정치, 사회심리학자 월터 트루엣 앤더슨(Walter Truett Anderson은 그의 저서 '현실은 전과 같지 않다Reality Isn’t What It Used to Be (1990)’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 대다수 인간은 신자라기보다 믿음의 소유자들이다. 쉽사리 또 자주 전향 개종한다. 종교적인 신앙에 있어서도 한 종교뿐 아니고 여러 종교를 통해 이것은 버리고 저것을 취하거나 또 다른 것을 제게 맞게 수정 응용한다. 과거에는 문화적인 양식과 형태를 갖춘다는 것이 신비 속에 싸여 있었으나 이제는 민주화, 개방되어 개개인마다 제각기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저 자신의 신원身元과 현실을 만들어 내고, 현실이란 새 상품의 기업가들은 새 역사, 새 과학, 새 종교, 새 정치 등 새로운 제품을 창조, 개발하는데 마치 어린아이들이 물장난치듯 신바람이 난다.”
중국 고전을 TV로 강의해 장안에 숱한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동양 철학자 도울 김용옥 씨는 2002년 ‘불교의 본래 모습 - 달라이 라마를 만난 후’란 제목으로 행한 강연을 통해 “불교는 무신론이며 과학”이라고 역설했다. 그러자 “불교를 자기식으로 고착화하고 과장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망치는 것”이라며 팔리문화연구소장인 마성 스님이 김 씨의 저서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의 오류와 과장 등을 조목조목 지적한 글을 불교 인터넷 신문 ‘붓다뉴스buddhanews.com에 올렸었다. 그 당시 영국에 사는 친구 김원곤 씨로부터 받은 편지 내용 일부를 공개한다.
“도덕경 이야기를 하셨는데 생각나는 게 있어 몇 자 읊어 볼까 합니다. 얼마 전에 ‘도올을 울린 여자’와 ‘노자를 웃긴 도올’이란 제목의 월간중앙 기사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참으로 통쾌한 글이었습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이름 없는 아주머니가 유명한 대학교수요 철학자인 도올을 상대로 시비를 거는 글이었습니다. 그 아주머니의 이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요즘 인기 절정의 도올이란 자가 TV에서 노자, 공자 강의를 하여 시끄러운데 그 내용이 아주 노자나 공자를 웃기는 것이랍니다. 도덕경 강의에는 노자가 없고 논어 강의에는 공자가 없으며 불경 강의에는 부처가 없다는 말로 도올을 정면으로 깔아뭉갰답니다.”
이 편지에서 친구는 자신의 소감도 피력했다. 단지 번역의 차이에서 오는 논쟁인 것을 어느 쪽이 맞는지는 2500년 전으로 돌아가 노자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아주머니의 주장은 철학 강의가 지식인들의 전유물이거나 엘리트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마치 하버드를 나와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든지 공자를 ‘공짱구’로 표현하고 노자를 ‘책략가’이고 쿵후의 달인이며 깡패와 칼잡이들의 우상이고 하는 결례는 물론 도덕경의 해석도 엉터리라는 것이었다. 공자의 태생을 천하다고 하면서 자기는 부유한 의사 집안에 태어나 온갖 부의 혜택을 다 받고 엘리트 코스만 두루 밟아 선택된 특권층이라 자랑하는 심사는 무엇인가. 이런 지식재벌, 지식귀족이 철학의 대중화를 공으로 내세우면서 성현들을 깔아뭉개는 작태가 왜 용인되어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재미있게 강의를 하는 것은 좋지만 제대로 지식 전달을 해야 한다는 것과 개그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과학자는 아무리 형편없는 인간성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과학의 원리만 배우고 추구한다지만 철학은 철학자의 인격과 인품을 이해하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 공자를 폄하해 가면서 그는 자기만이 알 수 있고 자기만이 강의할 수 있댜는 자만심에 사로잡힌 무늬만 지식인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아, 그래서 예부터 재인才人은 덕德이 부족하고, 학무식學無識은 구제할 수 있어도 인무식人無識은 구제할 길 없다 하는 것이리라.
