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프로젝트] ‘마음먹다’라는 말

신경희

사진=코스미안뉴스


길을 가는 데 앞에 강이 있다. 강물을 가로질러 갈까, 아니면 다리 있는 곳으로 돌아갈까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 황새 한 마리가 푸드득 풀숲에서 날아간다. 그리고는 강물 한가운데에 앉는다. 강물은 황새 발의 중간쯤이 잠기는 정도이다. 물이 깊지 않다. 나는 강을 걸어서 건너기로 마음먹는다.


마음을 먹는다라는 표현은, 내가 아는 한, 세계 언어 가운데 우리 한글에서만 유일하게 있는 독특한 표현이다. 영어에서는 마음을 만든다고 말하고 중국어에는 마음을 결정한다고 말하며, 일본어에는 마음을 세우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다. 그리고 가장 신비하게 표현한다. 왜 우리는 마음을 먹는다고 말을 할까?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김소월 시인의 가는 길의 일부이다. 예부터 우리 정서는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내뱉지 않는다. 입 밖으로 내는 표현에 머뭇거림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촉촉이 베어져 있었다. 이런 우리 정서상 어찌하기 힘든 마음을 일단 먹어 버리면,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 다시 말해서 확고한 태도를 표명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음이란 수시로 변하는 요물이라서 변하기 전에 큰맘 먹고, 먹어 삼켜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신경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 마음이 머무는 뇌는 편향적이고, 망상이나 유혹에 약하고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이면서 동시에 자비심이 넘치고 동정에 약하며 공감을 잘하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뇌 신경이 가소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부터 우리 마음은 가소적이었다


마음을 먹는다는 말에는 밖으로 드러나 있는 의식을 안으로 밀어 넣는다는 어감을 풍긴다. 듣기에 따라서는 의식을 무의식화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무의식 가운데 떠 있는 여러 종류의 배들 가운데 한 척을 골라서 그 배로 하여금 나의 행동을 실천하도록 한다는 고차원적 표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장이 감정의 중추라고 하였다. 심장이 곧 마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뇌는 심장의 과격한 노동으로 열이 나고 끓어 오르는 현상을 식혀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이 밝힌 바에 따르면, 마음은 심장이 아니라 뇌의 여러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분석을 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과연 뇌의 어떤 영역에 머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나는 듣지 못했다. 마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마음이 설렌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어느 영역의 활동인지 잘 모르겠다.

 

마음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뇌에 있을까, 아니면 가슴 속에 있을까? 그리고 마음은 어떻게 생겼을까. 마음이 도대체 몇 개나 되기에 한번 마음을 먹고 또 다시 먹을 수 있는가? 적군이 몰려오는데 숨어 있는 사람들 틈에서 아기가 운다. 우는 소리를 들으면 적군에게 모두 발각될 것이다. 발각되면 모두 죽는다. 아기를 질식시켜서 다른 모두가 살 것인가? 이런 딜레마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하는가. 마음을 먹을 때 보통 우리는 도덕, 정의, 이익 등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아이를 죽이면서 여러 사람을 살려야 할 가치란 아이의 부모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마음 먹는다는 말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선택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가 당황하는 이유는 닥치는 선택의 상황이 모호하고 복잡 미묘한 불확실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 결과가 어떨지 몹시 불안한 것이다. 선택에는 위험 부담이 따른다. 적군 앞에서 우는 아이의 부모처럼 마음먹기는 고통이다.

 

때로는 마음먹기를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경우도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는 테레사라는 여인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그녀가 시골로 훌쩍 떠나가 버리자 자기 감정이 사랑인지 일시적 유희인지 가늠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러던 사이, 테레사가 다시 나타난다.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당한 것이다. 토마스에게 결혼이라는 마음을 억지로 먹게 만들었다. 삶은 깃털만큼 가볍고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한 것이 없다. 마음은 그야말로 무에 대한 스케치이다.

 

마음은 물질처럼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마음이란 개념은 매우 불분명하다. 버트런드 러셀이 내리는 마음의 정의에는 지각, 내성, 기억 그리고 지식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정신적인 것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이렇게 잡다하게 설명을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란 것이 분명하지 않음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우리 마음속에는 많은 인물이 살고 있다.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 교수는 우리 의식 아래 차원에서는 지배권을 두고 끊임없이 싸우는 작은 자아들의 시끌벅적한 민주주의가 구현된다고 말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은 그 싸움의 최종 결과일 뿐이다. 결국 마음을 먹게 되는 것은 여러 자아 간의 전투에서 승리한 인물의 전리품인 것이다. 우리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는 포로다. 마음을 먹어 치움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승리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바로 이성으로 사고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인간을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북쪽에 있는 집단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의 마음 이론은, 남의 마음은 곧잘 읽으면서 정작 자신의 마음은 파악하기 힘들어한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북쪽 사람들의 마음을 알기가 더 어렵다


우리와 한 핏줄로서 같이 살아야 할 것인데,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하고 믿을 수 없게 한다. 무시하자니 신경이 쓰이고 달래서 같이 살아가자고 하면 생떼를 쓴다. 어떻게 같이 가야 할지 마음먹기 매우 어려운 상대이다. 상식이나 합리성 그리고 이성 같은 사고의 고급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전두엽이 그들에게는 정상적으로 활동을 하는지 뇌를 열어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글=신경희


이정민 기자
작성 2021.12.08 11:25 수정 2021.12.08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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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