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미주 뉴욕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살며, 느끼며] 칼럼 - ‘마코의 사랑’ 필자 민병임 논설위원은 “마코는 2017년 약혼소식을 전하면서 “태양처럼 밝게 웃는 그의 미소에 끌렸다” 고 했다. 고무로가 아침 이면 맨하탄 거리를 걸어 법률 사무소로 출근하고 저녁에는 시험 공부를 하는 모습, 평민 마코가 메트 뮤지엄 큐레이터로 바삐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마코의 사랑을 지지한다.”고 칼럼 글을 맺고 있다.
나루히토 일왕의 조카 마코(30) 공주와 10월26일 결혼한 고무로 게이(30)가 뉴욕 변호사 시험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힘들게 사랑하고 결혼했는데 변호사 시험에 떨어져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든다.
안그래도 일본 국민의 눈치를 보느라 결혼 축하의식 없이 관할 지자체에 혼인신고만 하고 지참금도 포기한 고무로 마코. 현재 도쿄의 한 아파트에 임시로 머물며 뉴욕 신혼생활을 준비 중이었다.
지난 31일 일본 모든 언론은 고무로가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불합격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변호사 시험에 9,227명이 응시하고 63%인 5,791명이 합격했고 불합격자는 3,436명인데 그중 한명이 고무로다’ 며 부정적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마코 공주와 평민 고무로는 일본 국제기독교대학(ICU) 동기로 5년 전 대학에서 처음 만났다. 마코는 이곳에서 예술과 문화유산을 공부했다.
2017년 9월 약혼을 발표하자 고무로 모친의 금전문제를 둘러싼 논란으로 일본국민들은 ‘이 결혼 반댈세.’ 하고 나섰고 결혼한 공주에게 주는 정착금 130만 달러때문이라는 억측까지 나왔다. 결국 결혼은 연기되었고 고무로는 일본을 떠나 2018년 8월 뉴욕 포담대 로스쿨에 진학했고 이들은 인터넷으로 사랑을 이어나갔다.
고무로는 내년2월에 다시 시험을 치를 것이며 더 열심히 하겠다고 한다. 그동안 잘못된 보도에 대한 두려움, 스트레스, 슬픔으로 아팠던 마코의 병증이 이번 고무로의 불합격으로 인해 재발하지 않기 바란다.
다이쇼 덴노(1879~1926)의 직계자손은 남자들은 모두 히토(仁)으로 끝나는 이름을, 여자는 코(子)로 끝나는 이름을 가지며 성씨는 없다. 일본 왕실 구성원은 성씨가 따로 없는 것은 저들의 논리로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는 이유다.
1947년 미군정 일본 통치시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지침과 명령으로 쇼와 덴노의 인간선언이 있었다. 이후 신의 후손이 아니라 모두 인간이 되었다. 참으로 인간적인 사랑을 한 마코, 이제 일본 국민이나 언론은 마코 공주를 잊어주어야 한다.
일본 여성의 지위가 가장 낮았을 때는 15C 중엽~16C에 걸친 전국시대였다. 1467년 아들을 쇼군에 앉히려는 어머니의 욕망으로 시작된 오닌의 난이 11년간 계속되면서 시작된 전국시대는 사무라이 하극상 시대였다. 공주들은 정략결혼으로 인질이 되었는데 다이묘끼리의 사돈 맺기는 권력 싸움에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복여동생 아사히 히메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정략결혼 시켰다. 이미 남편과 아이가 있는 44세 여동생을 도로 데려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보냈다. 하층민 여성들은 돗자리 하나를 등에 지고 다니면서 남성이 원하면 아무 곳에서나 이 돗자리를 펴고 드러누웠다. 천하통일을 꿈꾸는 자들의 무대 뒤에서 여성들의 삶은 이렇게 고달팠다.
원시시대 일본은 모권이 존중 받았으나 무사계급 출현과 더불어 부권중심 가정이 되면서 여성들은 가정의 소유물이 된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기독교적 청교도주의가 들어오면서 여권 신장운동이 일어났으나 여전히 일본여성에게는 순종적이고 남성을 위하는 이미지가 남아있다.