우리 생각 좀 해보자. 세상에 예수, 석가모니, 공자, 노자 등 그 누구를 막론하고 다 하나뿐인 존재가 아니던가. 너와 나를 포함해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 모두가 그렇지 않겠는가. 그 아무리 다른 사람한테서 배울 점, 본받을 점이 많다 해도 그 모두가 ‘참고사항’일 뿐이지, 그대로 전부 다 너나 나에게 꼭 들어맞을 수 없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으리라. 너도나도 우리 모두가 하나같이 예수나 석가모니처럼 ‘히피’나 ‘걸인’이될 수도 되어서도 절대로 안 될 일이 아닌가.
좀 극단적으로 비유해서 사람의 말소리와 몸짓을 흉내 낸다고 앵무새나 원숭이가 사람이 될 수 없듯이 예수나 석가모니의 말씀을 입버릇처럼 되뇌고 그들의 행적을 뒤밟아 본들 너나 내가 예수나 석가모니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고 가라’ 하는 것이리라.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사이라도 너는 너의 나는 나의 ‘고행’을 하고, 각자 각자의 ‘십자가’를 지며, 제각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만의 깨달음을 얻어 자아실현 자아완성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아발견을 통해 이웃을 발견할 수 있고, 동시에 네가 나고 내가 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갓난아기가 눈을 뜨고 조금씩 걸음마 하며 배워가듯 나 없이 네가 있을 수 없고 너 없이 내가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되리라. 이것이 참으로 너는 너의 나는 나의 삶을 사는 참된 도리道理가 아니겠는가.
언젠가 한국의 결혼정보회사 ‘비에나래’가 전국의 20, 30대 미혼남녀를 대상으로 ‘결혼 후 2세가 어떤 사람과 닮기를 바라는가’에 관한 e-mail 인터넷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발표했다는데 설문 자체가 부적절하지 않았을까. 아무도 닮지 않은 전무후무의 유일무이한 개성과 특성을 지닌 2세가 가장 바람직할 테니까 말이다.
[이태상 칼럼] '진정한 교육은 자습자득이다'
탈북민 출신 인권운동가 박연미(27) 씨가 “미국은 다를 줄 알았는데, 북한과 비슷한 점들을 많이 봤다”며 미국 대학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는 여러 뉴스 매체의 보도다. 미국 아이비리그의 컬럼비아대에 재학 중인 박 씨는 2021년 6월 14일(현지 시간)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북한도 이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며 이같이 비판했다고 한다.
그간 미국 교육기관의 문제를 고발해왔던 박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배우기 위해 돈, 시간, 열정을 투자했지만 그들(미국 대학)은 자신이 원하는 사고방식을 강요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지난 85년 동안 내가 한국과 영국 그리고 미국에서 살아오면서 어느 나라에서든 진정한 배움은 공식적인 학교에서가 아니고 자연과 인생이란 배움터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박 씨를 비롯한 세계 모든 청소녀/청소년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학교 교육은 각종 고정관념과 선입견이나 편견을 주입 세뇌시키는, ‘열린 교육’ 현장이 아닌 ‘닫힌 교육’의 상아탑 내지 ‘인간 기생충’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눈을 뜨게 해주기보다 거창하고 그럴듯한 이론의 독선 독단적인 ‘학설’과 ‘학문’이란 눈가리개로 무궁무진하게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우주 자연과 삶의 진실에 ‘한 눈’ 팔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위선적인 ‘색안경’을 씌워준다는 거다.
인류 역사를 통해 석가모니나 예수 등 큰 스승들은 신학대학은커녕 인학 소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 아니었나. 자고로 ‘도’라거나 ‘진리’라 하는 것은 참된 ‘도’나 ‘진리’가 아니고, 너의 ‘도’나 ‘진리’가 나의 ‘도’나 ‘진리’가 될 수 없듯이 말이어라.
지난 1월 4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글 ‘새해엔 자족감을 키워보리’를 못 보셨거나 보셨더라도 다시 한번 우리 함께 반추해보고자 옮겨보리라.
