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3일자 미주 뉴욕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삶의 뜨락 에서] 칼럼 Bursting(터질 듯한)' 필자 정명숙 시인은 “많은 사람이 가을은 쓸쓸하고 외롭고 허무하다고 투정한다. 하지만 나는 가을을 성취와 완성을 재검토하는 대단원의 무대 라고 믿는다.”며 “온세상 이 잿빛으로 보일 때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이렇게 ‘가을앓이’를 승화시키고 있다.
[삶의 뜨락에서] 'Bursting (터질 듯한)'
가을이 느지막하게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다. 가을 앓이를 심하게 하는 나는 매년 10월 마지막 주는 휴가를 얻어 가을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올해 10월 마지막 주는 거의 지친 초록이 아직도 텃세를 부리고 있다. 11월에 들어서야 서둘러 가을이 축제의 서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소녀 시절 오스트리아의 푸른 초원과 독일의 고색창연한 성을 둘러싸고 있는 농익은 단풍 숲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2011년 10월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대장정의 길에 올랐다. 프라하의 찰스 다리 위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졌음에 감격해 한참을 울먹였다. 그다음에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철학자의 길’에서 독일 관념 철학의 아버지인 칸트가 하루에 8번씩 이곳을 산책했으며 괴테를 비롯한 헤겔, 야스퍼스, 휠덜린이 산책했던 그 산책로를 걸으며 그들의 숨결에 압도당해 온몸의 세포가 전율하며 덥석 주저앉았던 추억이 있다. 그때가 10월 마지막 주였는데 그 숲속에서 바라본 햇빛은 오색찬란한 잎사귀들을 뚫고 내 가슴을 관통했다. 스쳐 가는 바람은 찬란한 햇빛과 달콤하게 속삭이며 수천수만 가지의 절묘한 색깔을 뽐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가 색채의 향연에 퐁당 빠지게 된 것은! 숲 밖이 아닌 숲속에서 올려다본 햇살!!! 잎사귀마다 고유한 색이 있고 햇빛의 강도와 바람의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며 찰랑대는 색채! 그리고 그들이 서로 어울려 이루어내는 색채의 조화! 나는 그림으로 그 색채를 토해내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 꿈을 위해 헐떡이고 있다. 그 어떤 누구라도 이 산책로를 걷다 보면 시인이 될 수밖에 없는 장관이었다.
많은 사람이 가을은 쓸쓸하고 외롭고 허무하다고 투정한다. 하지만 나는 가을을 성취와 완성을 재검토하는 대단원의 무대라고 믿는다. 봄에 씨를 뿌려 싹이 나고 여름에 성장하고 가을이면 무르익어 열매를 맺는 계절의 아름다운 순환이 아닌가. 나는 슬프지 않다! 겨울이 되면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몸을 작고 단단하게 만들어 심층 가장 깊은 곳에 저장한다. 다시 태어날 봄날을 기다리면서 이 가슴 벅찬 가을을 두 팔로 안는다.
지금 내 주위는 이제 겨우 지친 초록이 자리를 내주고 있다. 가슴에 불을 지피고 절정에 오르기까지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다. 지난 모든 시간은 오늘의 향연을 위한 준비단계였다. 아직 못다 한 꿈이 있다면 저 단풍이 절정을 향해 치닫듯 나 또한 내 꿈을 불태우리라. 당당하고 멋진 나만의 색채를 만들어보리라. 난 어렸을 적에 부풀어 터진 석류가 달린 석류나무를 본 적이 있다. 수정처럼 투명한 붉은 구슬들이 부풀고 부풀어 바깥세상 보고 싶어 더는 참지 못해 터진 가슴 같다고 생각했었다.
프랑스 작가 미셀 투르니에는 ‘예찬’에서 “예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이다. 우정은 예찬하는 가운데 생긴다. 현실 세계는 본래 무채색이다. 그 현실에 색깔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고 예찬이다”라고 했다. 삶이 지루하고 고달플 때 그리고 온 세상이 잿빛으로 보일 때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인생의 부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많이 느끼고 감동하며 사느냐에 달려있다. 감동을 하여야 감동을 줄 수 있다. 내 가슴 속에 타고 있는 불빛이 있어야 그 불빛을 전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감동을 하였는가. 가슴 멍한 경험을 했는가. 영감 받은 일이 있는가? 스스로 물어본다.