나이 30된 마코의 남편이 왜 국민들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지, 고무로의 모친이 미혼모라 더욱 부정적이었다는데, 여성인권은 어디 갔는지?
현재 뉴욕의 법률사무원 수입으로는 맨하탄 아파트와 생활비가 힘들 것이다. 그래도 부부는 어려울 때 서로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각자 형편에 따라 남편 대신 아내가, 아내 대신 남편이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마코는 2017년 약혼소식을 전하면서 “태양처럼 밝게 웃는 그의 미소에 끌렸다” 고 했다. 고무로가 아침이면 맨하탄 거리를 걸어 법률 사무소로 출근하고 저녁에는 시험공부를 하는 모습, 평민 마코가 메트 뮤지엄 큐레이터로 바삐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마코의 사랑을 지지한다.
<민병임 논설위원>
나 또한 ‘마코의 사랑’을 전폭적으로 지지 응원하면서 2016년 3월 1일 자연과인문에서 출간된 우생의 졸저 <사상이 아니고 사랑 이다>에 실린 글 ‘정신적인 정조대’와 2020년 5월 29일자 코스미안 뉴스에 올린 항간세설 칼럼 글 ‘코스미안은 사랑의 화신이어라’를 옮겨보리라.
‘정신적인 정조대’
2015년 11월 29일자 뉴욕타임스 주말 잡지는 지난 7월과 8월 두 달에 걸쳐 정기구독자 중에서 참여한 2,987명의 독자를 상대로 진행된 온라인 연구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독자들에게 던진 질문이란 “만일 당신이 목 아래로만 촬영되는 포르노 영화에 출연해 상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다면, 당신은 익명의 포르노 스타가 되겠는가?? If you could star in a pornographic movie neck down and get paid handsomely for it, would you do it?”라는 것이었다.
응답자의 20%는 ‘Yes’ 하겠다고, 18%는 ‘Maybe’ 봐서 하겠다고, 62%는 ‘No’ 안 하겠다고 했다.
이 기사를 보면서 1998년 개봉된 미국영화 ‘은밀한 유혹Indecent Proposal’이 생각났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다이애나와 데이빗은 고교 때 만나 결혼한 사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집을 지을 생각으로 은행 융자를 얻어 땅을 구입하나 부동산업계의 불황으로 융자금 상환을 못할 상황에 처한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데이빗이 직장에서 해고되자, 도박으로 자금을 마련하자며 두 사람은 라스 베가스 Las Vegas 로 간다.
첫 날은 운 좋게도 필요한 돈의 절반을 따내지만 다음 날 모든 것 다 잃고 만다. 이 때 카지노에서 우연히 만난 억만장자 존 케이지가 다이애나와 하룻밤을 지내는 대가로 백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다이애나는 데이빗을 위해 기꺼이 케이지와 하룻밤을 지내고 돈을 받는다. 그러나 상환기한이 지나 땅은 은행에 넘어가고, 데이빗은 그날 이후 다이애나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다이애나는 데이빗과 헤어지기로 하고, 케이지와 함께 지내게 된다.
미국에서 개봉 당시 영화와 같은 내용의 ‘잠자리 제안’을 받는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 여성의 80%가 기꺼이 응하겠다고 밝혔다.
돈을 받고 인명을 살상하는 용병傭兵이나 청부살인업자請負殺人業者 또는 무기, 마약, 술, 담배 제조 및 판매업자 아니면 제 목숨과 상대방 목숨을 걸고 싸우는 권투, 레슬링 등 만행의 ‘스포츠’ 선수가 되기보다, 그도 아니면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감정노동이든, 평생토록 중노동 한다 해도 입에 풀칠하기 힘든 수많은 일보다 이 얼마나 즐겁고 쉬운 일이랴.