매년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새해 결심을 하게 된다. 대개는 작심 3일로 끝나게 되지만 이 결의決意와 결지決志중에는 올해는 무엇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하지 않겠다는 것보다 훨씬 더 많으리라.
하나의 역발상逆發想으로 ‘시간 낭비하지 말 일 8가지 - 8 Things That Are Truly A Waste of Time’를 소개해 본다.
1. TV 보는 것 Watching TV
2. 심심하고 외롭다고 아무하고나 사귀는 것 Being in a relationship with someone just because you feel bored and lonely
3. 모든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하는 것 Trying to solve everyone’s problems
4. 대화에서 매번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것 Trying to win every conversation that you have with people
5. 네가 불행한데도 단지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겠다는 것 Doing something just because it makes your parents happy while you are unhappy
6. 네가 이미 바꿀 수 있었을 것에 대해 늘 불평만 하는 것 Constantly complaining about something that you could have already changed
7. 진짜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가짜 문제를 만들려고 하는 것 Creating fake problems so that you don’t have to deal with your real problems
8. 너에게 관심 없는 사람이 널 좋아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 Trying to make someone love you when they are not interested in you
- 작자 미상 (Unknown)
이상의 8가지 지침指針을 하나로 줄이자면 ‘매사每事에 억지 쓰지 말고 자연의 순리順理를 따르라’는 것이 되리라.
여기에다 사족蛇足을 하나 달아보자면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로 남과 비교하지 말라’가 되지 않을까.
이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극심極甚한 마음고생 끝에 터득한 ‘진리眞理’이다. 사사건건事事件件 남과 비교하다 보면 아무 쓸데없고 전적으로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열등감劣等感과 우월감優越感의 노예가 되는 걸 나는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모든 일에 나보다 잘하는 잘난 사람도 나보다 못하는 못난 사람도 있게 마련인데 어떻게 다 같을 수가 있으며 또 다 같아서도 아니 되지 않겠는가라는 깨우침을 얻게 된 것이다. 독수리로 태어났으면 독수리답게, 달팽이로 태어났으면 달팽이답게 살 일이지. 우주 자연 만물이 다 대우주 macro- cosmos에서 생성生成된 소우주 micro-cosmos라 해도 우리가 다 ‘붕어빵’이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어라.
역사적인 실존 인물 한 사람을 예로 들어보리라.
19세기 미국의 역사가이며 저술가 문인 헨리 아담스Henry Adams (1838-1918)는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아담스John Adams(1735-1826)가 그의 증조부였고, 6대 대통령인 존 퀸시 아담스 John Quincy Adams(1767-1848)는 그의 조부였다. 이렇게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보스턴에 있는 명문 사설 라틴어학교를 거쳐 하버드에서 공부를 했으나 그는 평생토록 공식적인 학교 교육에 비판적이었다.
그의 유명한 자서전 <헨리 아담스가 받은 교육 The Education of Henry Adams(1907)>에 그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자서전이라기보다 하나의 교육, 아니 헨리 아담스란 인물이 단지 교육이란 옷을 입힌 마네킹으로 여러 가지 다른 의상을 걸치는 교육이 유용한가에 대한 전기傳記이다. This is not so much an autobiography as it is the biography of an education. Rather, the figure called Henry Adams is merely a manikin on which the clothing of education is to be draped, outfit after outfit, to demonstrate whether the attire fits or not; that is, whether the education turns out to be useful.”
그는 이렇게 공식적인 학교 교육의 무용론을 설파했다. 그의 자서전 서문序文을 아래와 같이 옮겨 본다.
서문
스위스 제네바의 철학자이자 작곡가 장 자크 루소 Jean-Jacqes Rousseau (1712-1778)는 그의 유명한 고백록(Confessions, 프랑스어로는 Les Confessions)을 신적神的 존재에게 바치는 간절한 호소문으로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 때로는 경멸스럽고 사악한, 때로는 착하고 너그럽고 좋은 모습으로 나 자신을 당신 앞에 드러냈고 당신께서 보신 그대로입니다, 나의 영원한 아버지시여! 내 주위로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모아주십시오. 그래서 그들이 내 고백을 들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내 말을 들으면서 그들이 내 결함에 신음하고 내 부족함에 같이 수치스러워하면서 그들 각자도 각자대로 당신의 옥좌 앞에 엎드려 각자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그 누가 감히 당신께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고 훌륭하다’ 아뢰올 수 있는지 살펴봐 주십시오.”