<정명숙 시인>
지난 2021년 8월 30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재음미再吟味해보리라.
[이태상 칼럼] 우리 모든 코스미안의 영원한 로망
2021년 8월 28일자 뉴욕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삶의 뜨락에서] 칼럼 ‘빛’의 필자 이용해 수필가는 우리 모두의 공통분모를 이렇게 적고 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운동하고 샤워하고 커피잔을 들고 패티오에 나가 앉으면 건너편 지붕 너머로 태양이 떠오릅니다. 태양은 확실히 불타는 불덩어리일 것입니다. 태양의 온도는 7000도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태양에서는 무엇이 타고 있을까요? 무엇이 타고 있길래 45억 년이라는 긴 세월을 타고도 아직 이글이글 타고 있을까요. 탄다는 것은 타서 없어진단 말입니다. 7000도가 넘는다는 그 뜨거운 불길을 45억 년이나 내보내고도 아직 타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연료가 끊어지면 불은 꺼지고 마는 것 아닐까요. 그것이 우리가 물리·화학에서 배운 지식이 아닙니까.
떠오르는 태양을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아마도 우리가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이 천체나 우주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시인은 불타는 사랑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 촛불이 되어 타서 없어지리라고 노래를 합니다. 그렇다면 불타는 사랑을 할 때 무엇을 태울까요. 물론 자신이겠지요. 자신의 마음을 태우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사랑하고 자기는 타서 없어지고 재만 남을 것이 아닐까요,
소설이나 오페라를 보면 사랑 때문에 앓기도 하고 가족과 모든 것을 버리기도 하고 심지어 생명까지 버리는 것을 보면서 ‘저것이 사랑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사랑은 소설이나 오페라 나 영화에나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런 사랑을 해본 일도 없고 그런 사랑을 감히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가난하게 대학 생활을 하고 인턴과 전공의를 하면서 어른들의 소개로 만났고 나의 직업과 형편으로는 적합하겠다고 하는 생각으로 결혼했습니다. 물론 서로 좋아하기는 했지만, 저 여자 아니면 죽겠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고 아내도 TV의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저렇게 가족들이 반대하는데 고생을 하면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내 생각에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사랑보다도 귀한 것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자 아니면 죽겠다는 생각이 없이도 결혼하고 가정을 만드니 가정이 중하게 여겨지고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아내가 귀하게 여겨지고 또 자식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아니었으면 더 좋은 남자와 결혼을 했을는지도 모르는 여자. 그리고 결혼을 한 후 자기의 모든 것을 우리의 가정을 위해 헌신한 그 사람에게 고마워하는 마음과 그 사람에게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책임감이 열심히 일하게 만들고 착실한 가정의 주인공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위의 친구들을 돌아보면서 젊었을 때 죽고 못 산다고 연애를 하던 친구나 중매결혼을 한 친구나 그저 나이가 드니 결혼을 해야겠다고 무덤덤하게 결혼한 친구나 자식들을 키우고 늙어서는 부인의 치마폭 밑에서 부화만사성(婦和萬事成)을 부르고 부은(婦恩)이 망극하여이다 라고 하며 사는 모습은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나이가 들면 이상이네 꿈이네 하는 핑크빛 무지개가 때가 묻어 빛이 사라지고 뜨거운 열정도 식어가는 모양입니다. 갑자기 부엌에서 “여보”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왜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을 안 해요” 하는 어부인의 부르는 소리에 태양을 쳐다보며 빛이 어떠니 사랑이 어떠니 하던 생각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네, 왜 그래요” 하면서 부엌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젊은 날 나는 친구의 결혼식에서 주제넘게 주례사가 무색할 사회를 봐 주례 선생님을 화나시게 한 적이 있다. 참다운 결혼이란 영혼과 영혼의 결합일 것임으로 결혼식은 두 사람이 이 세상 떠날 때 하기로 하고 우선 두 사람의 ‘결육식結肉式’부터 거행한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춘기 소년 시절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 Andre Gide(1869-1951)의 ‘좁은 문 Strait is the Gate,1909)’, 미국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Henry Wadsworth Longfellow(1807-1882)의 ‘에반젤린 Evangeline, 1847)’, 영국의 계관시인 알프리드 테니슨 경 Alfred Tennyson, 1st Baron Tennyson FRS (1809-1892)의 ‘에녹 아덴 Enoch Arden, 1864)’, 그리고 일본인 구라다 하쿠조倉田百三(1891-1943)가 사랑에 대해 쓴 짧은 글을 모아서 펴낸 책 ‘사랑과 인식의 출발’ 등을 탐독했고, 일본에서 있었던 실화實話로 사형수와 처녀의 순애일기純愛日記 ‘사랑과 죽음이 남긴 것’을 너무도 감명 깊게 읽고 그런 ‘결혼관結魂觀’을 갖게 되었으리라.