그렇다면 뉴욕타임스 독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들의 99%가 속으로는 YES, PLEASE 라고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친구가 이메일로 보내준 일본인들의 성씨姓氏와 기모노의 유래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를 보면,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천하 통일하여 각 지방 토착지배세력 토호土豪 간의 오랜 내전 內戰을 종식시키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통일 후 백성들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 강화를 위하여 많은 사회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였는데, 예를 들어 농민들의 무기 소지 금지, 전국 토지 개혁, 농업 및 상업 장려, 농민과 무사武士 계급 구분, 출산 우대 정책을 강력히 시행하였다.
특히 출산 장려 졍책에 관한 한 가지 에피소드에 의하면, 오랜 전쟁으로 남자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인구 감소로 인한 출산장려가 시급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왕명으로 모든 부녀자들에게 외출할 때, 등에 담요 같은 걸 항상 메고 아랫도리 속옷은 입지 말고 다니다가 어디에서든 남자가 요구하면 그 자리에서 성관계를 갖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것이 일본 여인의 전통 의상인 기모노의 유래이며 오늘날에도 기모노를 입을 땐 팬티를 입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기모는 여자가 풀숲, 들판 아무데서나 누워서 섹스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옷으로, 여자의 등에 모포를 메고 다니다가 남자들의 섹스 요구에 신속히 응하도록 만들었기 때문데, 옛날 기모노는 모포가 컸는데 요즘의 기모노는 개량된 것이라고.
그리고 세계에서 일본이 가장 많은 성씨를 가지고 있는데 그 연유는 기모노의 유래와 큰 상관관계가 있다. 그 당시 전장戰場서 살아남은 남자들은 아무 여자이건 자기 마음에 들면 섹스를 요구하여 성행위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단다.
우리 나라 한국인의 성씨가500여 개 남짓 한데 비하여 일본인의 성씨는 10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木下(기노시타) – 나무 밑에서
山本(야마모토) – 산 속에서
竹田(다케다) - 대나무 밭에서)
大竹(오다케) – 큰 대나무 밑에서
太田(오타) – 콩밭에서
村井(무라이) – 시골 동네 우물가에서
山野(야마노) – 산 밑 들판이 시작되는 곳에서
川邊(가와베) – 개천가에서
森永(모리나가) – 숲 속에서 오래 만난 남자와
麥전(무기타) – 보리밭에서
市場(이치바) – 시장 (장인들의 작업실 공방)에서
犬塚(이누즈카) – 개무덤에서
田中(다나카) – 밭 한가운데서
海(우츠미) – 가까운 바다에서
寺(오쿠테라) – 절에서
角屋(카도야) – 코너에 있는 집에서
栢林(카시와키) – 측백나무 아래서
桐本(키리모토) – 오동나무 아래서
小島(코지마) – 작은 섬에서
小林(코바야시)- 작은 숲에서
笹森(사사모리) – 조릿대(대나무와 비슷한) 숲에서
高柳(타카야키) – 버드나무 아래서
皆川(미나카와) – 개천가에서
水上(미나카와) – 물 위에서
그 당시 성씨를 만들 때에는 한문을 읽고 쓸 줄 아는 지식층 계급의 승려들이 성씨와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아기를 낳은 엄마가 대부분 남자의 이름과 성씨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름을 지어주는 승려들은 주로 섹스를 한 장소를 아기 엄마에게 물어보아서 성씨를 지어주었다고.
그 중 일본 성씨 중에 특히 밭 ‘전田’ 자의 성씨가 많은 것을 보면, 논에서는 섹스를 하기가 불편해 주로 밭에서 애를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지금도 일본 여자들은 우리나라 여인들이 명절에 한복 입듯이 기모노를 자주 입는데 기모노를 입을 때는 아예 팬티를 입지 않는 풍습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중세 유럽 여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정조대貞操帶(영어로는 chastity belt) 는 인류가 남성중심사회로 진입한 후(여성중심의 모계사회로부터 퇴화退化한 이래로) 남성들이 고안해 낸 인류역사상 최악의 발명품이리라.