장 자크 루소는 18세기의 위대한 교육자로 그 시대 다른 누구보다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인간성을 개선하는 그의 특이한 방법은 보편적으로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19세기 교육자들은 그 누구도 자신의 약점을 노출시키려 하지 않았고 종교인들이 그렇듯이 장 자크 루소도 우리 모두의 창조주께 그의 피조물인 우리들의 모자라고 불미스러운 점을 보여드리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감천만스럽게도 20세기에 와서도 우리가 따르고 피해야 할 안내 지표를 찾기가 힘들다. 미국의 학문과 문학도 고등 교육에 관한 그 어떤 실용성 있는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학생은 장 자크 너머 벤자민 프랭클린에게서 자아 완성을 위한 인간수업의 모델을 찾아야 한다. 사어死語가 된 언어는 예외로 하고, 그 아무도 교육의 어떤 부분이 개개인 학생의 삶에 유용한지 안 한 지 토의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자서전)에서 이 문제를 나는 다뤄보려고 한다.
교육자로서 장 자크는 어떤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제 일인자이다. 그는 ‘에고’를 경계하라는 하나의 경고성 기념비를 세운 사람이다. 그의 시대 이후로 그의 영향 때문에 ‘에고’는 점차로 스스로 소멸되어 ‘마네킹’이 되었다. 이 마네킹에 이 옷 아니면 저 옷 여러 가지 교육이란 장식품 의상을 입혀 인형 같은 마네킹에 잘 어울리는지 아닌지. 학업의 목적이 학생의 인격과 인성 위주의 인물이 아닌 그가 걸치는 의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재단사는 그의 고객의 요청에 따라 마네킨과 옷을 서로 맞춰가며 마름질한다. 이 책(자서전)에서는 재단사의 목적이 대학에서든 아니면 다른 학업장에서든 젊은이들이 세상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비상사태에도 잘 대응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란 옷을 맞춰 주는 것인 동시에 그들 부모에게 씌워졌었던 짜깁기 옷들의 결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독자적인 정신력을 가진 젊은이라면 그의 스승에게서는 고작해서 학구적인 도구의 사용법을 익히는 것일 뿐, 교육의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이 우주 에너지의 한 형태로서 그가 추구하는 학업의 목적은 그가 타고난 모든 자질과 능력을 유효적절하게 사용하고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며 자신의 노력을 원하는 방향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이 모든 방편 도구들과 모델들은 버려도 된다. 그러니 마네킹은 3차 또는 4차 방정식 같은 기하학적 학구 작업상의 가치가 있기에 인간 조건의 작동과 비율을 측정하는 유일한 기준치이라서 없어서도 안 되겠지만 동시에 현실감과 현실성이 있어야 한다. 마치 그대로의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실제로 그럴 수도 있으리라!”
PREFACE
JEAN JACQUES ROUSSEAU began his famous Confessions by a vehement appeal to the Deity:
"I have shown myself as I was; contemptible and vile when I was so; good, generous, sublime when I was so; I have unveiled my interior such as Thou thyself hast seen it, Eternal Father! Collect about me the innumerable swarm of my fellows; let them hear my confessions; let them groan at my unworthiness; let them blush at my meannesses! Let each of them discover his heart in his turn at the foot of thy throne with the same sincerity; and then let any one of them tell thee if he dares: 'I was a better man!'"
Jean Jacques was a very great educator in the manner of the eighteenth century, and has been commonly thought to have had more influence than any other teacher of his time; but his peculiar method of improving human nature has not been universally admired. Most educators of the nineteenth century have declined to show themselves before their scholars as objects more vile or contemptible than necessary, and even the humblest teacher hides, if possible, the faults with which nature has generously embellished us all, as it did Jean Jacques, thinking, as most religious minds are apt to do, that the Eternal Father himself may not feel unmixed pleasure at our thrusting under his eyes chiefly the least agreeable details of his creation.