일본의 어떤 살인범이 사형언도를 받고 사형수로 형 집행을 기다리면서 옥중에서 쓴 수기手記가 신문에 연재되면서 어떤 한 여성 독자가 이 사형수를 위로하는 편지도 보내고 그를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결혼까지 하여 법적인 부부가 되나 단 하루도 부부생활은 못 해본 채 부인의 애절한 구명운동도 보람없이 남편은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만다.
나도 이같이 절대적인 사랑을 해보고 싶었고, 몇 번의 시행착오도 있었으나 그래도 평생토록 이런 꿈만 꾸어오다가 다 늦게나마 나 대신 내 아이가 그런 사랑을 하게 되는 걸 보게 된 것 같다. 43세가 되도록 제 눈에 드는 남자를 만나지 못해 혼자 살아오던 내 둘째 딸은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영국 특수부대 비행기 조종사로 의병 제대한 피부암 말기 환자로 암환자 기금 모금을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올린 블로그를 보고 교신 끝에 2013년 2월 16일엔 그의 임박한 장례식 대신 그의 삶을 축하하고 기리는 파티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성城에서 열었고, 3월 16일엔 에든버러 아카데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식에서 나는 아래와 같은 시 한 편을 낭송했다. 이 시는 2013년 미국에서 출간된 우생愚生의 졸저拙著 ‘코스모스 칸타타: 한 구도자의 우주여행Cosmos Cantata: A Seeker’s Cosmic Journey’의 출판사 대표이자 시인 도리스 웬젤이 써준 축시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남녀 한 쌍에게
내가 만난 적은 없어도 이 두 젊은 남녀는
이들을 아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이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네.
내가 만난 적은 없어도 이 젊은 연인들은
서로에 대한 헌신으로 똘똘 뭉쳐 오롯이
호젓하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삶의 축배를 높이 드네.
내가 만난 적은 없어도 이 두 사랑스런 영혼들은
저네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전 세계에 여운으로
남는 감미로운 멜로디를 창조하네.
To The Couple I Do Not Know
I have never met those two young people,
Impressing those who know them,
Inspiring those who don’t.
I have never met those two young lovers,
Wrapped in devotion to one another,
Celebrating life alone and with others.
I have never met those two sweet souls,
Securing a world of their own
While creating a lingering melody for the world.
- Doris Wenzel
결혼식을 올린 지 5개월 후 8월 24일 46세로 남편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딸에게 보냈다.
사랑하는 딸 수아에게
사랑하는 남편 고든이 평화롭게 숨 거두기 전에 네가 하고 싶은 모든 말들을 다 하고 그가 네 말을 다 들었다니 그 ‘영원한 순간’이 더할 수 없도록 복되구나. 난 네 삶이 무척 부럽기까지 하다. 너의 사랑 너의 짝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그 삶과 사랑을 그토록 치열하게 시적詩的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이 장수하여 백 년 이상을 산다 한들 한 번 쉬는 숨, 바닷가에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에 불과해 우주라는 큰 바다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니. 그러니 우리는 우리 내면의 코스모스 바다를 떠날 수 없단다.
사랑하는 아빠가
After I learned of his (Gordon’s) passing at the age of 46, I emailed the following short message to my daughter:
Dearest Su-a,
It is good to know that Gordon listened and understood what you had to say for an “eternal” hour before he stopped breathing and he was gone so “peacefully.”
