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 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는 가진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는 물부자이다. 온 세상이 물이니 물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써 대어도 쓴 자리도 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물고기 다음으로 물 쓰듯 하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돈이 주체할 수없이 많다는 사람이 가진 것은 돈밖에 없다고 말하며 돈을 물 쓰듯 쓰는 사람 이야기를 물고기와 비유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요즘 세상은 돈이 가장 강력한 대세라고 말하지만 본디 동서고금 언제 어디에서든 분쟁은 돈이 화근으로 되어왔다.
가장 떳떳하다고 정치적으로 대놓고 떠드는 돈의 기사 뒤에는 출처가 출처로 이어지고 끝내는 천하를 호령하던 대통령까지도 감옥으로 보내게 되는 일만 보아도 그 무엇이 돈의 힘만큼 크다고 할 수 있을까. 흘린 피와 땀으로 이룬 돈은 동서남북 어디에 놓고 보아도 절대로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지 않는다. 그러니 퍼즐같이 마구 써댄 의문의 돈이 늘 문제이다.
자신의 돈이 아닌 부정한 돈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런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세상에 더 없는 군자 같은 처신을 하면서 물 쓰듯 한 돈은 남의 돈이면서 자신의 돈에 대해서는 혀를 내두를 만큼 인색하다. 잘못된 행동으로 지어낸 돈에 대하여 물 쓰듯 써 대고 물밖에 모르는 애꿎은 물고기를 원망하니 그래서 물고기들은 그 억울함에 슬피 우느라 눈 감기를 거부하고 죽어갔는가 보다.
조사받으러 검찰 앞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의 얼굴이 돈다발처럼 보이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억만장자가 되도록 돈을 벌어도 부정함의 티끌 하나 없이 부를 이룬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 워렌 버핏에게는 아무런 나무랄 일이 없다. 그는 미국 땅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한국의 청빈한 학자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수레에 싣고 다니는 돈의 물량과 관계없이 평생을 가격이 최고로 저렴한 맥도널드 레스토랑에서 식사해 온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을 비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곳에서 즐기는 식사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돈이 없어 싼 음식을 찾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먹는 즐거움을 위한 식도락가이기 때문이다.
나는 동네 맥카페에 가면 혹시 그가 식사하지 않나 두리번거리고 싶어진다. 천문학적 돈을 지닌 네브래스카의 그가 무일푼인 캘리포니아의 나를 기다리고 있을 리가 만무다. 보통 사람들이 그와 함께 식사하기 위해서는 서민의 초라한 집 한 채 값이 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기다려진다.
어떻게 그가 매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도 많은 돈을 기부하는지, 또 어떻게 투자의 귀재가 된 것인지 궁금하고 100세를 향해 가는 나이까지 무엇이 그를 꿋꿋하게 지켜주는가 묻고 싶다. 비결은 아무래도 자연의 순리밖에 없다고 혼자 생각해 본다.
우리가 먹은 만큼 꼭 배설해야 하듯 그가 돈을 번 만큼 자연이라는 사회에 돌려보내는 신의
섭리 앞에 겸허하게 고개 숙이는 그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많은 돈을 소유한 그를 왜 세상 사람들은 시기하지 않는지 만나서 묻고 싶은데 내겐 그와 함께 식사하기 위하여 지불할 만한 액수의 돈이 없다.
그와 함께 점심을 먹으며 그 의문을 찾아내는 일은 물고기가 지닌 물 만큼의 부를 지닌 버핏에게 나 같은 마음의 부자와 비교가 될 수 있는지 묻고 싶어서다. 얼마 전 마흔둘 나이에 혈액암으로 세상을 마감했다는 어느 예술가의 죽음을 들으면서 내 존재를 위한 시간을 계산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죽어 간 그가 남긴 소중한 시간 속을 버핏도 나도 함께 가고 있다. 그 예술가의 두 배를 살아도 부끄럽지 않은 그의 삶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헌신적인 기부 정신으로 얻는 삶 같다. 혹시 버핏이 살아오는 동안에 써버린 시간의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세상은 아마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서라는 너그러움의 선물을 주었을 것이다.
젊음이 머무는 순간에만 가능한 일인 줄 알았는데 그는 지금 고령의 나이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는 누구나 신의 선물로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단서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젊음 못지 않는 노익장을 과시하는 버핏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나는 물고기나 버핏이 아닌 오늘 몫의 밥값만 치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과분함이 느껴진다.
버핏이 타고 다니는 오래된 차, 평생을 한자리에 사는 그의 작은집에 비하면 나는 사치스러운 사람이 아닐까 한다. 억만장자인 버핏이 지닌 부유함보다 그의 청렴함을 제일로 생각하는 내가 섭섭하게 들리지 않을까 한다. 버핏 이야기에 신이 난 나에게 듣고 있던 한 지인은 죽을 때 갖고 갈 것도 아닌데 왜 돈이 있는 사람이 싼 맥카페 음식으로 궁상을 떠냐고 버핏을 나무랐다.
자신은 라면도 건강에 썩 좋지 않아 자제하고 모든 음식 거리는 유기농으로 된 식단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그 옛날 어려웠을 때 먹던 꼽슬머리 꽃라면 생각으로 한번 먹고 만다는 속 터지는 소리로 나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러면서 학창 시절엔 그렇게 맛있던 라면이 알고 보니 건강에 좋지 않은 줄은 몰랐다며 속고 살았다는 식으로 한술 더 떴다.
그의 성장 과정을 이루는데 헌신해준 라면, 결국 오늘에 자신을 있게 한 것도 라면이 아니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때는 어려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해댈 때 100세를 사는 버핏이 더욱 생각났다. 소중한 성장 시절에 대하여 이왕이면 라면에게 감사하는 회고의 말을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라면이 오늘의 그를 부로 이룬 자체였다고 말했다면 그 지인은 버핏 다음으로 멋진 삶을 살았을 자신을 깨달았을 것이다.
싼 가격의 음식도 즐겁게 먹고 음식 가격만큼의 팁을 놓고 일어서는 버핏을 보면서 식사하는 일은 화려한 공간의 고가격의 음식이든 시골집 마루에 걸터앉아 밥에 물 말아 김치를 얹어 먹어도 모두 감성을 먹는 일인 것 같다. 버핏은 어제 남겨둔 감성을 즐기기 위해 오늘 그곳을 다시 찾는 것인지 모른다.
방금 내린 듯한 향의 커피 한 잔과 도넛 하나의 풍류조차도 즐길 줄 모르는 사람과 무슨 얘기를 나누랴, 그런 생각을 하면 물고기들의 눈물은 지인을 향한 눈물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물고기는 버핏처럼 일 년이면 수십 권의 책을 읽지 못한 까닭에 흘리는 눈물일지 모른다.
[문경구]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