As an unfortunate result the twentieth century finds few recent guides to avoid, or to follow. American literature offers scarcely one working model for high education. The student must go back, beyond Jean Jacques, to Benjamin Franklin, to find a model even of self-teaching. Except in the abandoned sphere of the dead languages, no one has discussed what part of education has, in his personal experience, turned out to be useful, and what not. This volume attempts to discuss it.
As educator, Jean Jacques was, in one respect, easily first; he erected a monument of warning against the Ego. Since his time, and largely thanks to him, the Ego has steadily tended to efface itself, and, for purposes of model, to become a manikin on which the toilet of education is to be draped in order to show the fit or misfit of the clothes. The object of study is the garment, not the figure. The tailor adapts the manikin as well as the clothes to his patron's wants. The tailor's object, in this volume, is to fit young men, in universities or elsewhere, to be men of the world, equipped for any emergency; and the garment offered to them is meant to show the faults of the patchwork fitted on their fathers.
At the utmost, the active-minded young man should ask of his teacher only mastery of his tools. The young man himself, the subject of education, is a certain form of energy; the object to be gained is economy of his force; the training is partly the clearing away of obstacles, partly the direct application of effort. Once acquired, the tools and models may be thrown away.
The manikin, therefore, has the same value as any other geometrical figure of three or more dimensions, which is used for the study of relation. For that purpose it cannot be spared; it is the only measure of motion, of proportion, of human condition; it must have the air of reality; must be taken for real; must be treated as though it had life. Who knows? Possibly it had!
- February 16, 1907
흥미롭게도 지난해 11월 출간된 그의 전기傳記 ‘미국의 마지막 귀족: 빛나게 뛰어난 생애와 헨리 아담스가 받은 별난 교육THE LAST AMERICAN ARISTOCRAT: The Brilliant Life and Improbable Education of Henry Adams’ By David S. Brown에서 이 전기작가 데이빗 브라운은 아담스는 평생토록 굉장한 ‘우월감’에 시달려 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담스와 교분이 많았던 여러 사람들의 견해를 종합해 다음과 같이 영국의 정치인 존 몰리John Morley(1838-1923)의 말을 인용한다.
“만일 A(dams)가 벌거벗은 제 몸을 거울에 비춰본 적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는 다른 사람들을 좀 더 좋게 평했을 것이다. If A. had ever looked at himself naked in a glass he would have rated other men a little more gently.”
그러면서 전기작가는 헨리 아담스의 삶을 결론적으로 이렇게 평하고 있다.
“헨리가 특출나게 뛰어났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미학적美學的 취향은 아주 높았고, 심통이 나지 않을 때는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했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그가 평생토록 극복하지 못한 그의 미숙한 불안감을 노출시킨 것이었다. That Henry was brilliant is beyond question. His aesthetic taste was very fine, and he wrote beautifully when he wasn’t consumed by bile. But his caustic critiques of others revealed an insecurity he never outgrew.”
내가 추측건대, 그의 여러 가지 천부의 자질과 귀족적인 가문의 특혜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이 ‘황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담스는 ‘명문가’와 우수한 ‘재능’이라는 핸디캡으로 ‘불우不遇’(?)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저도 모르게 ‘우월감優越感’이라는 superiority complex 환자가 되지 않았었을까.
우리 생각 좀 해보면 ‘우월감’도 일종의 ‘열등감’으로 ‘불안감’만 키워주는 악성惡性 만성피로증후군慢性疲勞症候群의 고질병痼疾病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 치졸무쌍稚拙無雙한 유아병幼兒病인 열등감과 우월감을 극복할 수 있는 천연적인 근치약根治藥은 무엇일까. 이는 마땅히 다름 아닌 우리 모두 하나 같이 예외 없이 코스미안으로 태어난 우리의 진정한 우주적 정체성과 본질을 깨달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되는 각자 자신의 ‘자족감自足感 Sense of Self-Sufficiency’을 키우는 일이어라.