Su-a, you are such an amazing girl. I’m even envious of you, not only for having found “the love of your life” but more for living it to the best, to the fullest, so intensely, so poetically, very short thought it was only for 13 months.
Even if one lives to be over a hundred, still it will be nothing but a breath, a droplet of waves breaking on the shore, returning to the sea of cosmos. Thus we never leave “the sea inside.”
Love, DadXX
다음은 딸 아이의 조사弔辭 일부다.
그를 만난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도록 크나큰 행운이었는지, 우리가 같이한 13개월이란 여정에서 아무런 후회도 없고, 나는 내 삶에서 완벽을 기하거나 완전을 도모하지 않았으나 어떻게 우리 자신 속에서 이 완전함을 찾았으며, 우리는 불완전한 대로 완전한 사랑이란 절대균형을 잡았습니다.
This is a small portion of my daughter’s recent eulogy to her husband:
I spoke of how ridiculously lucky I felt to have met him.
How I had no regrets about anything on our journey.
I told him that I had never sought for perfection in anything in my life.
But that somehow, I had found it.
I had found it in “us.”
We were perfect.
Perfect in our imperfections too.
Our imperfectly perfect balance.
사랑이 다가오는 순간은 미세한 떨림에서 시작된다. 첫 떨림의 순간이 파장을 일으켜 첫 만남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사랑하니까. 그리고 또 사랑하니까. 영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용혜원의 시 ‘사랑하니까’ 중에도 사랑이라는 정의가 나온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1883-1931)이 그의 ‘예언자의 뜰The Garden of the Prophet, 1933’에서 말하듯
“영겁을 두고 떨어져 있는
연인들 사이를 맺어주는
영원한 순간이 있나하면
그리워하는 생각 다함이
이별이란 망각 아닌가요.”
"There are moments that hold aeons of separation. Yet parting is naught but an exhaustion of the mind.”
그렇다면 지금의 내 입장은 어떤 것일까.
사랑은 스스로 길을 찾는다고 했던가.
“사랑이 나를 끌고 갈 때, 내 침묵에 파문이 일어나고 말에도 결이 생겼습니다. 그 파문이, 그 무늬가, 물결처럼 바람처럼, 숨결처럼 누군가의 마음속에 스몄으면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들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내 몫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독자여, 읽는 내내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읽으시라.”
그동안 실존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한계와 고독을 성찰해온 천양희 시인이 환갑을 맞아 내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며 시로 쓴 영혼의 자서전이라고 고백한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를 2003년 펴내며 주문한 말이다.
정녕,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순수성과 영원성 그리고 운명성을 맛보는 것이 아닐까. 한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그 제목은 ‘영원한 사랑 Love Eternal’이다. 중국의 한 가극 오페라를 멜로드라마로 각색해 만들어져 중국 특히 대만에서 굉장한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이 영화를 처음 본 이후로 오늘날까지 매번 볼 때마다 눈물을 쏟는다”며 자기가 만드는 영화들은 하나같이 이 ‘영원한 사랑’이 주는 영원한 감동의 진수를 되살려 보려는 것뿐이라고 ‘와호장룡 臥虎藏龍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 2000)’의 감독 리안이 언젠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이 ‘영원한 사랑’에 대해 간단히 얘기해 보자.
어느 조그만 마을 부유한 집에 태어난 리디는 영리하고 호기심이 많아 공부를 하고 싶어도 남자애들처럼 학교에 갈 수 없다. 그 당시에는 사내애들만 학교를 갔으니까. 궁리 끝에 남자아이로 변장을 하고 학교에 가겠다고 부모님을 졸라 설득한다. 남자아이들만 있는 기숙학교로 가는 길에 개울가 석탑에서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는 링포를 만나 금새 친해진다. 그러면서 리디 는 링포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둘은 맺어지지 못하고 리디가 다른 사람과 정혼하게 되어 그 사실을 알게 된 링포는 그 소식에 절망해 열병을 앓다 죽는다.