그렇다면 예부터 우리나라에서 여자에게만 강요되어 온 ‘정조관념貞操觀念’이란 것이 어디까지나 남성위주의 독점욕에서 여성을 자신의 소유물로 취급한 너무도 치졸무쌍 稚拙無雙한 정신적인 정조대라고 해야 하리라.
[이태상의 항간세설] 코스미안은 사랑의 화신이어라
큰 그림이 숙명이라면 작은 그림은 운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별 가운데 지구라는 별에, 수많은 생물 중에 인간으로, 어떤 나라와 사회 그리고 지역에, 어느 시대와 시기에, 어떤 부모와 가정환경에, 어떤 신분과 여건에, 어느 성별 로 태어나느냐가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 고 대응하는가가 운명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숙명(宿命)의 ‘숙(宿)’은 머무를 숙 자(字)이고 운명(運命)의 운 (運)’은 흐를 운 자(字)인 것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고정된 게 숙명이고 변하는 게 운명이란 뜻이 아닌가. 영어로는 destiny, doom, fate, fortune, lot 등의 단어가 사용된다. 영어 노래 제목에도 있듯이 ‘넌 나의 운명(You Are My Destiny)’이라고 할 때는 ‘넌 나의 종착지’란 의미에서 ‘넌 나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캐나다 가수 폴 엥카(Paul Albert Anka, 1941- )가 부른 노래 가사 첫 구절을 우리 한 번 함께 음미해보리라.
넌 나의 숙명
You are my destiny
그게 바로 너야 나에게는
That’s what you are to me
넌 나의 행복
You are my happiness
그게 바로 너야
That’s what you are
영어로 ‘It was my fate to be or to do’라 할 때 ‘내가 어떻게 되거나 뭘 하게 될 운명 또는 숙명이었다’고 하는가 하면, ‘운명의 총아’라 할 때는 ‘a child of fortune’이라고 행운아(幸運兒)란 뜻이고, ‘누구와 운명을 같이 한다’ 할 때는 ‘cast one’s lot with some- one’이라고 내 몫(my lot)을 누구에게 건다고 한다. 그리고 ‘He met his doom bravely.’라 할 때처럼 ‘doom’은 불행한 종말을 가리킨다.
최근 영국에 사는 친구가 영국 여왕(Queen Elizabeth II, 1926 - )의 어렸을 때부터 찍힌 사진들을 동영상으로 보내온 것을 보고 나는 이렇게 한마디 코멘트를 답신으로 보냈다.
“왕관의 노예로 90여 평생을 살고 있는 모습 보기 정말 딱하다”
물론 세상에는 이 영국 여왕의 신세를 부러워할 사람들이 많겠지 만 나는 사랑을 위해 대영제국의 왕위를 버린 윈저공(Duke of Windsor, Edward VIII, Former King of the United Kingdom 1894-1972)을 떠올렸다.
조지 5세(George V1865-1936)의 아들로서 1936년 4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미국의 이혼녀 심슨부인(Wallis Simson1896-1986)과의 사랑 때문에 퇴위한 에드워드8세 얘기다. 당시 라디오를 통해 퇴위를 발표한 그의 퇴위사를 옮겨본다.
“오래 고심 끝에 몇 마디 내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난 언제나 아무것도 숨기려 하지 않았으나 지금까진 헌법상 밝힐 수가 없었노라. 몇 시간 전에 왕이자 황제로서 내 마지막 임무를 마쳤고 이젠 내 아우 요크공이 왕위를 계승했음으로 내가 할 첫 마디는 그에 대한 내 충성을 선언하는 것으로. 이를 나는 충심으로 하노라.
백성 모두가 내가 퇴위하게 된 이유를 잘 알고 있겠지만 내가 결심 하는 데 있어 지난 25년 동안 웨일즈 왕자 그리고 최근에는 왕으 로서 섬기려고 노력해온 이 나라와 제국을 잠시도 잊지 않았음을 알아주기 바라노라.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뒷받침 없이는 왕으로서의 막중한 책무를 수행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내 말을 백성들이 믿어주기를 바라노라. 또한 이 결정은 나 혼자 한 것임을 알아주기를 바라노라. 전적으로 나 스스로 판단해서 내린 결정이 었음을. 내 곁에서 가장 걱정해준 사람은 마지막까지 내 결심을 바꿔보려고 애썼다는 사실도. 무엇이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최선이 겠는가. 이 단 한 가지 생각으로 내 인생의 가장 중대한 이 결심을 나는 하였노라.