[이태상 칼럼]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 The Easiest Thing You Can Do'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그냥 너가 되는 거다. 사업을 하는데도 내가 나답게 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독창성과 남과 다른 독특성 말이다. 나는 나로서 내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The easiest thing you can do is just do you. I felt like doing me would be the easiest path to me remaining relevant in the industry. It’s originality and uniqueness. I just try to do me.”
2021년 8월 1일자 뉴욕타임스 비즈니스 섹션 코너 오피스 Corner Office 인터뷰 기사에서 미국의 래퍼 겸 스트리머요 배우로서 버락 오바마와 대마초도 한 대 피웠었다는 스눕 독 Snoop Dogg(본명은 Calvin Cordozar Broadus Jr.)이 지난 30년 가까이 여러 가지 사업에서도 계속 크게 성공하고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가 대답한 말이다.
이 말은 그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만인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 우리식으로 다시 표현하자면 ‘억지 춘향이 노릇’ 하지 말고 각자는 각자 대로 사는 일이 가장 쉽고도 성공적일 수 있다는 거다.
2021년 7월 31일자 중앙일보 기획기사 ‘조영남이 남기고 싶은 이야기 (22) 보고 싶은 사람’에서 조영남은 이렇게 적고 있다.
“왜 내가 그 당시 그토록 함석헌 선생을 마지막 보고 싶은 사람으로 결정했는가. 그때 나는 공부를 한답시고 기고만장한 나머지 ‘예수 샅바를 잡다’라는 책을 쓸 땐데 내 생각에 한국 근대사에 나보다 먼저 예수한테 씨름 한판 걸어 끝낸 것처럼 보인 사람이 바로 함석헌 선생이셨다. 더불어 내가 함석헌 선생한테 홀딱 반한 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내가 함 선생을 롤모델로 좋아한 첫째 이유는 ‘씨알’이라는 낱말을 고이 간직해서 우리에게 남기신 업적(함 선생이 사용한 ‘씨알’의 의미는 단순한 종자나 열매가 아니다. 심오한 뜻이 있다.) 선생의 종교관, 기독교이면서 무교회주의를 꺼내셨던 바다처럼 넓은, 말 그대로 ‘씨알’ 같은 맘씨….”
우리말에 ‘배알이 꼴린다’는 표현이 있다. 아니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뜻으로 말이다. 하지만 꼴릴 배알이라도 좀 남아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또 우리말에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한다’ 느니 ‘양반은 얼어 죽어도 짚불은 안 쬔다’지만 ‘개살구도 맛들 일 탓’이라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리 뱃속 정신부터 차려야 하지 않을까.
근년에 와서 서구적 ‘인권사상’이 종교처럼 세계 각처에 파급되고 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호주와 뉴질랜드, 남북 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유색인종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 격이다. 서양 사회에선 소위 동물애호가들이 동물들의 권리를 인간의 권리보다 더 중요시하기도 하지만 동물 내지 식물의 권리는 제쳐놓고 인간의 생존과 복리를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도모하는 것이 급선무이겠으나 공리공론空理空論의 이념적 정치적 법적 자유나 평등은 실질적 경제적 일상적 자유와 평등 없이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백인들은 수족관 속의 금붕어처럼 공중누각에 높이 앉아 세계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데 유색인들은 흙탕물 속 미꾸라지같이 살고 있다. 이들은 ‘운명의 포로’가 된 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업業’으로 전생에 진 빚을 이승에서 갚는다고 모든 것을 팔자 소관八字所關’으로 돌리고 만다.