이 비보悲報를 들은 리디는 시집가는 날 링포의 무덤 앞을 지나다가 신부복을 벗어버리고 속에 입고 있던 상복차림으로 죽은 애인을 그리워하며 애절한 사랑 노래를 부른다. 그러자 링포의 무덤이 갈라지고 리디가 그 무덤 속으로 뛰어들면서 합장되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지난 2007년 세상을 떠난 김윤희 작가가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감동적인 장편체험소설 ‘잃어버린 너 ’ (1987년 출간)라기보다 우리 모두가 ‘되찾을 나’가 아닐까.
자, 이제 지난 2020년 4월 24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항간세설 아래와 같이 옮겨 보리라.
[이태상의 항간세설] ‘반한다’는 것
‘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인가요?”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던 1936년말에 가수 고복수(高福壽 1911-1972)가 부른 ‘짝사랑’ 이란 노래 가사다. 여기서 말하는 ‘으악새’는 ‘억새’로 알려져 있다. 가을바람에 한들한들 살랑거리는 억새의 사각거림을 슬피 운다고 표현했으리라.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잃어버린 봄’이 되어서인지 지금부터 벌써 가을바람이 부는 것만 같다.
2015년 10월 2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고은의 편지10> ‘하원(下園)에게’를 “맹목적이네. 눈앞의 10월은 맹목적인 너무나 맹목적인 나의 하루하루를 열어주네.” 이렇게 시작하면서 그는 단언(斷言)하듯 술회(述懷)한다. “가을은 소설이 아니 네. 가을은 해석이 아니네. 가을은 시이네.”
모든 어린이들처럼 나도 아주 어릴 적부터 모든 사람, 특히 여자와 아가씨를 무척 좋아하다 보니, 그야말로 ‘다정도 병이런가’ 짝사랑 이 되고 마는 것 같다. 이게 어디 사람뿐이랴! 하늘도 땅도,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말이어라. 고은(高銀, 본명: 高銀泰 1933 - ) 시인의 글을 나는 이렇게 바꿔보리라.
‘삶은 소설이 아니네. 삶은 해석이 아니네. 삶은 시이네.’
아니, 그보다는 ‘삶이 산문(散文)이라면 숨 쉬는 숨은 시(詩)’라고 하리라. 대학 시절 강의실보다는 음악감상실이나 다방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내 짝사랑을 소설화 해보겠다고 긁적인 초고(草稿) ‘내가 걸어온 자학(自虐)의 행로(行路)’ 앞부분을 이어령(李御寧, 1933 - ) 대학 선배에게 보여줬다. 그랬더니 그의 평(評)은 이러했다.
“이 ‘자학의 행로’에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불후의 세계 명작을 쓴 작가들의 심오한 사상이 모두 다 들어 있지만 전혀 요리가 안 된 상태이다. 그러니 독자가 먹기 좋게 살도 부치고 양념을 쳐라.”
하지만 나로서는 그럴 재주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고 싶지도 않아 일찌감치 작가가 될 생각을 접고, 차라리 인생이란 종이에 삶이라는 펜으로 사랑이란 피와 땀과 눈물을 잉크 삼아 소설이 아닌 시를 써보리라 작심했다. 그것도 단 두 편이면 족하리라 생각했다. 그 하나는 내 ‘자화상(自畵像)’이고 또 하나는 먼 훗날의 내 ‘자서전(自敍傳)’이라고 나 스스로 명명(命名)한 ‘바다’와 ‘코스모스’란 시(詩)다.
이 둘을 하나로 합치면 ‘코스모스바다’가 되리라. 이게 어디 나뿐이랴. 코스모스바다의 물방울들이 사랑의 숨으로 기화(氣化)하여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무지개 타고 황홀하게 주유천하(周遊天下) 하다 코스모스바다로 돌아갈 우리 모두의 참모습이며 여정(旅程)이 아니랴! 이 사실 아니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계절이 바로 가을 이리라.