이렇게 결심하기가 좀 더 쉬웠던 것은 오랫동안 이 나라의 공적인 업무수행 교육을 잘 받아왔고 훌륭한 자질을 겸비한 내 아우가 즉시 내 뒤를 이어 제국의 발전과 복지에 아무런 차질이나 손실 없이 국사를 잘 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는 많은 백성들도 누리지만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축복, 처자식과 행복한 가정을 내 아우는 가졌다는 사실이었노라.
이 어려운 시기에 나의 어머님 국모님과 가족들로부터 난 위안을 받았고, 내각 특히 볼드윈 수상이 항상 나를 극진히 대해 주었으 며, 각료들과 나 그리고 나와 국회, 우리 사이에 헌법상 어떤 이견 도 없었노라. 내 선친에게서 헌법에 기준한 전통을 이어받은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었노라. 내가 웨일즈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그리고 왕위에 오른 뒤 대영 제국 어디에 거주했든 간에 가는 곳곳마다 각계각층 사람들로부터 받은 극진한 사랑과 친절에 깊이 감사하노라.
이제 내가 모든 공직에서 떠나 내 짐을 벗었으니 외국에 나가 살다 가 고국에 돌아오려면 세월이 좀 지나겠지만 언제나 대영 제국의 번영을 기원하면서 언제라도 황제 폐하께 공인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섬길 일이 있다면 주저치 않을 것임을 천명하노라.
자, 이제, 우리 모두 새 왕을 맞았으니 그와 그의 백성 모두에게 행복과 번영이 있기를 충심으로 기원하노라. 백성 모두에게 신 (神)의 축복이 있기를! 왕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At long last I am able to say a few words of my own. I have never wanted to withhold anything, but until now it has not been constitutionally possible for me to speak. A few hours ago I discharged my last duty as King and Emperor, and now that I have been succeeded by my brother, the Duke of York, my first words must be to declare my allegiance to him. This I do with all my heart.
You all know the reasons which have impelled me to renounce the throne. But I want you to understand that in making up my mind I did not forget the country or the empire, which, as Prince of Wales and lately as King, I have for twenty-five years tried to serve.
But you must believe me when I tell you that I have found it impossible to carry the heavy burden of responsibility and to discharge my duties as King as I would wish to do without the help and support of the woman I love. And I want you to know that the decision I have made has been mine and mine alone. This was a thing I had to judge entirely for myself. The other person most nearly concerned has tried up to the last to persuade me to take a different course. I have made this, the most serious decision of my life, only upon the single thought of what would, in the end, be best for all.
This decision has been made less difficult to me by the sure knowledge that my brother, with his long training in the public affairs of this country and with his fine qualities, will be able to take my place forthwith without interruption or injury to the life and progress of the empire. And he has one matchless blessing, enjoyed by so many of you, and not bestowed on me, a happy home with his wife and children.
During these hard days I have been comforted by her majesty my mother and by my family. The ministers of the crown, and in particular, Mr. Baldwin. the Prime Minister, have always treated me with full consideration. There has never been any constitutional difference between me and them, and between me and Parliament. Bred in the constitutional tradition by my father, I should never have allowed any such issue to arise.
Ever since I was Prince of Wales, and later on when I occupied the throne, I have been treated with the greatest kindness by all the classes of the people wherever I have lived or journeyed throughout the empire. For that I am very grateful.
I now quit altogether public affairs and I lay down my burden. It may be some time before I return to my native land, but I shall always follow the fortunes of the British race and empire with profound interest, and if at any time in the future I can be found of service to his majesty in a private station, I shall not fail.