물론 이러한 만병통치萬病通治식 신앙과 체념 때문에 수많은 인간들이 고해苦海와 같다고 비유되는 고달픈 삶을 참고 견디어 왔는지 몰라도 이들이 이처럼 숙명론적 사고방식과 정신적인 노예근성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인권다운 인권을 말할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정신적으로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기독교나 공산주의 또는 자본주의 사상으로 세뇌시킨다고 이들에게 인간다운 인격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최근 100여 년 역사만 돌이켜 보더라도 한 민족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를 침해당해왔다.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 이어 1910년에 이루어진 한일합방이 그 한 예라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한 우리나라 국토의 분단이 또 한 예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두 동강 난 우리 민족의 비극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미-소 양 진영 사이에 뜨겁게 끓어 오른 냉전冷戰의 열기 속에서 그 더욱 참혹한 비극인 동족상잔同族相殘의 한국전을 불러 일으켰고, 1953년 휴전이 되었으나 긴장이 완화되지 않은 채 우리의 분단체제는 강대국들의 국익을 위해 굳어져 왔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다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을 맞았으나 이것은 우리의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없었다. 우리 힘으로 쟁취한 해방이 아니고 승전국인 미-소에 의존한 것이었던 만큼 이 두 새 지배세력 영향권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국가, 혹은 민족 간에 각자 제힘을 길러 자존自存/自尊 자립自立할 때 참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종교, 문화, 예술에 있어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각자대로 제 줏대와 배짱부터 키울 일이다.
삶의 지혜라는 것 중에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것도 있지만 이런 처세술을 따르다 보면 자기 고유의 인격과 개성 및 정체성은 물론 자신의 존재 이유조차 상실하고 제 삶다운 삶이 실종되지 않던가.
한국인의 경우 그 대표적인 것이 사대주의라 할 수 있으리라. 역사적으로 보면 지정학상 절대적인 필요성에서 우리의 생존수단과 방식이 되어 왔겠지만, 이는 동시에 우리의 자존자립을 저해해 오지 않았나.
몇 년 전 (2015년 3월 16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칼럼에서) 전직 언론인 이광영 씨는 이렇게 일갈一喝한다.
“크고 힘센 나라를 섬기며 주체성 없이 그들에 기대어 존립을 유지하려는 생각이나 주장을 사대주의라 한다. 자신의 존엄을 부정하고 스스로 비하하거나 얕잡아 보며 자기 힘을 믿지 않고 남에게 의존하며 위협이나 압력에 쉽게 굴복한다. 자신의 정당한 권리나 이익을 주장하지 못하며 제물로 바치는 자기부정, 자기비하의 노예근성이라 하겠다. 이런 사람일수록 누가 뭐라고 하면 우르르 따라가는 유행에 휩쓸린다. 요즘의 한국사회가 이런 문화 사대주의에 찌들어 있다.”
이를 한 마디로 내가 줄이자면 ‘골빈당’ 노릇 그만하고 ‘골찬당’이 되자는 말이리라.
이게 어디 한국인뿐이랴.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유럽사회에서도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보건 등 각 분야에서 골찬당을 찾아보기 힘들고, 민주주의가 아닌 ‘우중주의愚衆主義가 판치고 있는 현실이다.
선거란 것도 이익집단의 정치헌금 기부금으로 치러지는 돈놀음이고, 경제란 것도 1%의 ‘있는 자들을 위해 99%의 없는 자’들을 제물로 삼는 축제다. 문화란 것도 포르노 등 퇴폐적인 서커스고, 종교란 것도 신神과 천국을 팔아먹는 사기 사업이다. 보건이란 것도 인명을 살상하는 총기와 독약 같은 술, 담배 그리고 고가高價의 거의 무익한 영양보조제며 마약의 일종인 마리화나까지 기호용으로 합법화시켜 병 주고 약 주는 반인륜적 거대음모라 할 수 있지 않나. 지구 생태계를 파괴해 인류의 자멸을 재촉하는 공해산업은 거론할 것도 없이 말이다.
우리가 공중에 날리는 연鳶을 생각해보자. 바람을 탈 때가 아니고 거스를 때 가장 높이 오르지 않는가. 별들도 하늘이 깜깜할수록 더욱 빛나고 산 물고기는 떠내려가지 않고 물결을 거슬러 헤엄치며 생명 있는 식물은 굳은 땅을 뚫고 올라와 푸른 잎과 아름다운 꽃을 피워 맛있는 열매를 맺지 않는가. 이것이 자연의 순리이고, 결코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리라.