1987년에 나온 김윤희(金潤姬 1947-2007)의 장편체험 소설 ‘잃어버린 너’가 있다. 그녀의 시공(時空)은 물론 생사(生死)까지 초월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실화소설은 수백여만 부 팔렸고 일본어로도 번역 출판되어 일본 독자들까지 사로잡은 체험 소설이다. 1991년에는 김혜수, 강석우 주연으로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고,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한 남자와 나누었던 운명적인 사랑과 비극적인 사별을 담은 이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의 심금(心琴)을 울렸다. 한국 출판마케팅 연구소가 1999년에 조사한 ‘20세기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19위에 올랐었다. 이러한 사랑을 솔새 김남식은 ‘사랑 愛’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그대가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은
그믐달 같은 거
다시
사랑한다 하여도
그대가 될 것이며
다시
이별한다 하여도
그대가 될 것을
불사조처럼
죽고 못 사는 이가
되리라
‘에필로그 하나’에서 솔새 김남식은 또 이렇게 적고 있다.
“며칠 전 낡은 서재에서 간신히 책을 찾아 20여 년 만에 다시 읽었으나 그때의 감동이 그대로 정말 밤잠 설치면서 읽었던 책으로 느낌이 다가왔다. 1987년도 그 당시 누구나 하룻밤에 독파해 버린 추억의 책으로 모든 사람들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눈물을 흘렸다. 김윤희와 엄충식 두 사람의 사랑, 아니 그들의 인생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필요한 순수한 사랑이었기에 많은 여성 팬을 울렸던 것 같다.”
그녀는 한동안 화장도 않은 채, 검은 옷을 수년간 입고 다녔으며 커피 둘, 프림 둘 그렇게 아침이면 모닝커피 두 잔을 만들었다고 했다. 한 잔은 그 사람 자리에 놓고 나머지 한 잔은 그 사람을 생각하며 한 남자를 만나서 사랑이 많이 힘들고 아팠지만 행복했던 날이었고 그렇게 그와 어설프게 함께 한 18년이란 세월이 외롭고 가난했지만 시간을 같이한 그에게 정말 미안하다며, 책 말미에 적었다. 그를 보내고 난 뒤 시름시름 앓고 있을 때 주위의 권유로 체험 소설을 쓰게 된 그녀는 그와 보낸 지난 일을 글로 적어 가면서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사랑이라는 절대적인 끈으로 인해서 두 사람은 늘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이 책이 나온지 33년이 되는 오늘날 재판(再版)이라도 다시 나오게 된다면 그 제목(題目)을 ‘잃어버린 너’가 아닌 ‘되찾을 나’라고 한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3년 여름 43세가 되도록 싱글로 지내오다 인터넷을 통해 피부암 말기 환자를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만난 지 18개월 만에, 결혼하고 5개월 후, 남편과 사별한, 1993년 부터 스코티시 챔버 오케스트라(Scottish Chamber Orchestra) 첼리스트로 근속해온 내 둘째 딸 수아는 6개월간의 안식년을 얻어 유럽, 미국, 인도, 남미, 아프리카 등, 특히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행하며 “결코 혼자가 아니라 늘 남편 고든과 함께하는 순간순간을 실감한다”는 말을 나는 듣게 되었다.
김윤희와 수아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더할 수 없이 축복받은 사람 임에 틀림없다. 이들을 몹시 부러워하면서 축복할 뿐이다. 이처럼 절대적인 사랑의 영원한 순간을 맛볼 수 있다는 이 한없이 신비 (神秘)롭고 경이(驚異)로운 기적(奇蹟) 같은 사실과 진실을 어찌 축복하지 않을 수 있으랴. 최근 처제 안영순 씨로부터 카톡으로 전달받은 ‘행복 날개’를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옮겨보리라.
장자(莊子)편에 풍연심(風憐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바람은 마음을 부러워한다는 뜻을 지닌 내용입니다.
옛날 전설의 동물 중에 발이 하나밖에 없는 기(夔)라는 동물이 있었습니다. 이 기(夔)라는 동물은 발이 하나밖에 없기에 발이 100여 개나 되는 지네를 몹시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 지네 에게도 가장 부러워하는 동물이 있었는데, 바로 발이 없는 뱀(蛇)이었습니다. 발이 없어도 잘 가는 뱀이 부러웠던 것입니다. 이런 뱀도 움직이지 않고도 멀리 갈 수 있는 바람(風)을 부러워 하였습니다. 그냥 가고 싶은 대로 어디든지 씽씽 불어 가는 바람이기에 말입니다. 바람에게도 부러워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어디든 가는 눈(目)을 부러워했습니다. 눈에게도 부러워하 는 것이 있었는데, 보지 않고도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마음(心)을 부러워했습니다. 그 마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습니까?:”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전설 속 동물인 외발 달린 기(夔)입 니다.”