And now, we all have a new King. I wish him and you, his people, happiness and prosperity with all my heart. God bless you all! God save the King!”
-에드워드 8세(Edward VIII) 11 December, 1936
그럼 (만으로) 나이 94세인데도 자식이나 손주에게 물려주지 않고 백발에 왕관을 쓰고 있는 현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달리 윈저공의 경우는 왕관의 노예가 아닌 사랑의 노예였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권력이나 명예나 재산의 노예가 되기보다 사랑 의 노예가 되는 게 비교도 할 수 없이 그 얼마나 더 행복한 일일 까 .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왕위까지 버릴 수 있었을까. 그런데 사랑보다 더 무서운 건 생각하기에 따른 사상과 믿기에 따른 신앙 이란 허깨비들이 아닐까.
지난 2016년 5월 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칼에 찔려 살해된 채 발견됐었는데 범인은 정신 병력을 가진 30대 남성으로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다”고 밝혔단 다. 따라서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사회 운동이 일어났었는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혐오의 근본 원인을 좀 찾아보자.
영어로 여성혐오는 misogyny라 하는데 여성을 싫어하고 미워 한다는 뜻 말고도 성차별을 비롯해서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의 성적 도구화까지 다양하다.
서양에서는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는 둥, 아담에게 금단의 선악과를 따먹게 해서 낙원에서 쫓겨나도록 한 것도 여성 인 이브라는 둥, 구약성서 창세기 설화가 있는가 하면, 봉인된 판도라의 항아리를 열어 세상에 죽음과 질병, 질투와 증오 같은 재앙을 불러온 것도 최초의 여자 ‘판도라’라는 그리스 신화가 있지 않은가.
동양에서도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뿌리 깊어 우리 한국에서 는 ‘여성은 알게 할 것이 없고 다만 좇게 할 것’이라는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그 근본이었다. 그래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는 속담까지 있어 오지 않았나.
중국에는 전족(纏足)이라고 계집아이의 발을 어려서부터 피륙으 로 감아 작게 하던 풍속이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공식 석상에서 아내는 남편과 나란히 걷지 못하고 세 걸음 뒤에서 따라가야 하는 등 온갖 폐습이 있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중동에선 여성들만 히잡을 착용, 마치 닌자처럼 복면을 하고 다녀야 하고, 아프리카에선 여성에게만 하는 검열 삭제라고 여성 생식기를 못 쓰게 만드는 미개한 짓거리가 아직도 자행되고 있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노래 “My my my Delilah Why why why Delilah”라는 팝송의 후렴구 ‘Delilah’는 웨일즈 출신 가수 톰 죤스(Tom Jones, 1940- )의 노래로 웨일즈인들에게는 국가에 해당하고, 2012년 엘리자베스 2세 즉위 60주년 행사에선 ‘ 떼창’ 을 했었는데 그 노랫말은 한마디로 하자면 ‘데이트 살해’ 다. 사랑한 여인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걸 알고 칼을 휘두르는 내용이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마녀사냥의 사냥 개나 숙명이든 운명이든 모든 신화와 전설과 인습의 노예가 되느 니 차라리 모든 걸 초월할 수 있는 사랑의 노예가 되어보리. 남녀 불문하고 우리 어서 남신(男神)은 그 씨를 말려버리든가 흔적도 없이 화장해 버리고 여신(女神) 시대로 천지개벽하자는 뜻에서 정현경의 ‘여신의 십계명’을 받아 우리 모두 지켜보리라.
여신은 자신을 믿고 사랑한다.
여신은 가장 가슴 뛰게 하는 일을 한다.
여신은 기, 끼, 깡이 넘친다.
여신은 한과 살을 푼다.
여신은 금기를 깬다.
여신은 신나게 논다.
여신은 제멋대로 산다.
여신은 과감하게 살려내고, 정의롭게 살림한다.
여신은 기도하고 명상한다.
여신은 지구, 그리고 우주와 연애한다.
정녕코, 코스미안은 사랑의 화신(化神/化身)이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