내일 모래면 8·15 광복 76주년을 맞게 되는데 얼마 전 교육부가 ‘이달의 스승’ 12명 가운데 8명에 대해 친일 행적 의혹이 제기되면서 모일간지에 ‘교육부가 제정신인가’란 사설까지 등장했었다.
우리 냉정히 생각 좀 해보자. 한반도의 지정학상 역사적으로 우리는 항상 생존수단으로 친 강대국을 강요당해 왔다. 친중이든 친러든 친일이든 친미든 따질 것도 없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것이 약소민족의 비애가 아니던가.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씨가 거의 다 말라버렸을 것이다. 반항하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인디언들 같이 말이다.
그나마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들은 반항하지 않고 노예로 순종, 복종하다 보니 그 후예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까지 되었으며 지난해 미국 대선 민주당 조 바이든 러닝메이트 부통령 후보로 자메이카 이민자 출신 아버지와 인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난 카말라 해리스 초선 상원의원이 선택되지 않았는가.
트루먼 전기를 읽어보니 2차대전 당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아주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원폭 투하 결정을 하게 된 것이 그에게 올라온 전략보고서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절대로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그러니 미군이 일본에 상륙해 일본 국민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전멸시키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자면 미군의 인명 피해도 수십만 명 이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 8·15 광복 직후로 돌아가 보자.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념논쟁에 휩쓸려 좌익이다 우익이다 하면서 서로 죽이고 죽다가 6.25 동족상잔까지 겪고도 아직까지 친미다 친중이다 친러다 하면서 편을 갈라 ‘원수’로 대치하고 있지 않는가.
굳이 친할 친親 어버이 친親 자字를 꼭 써야 한다면 친일파親日派만 쓸 게 아니라 친월파親月派 친성파親星派 친우파親宇派도 즐겨 쓰는 친인파親人派 친지파親地派 친천파親天派가 되어볼거나.
이것이 현재 전 세계 온 인류가 직면한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과 홍수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하고 우주 만물의 상생과 공존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리라.
물론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빛 좋은 개살구라고 내용이 없는 그 껍데기 이름뿐이겠지만 그 단어 하나만큼은 탓할 데 없는, 남한 북한, 인종과 국적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 우주 나그네 우주인 코스미안으로서 우리가 깨달아 가져야 할 우리 줏대, 우리 모두의 진정한 자의식과 주체성을 상징하는 진주같이 빛나고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단어임이 틀림없어라.
자고로 ‘도道’라 하는 것은 도가 아니고 ‘진리’라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하듯이 우리의 어떤 생각이나 사랑도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부는 바람처럼 새장 같은 틀에 가둘 수 없으며 길 없는 길이 길이라면 각자 자신의 숨을 쉬듯 자신의 길을 찾아가야 하리라. 그러니 우린 국가와 민족, 인종과 성별, 종교와 이념, 직업과 계층, 또는 학벌이나 지방색, 심지어는 가족이라는 인연의 사슬까지도 끊어버리고 말이어라.
아, 그래서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는 “모든 사람에게 천만 가지 경전을 다 가르쳐 주고 천만 가지 선善을 다 장려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라, 먼저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응보의 진리를 믿고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라고 했으리라.
이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응보의 진리’를 내가 한 마디로 풀이해보자면 ‘우리는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너를 위하면 곧 나를 위하는 게 되고, 내가 너를 다치게 하면 곧 내가 다친다는 진실 말이다.
호기심에 가득 찬 아이들은 말끝마다 “왜?”라고 묻는다. “네가 좋아야 나도 좋으니까” 이것이 정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어른들도 아이들처럼 “왜?” 라고 묻고, 전쟁과 파괴의 카오스를 초래하는 대신 사랑과 평화의 코스모스를 창조해가면서 밝고 아름다운 우리 코스미안의 역사를 써보리라.
이것이 우리 배달겨레의 배알부터 추스르는 일이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