마음은 의외(意外)의 답(答)을 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어쩌면 서로를 부러워하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것에 상대적으로 가진 상대를 부러워하지만 결국 자신이 가진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것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세상이 힘든 것은 부러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지위와 부, 권력을 부러워하면서 늘 자신을 자책하기에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부러워하고, 부자는 권력을 부러워하고, 권력자는 가난하지만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결국 자기 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현미(玄米)와 백미(白米) 또는 찹쌀과 멥쌀을 반반씩 섞은 걸 걸 ‘반반미(半半米)’라고 한다. 영어로 ‘그는 아직 너한테 홀딱 빠지지 않았어 (He’s just not that into you)’라는 표현이 있다. 네게 전적(全的)으로 끌려 온통 반해버리지 않았다는 뜻으로. 남녀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얼마나 빨리 또는 천천히 친해질 수 있는가는 매우 흥미로운 사안이다. 흔히 영국 사람들은 유보적(reserved)이라고 한다. 내가 영국에 가서 받은 첫인상이 예의 바르고 정중하면서도 함부로 근접(近接)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요즘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모든 사람들과 ‘거리두기’를 강요받고 있지만 이를 영국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을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 (Keep people at your arm’s length)’고 한다.
처음엔 대영제국의 후예(後裔)들로서의 우월감의 발로인가 했는데 10여 년 영국에 살아보니 그게 아니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配慮心)이고, 시간이 좀 걸려도 서로 잘 알게 되면 깊은 정(情)을 나누게 되더란 것이다. 우리말에도 소인(小人)의 사귐은 달기가 꿀과 같고, 대인(大人)의 사귐은 담담(淡淡/潭潭)하기가 물과 같다 하지 않았나. 우리 동족 한인 사이에서도 너무 쉽게 사귄 사람과는 지속적인 관계가 잘 맺어지지 않고, 남녀 간에서도 너무 빨리 달아오른 열정은 그만큼 빨리 식어버리지 않던가. 쉽게 얻은 재산(財産) 쉽게 탕진(蕩盡)하듯이 말이다.
‘티끌 모아 태산 (Many a little makes a mickle)’이나 ‘물방울이 모여 대양 (Every drop of water makes the ocean)’이란 속담이 있듯이 애정도 우정도 인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이처럼 태산(泰山)과 대양(大洋)의 축소판이 티끌이요 물방울이라면 인류의 축소판이 개인일 테고, 하찮은 아무나 아무것도 그 확대편이 대 우주 코스모스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무엇이든 누구이든 제각기 다 온전(穩全)한 소우주(小宇宙)인데 이를 어찌 반(半)쪽으로 쪼갤 수 있으랴. 그러니 어느 누구나 무엇에 반(半)한다는 건 자기 자신에 반(叛)하는 짓이요, 스스로를 저버리는 일이 되지 않으랴.
영어에 ‘내 짝’이란 뜻으로 ‘my better half’란 말이 있다. 이를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난 너의 멥쌀, 넌 나의 찹쌀’이 되겠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반(半)할 수도 변(變)할 수도 없으려니와 반(半)해서도 변(變)해서도 아니 되리라. 다만 온전(穩全)한 나로 서의 나와 온전한 너로서의 네가 반쪽이 아닌 통째로 합해 너무 차지지도 않지만 쫀득쫀득하게 맛있는 밥을 지으면 되리라.
또 영어에 그 어떤 무슨 일에 전심전력(全心全力/專心專力)하지 않고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걸 ‘반심(半心)’으로 한다는 뜻으로 ‘half-hearted’라고 한다. 사업이든 사랑이든 삶이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니 하느니만 못하지 않을까. 뭣이든 이왕 할 바에는 온 심혼(心魂)을 다 쏟아부어야 성과(成果)나 보람도 있고, 그 결과(結果)가 어떻든 하는 재미와 쾌감(快感)도 느낄 수 있으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