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행(景行)은 ‘보행(步行; 호도아루). 열행(熱行; 호토오루)’ 같은 표기였던 것이 호자이자화(好字二字化) 등의 정책 영향으로 후대인에 의해 변형되어 나타난 표기로 추측된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대족(大足; 오타라시), 대대(大帶; 오타이), 의다랑(意多郞; 오타라), 경행(景行), 이들 모두가 [오타라]라고 불렸던 동일한 이름을 표기한 것이고 동일한 인물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중 일부는 왜곡 변형된 표기이지만 동일한 인물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경행천황의 재위연도는 71년~130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 엉터리이며 실제로는 다른 천황들과 거의 동시대인 500년대에 활동했던 실존인물이라고 『임나의 인명』이란 책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경행천황과 동일인이 분명해 보이는 백제 의다랑(意多郞)이 죽은 것은 무열천황 3년, 서기 501년이다. 무열기 3년 11월조에 그렇게 되어 있다. 무열천황기의 해당 기록이 옳다면 의다랑(意多郞) 즉 경행(景行)천황은 400년대 후반에 활동하다 501년에 죽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은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 혹시 잘못된 기록은 아닌지, 편찬자가 연도를 잘못 끼워 맞춰 거기다 실어놓은 것은 아닌지, 두 번 세 번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무열기의 기록은 1갑자를 잘못 짚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백제와 친한 나라 혹은 가문에 전승되어온 기사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죽었다는 표현을 薨(훙)이 아닌 卒(졸)로 했기 때문이다. 계체기 7년조를 보면 “百濟太子淳陀薨”이라 하여 백제태자의 경우도 薨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의다랑(意多郞)은 그냥 卒이라 하였다. 완전히 일반인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열기 3년 11월조 삽입기사의 전승계통이 전혀 다르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의다랑(意多郞)과 경행(景行)천황이 동일인물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일본서기』는 일본무존(日本武尊)을 경행천황의 아들이라고 기술해 놓았는데, 이는 순 엉터리이다. 소대존(小碓尊) 일본무존은 532년 신라에 항복한 구형왕이다. 부자관계도 아닐뿐더러 일본무존(=구형왕)이 경행천황보다 30년 정도 앞선 세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기록대로라면 경행천황이 중애천황의 할아버지가 되는 셈인데 전혀 그렇지 않다. 경행천황과 중애천황은 거의 동시대 인물로, 각기 다른 지역을 다스리던 왕들이었다.
따라서 『일본서기』 경행천황기를 바르게 읽으려면 일본무존이 웅습(熊襲)의 배반을 평정하고 하이(蝦夷)를 정벌하는 부분은 건너뛰고 읽어야 한다. 즉, 경행기 중에서 일본무존기(경행27년~경행43년)에 해당하는 부분은 제외해야 한다는 얘기다. 먼저 경행천황기의 내용을 압축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경행기 중에서 월삭간지를 밝혀놓은 기사 위주로 발췌한 것이다.
천황년 | 월 | 월삭간지 | 내용 개요 |
경행1 | 7 | 기사삭 | 제12대 경행천황 즉위 |
경행2 | 3 | 병인삭 | 황후로 책봉. 쌍둥이(대대존, 소대존) |
경행3 | 2 | 경인삭 | 기이국행차.(*무내숙니의 출생) |
경행4 | 2 | 갑인삭 | 미농에 행차. |
경행4 | 11 | 경진삭 | 미농에서 귀국함 |
경행12 | 8 | 을미삭 | 웅습배반, 축자에 행차. |
경행12 | 9 | 갑자삭 | 주방국의 사마에 도착. |
경행12 | 12 | 계사삭 | 웅습을 치려고 의논함. |
경행17 | 3 | 무술삭 | 왕경을 그리워하는 노래(思邦歌) |
경행18 | 4 | 임술삭 | 熊縣에 가다. 미즈시마 |
경행18 | 5 | 임진삭 | 위북에서 배로 출발, 화국에 도착 |
경행18 | 6 | 신유삭 | 토지주 진협을 죽임 |
경행18 | 7 | 신묘삭 | 축자후국. 팔녀국. 的邑. 浮羽 |
경행19 | 9 | 갑신삭 | 일향에서 귀국 |
경행20 | 2 | 신사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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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행25 | 7 | 경진삭 | 무내숙니를 북륙에 파견 시찰. |
경행51 | 1 | 임오삭 | 치족언존과 무내숙니가 연회에 불참 |
경행51 | 8 | 기유삭 | 무내숙니를 동량의 대신으로 삼음 |
경행52 | 5 | 갑진삭 | 황후 사망 |
경행52 | 7 | 계묘삭 | 팔판입원명을 황후로 책봉 |
경행53 | 8 | 정묘삭 | 소대왕이 평정한 나라들 순행 출발. |
경행54 | 9 | 신묘삭 | 이세에서 귀국해 전향궁에 머무름 |
경행58 | 2 | 신축삭 | 근강국에 행차. 고혈수궁에 3년간 거주 |
경행60 | 11 | 을유삭 | 천황 사망. 106세 |
위 표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월삭간지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대개 천황 2년 봄 3월 병인삭 무진에 황후를 책봉했다는 식으로 정확한 날짜를 기술해 놓고 있는데, 삭(朔)은 초하루를 말하며 이 월삭간지를 바탕으로 하여 연도를 추찰할 수 있다. 가령 ‘3월 병인삭 무진’은 3월 1일이 병인일이고 그 달의 무진일을 가리키니까 3월 3일이라는 말이다. 3월이 병인으로 시작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수십 년에 한두 번 나올까말까 할 정도다.
서기 72년이 병인삭이다. 서기 72년 3월 1일의 간지가 병인인 것이다. 이것 하나만 보면 위 경행기의 연도는 아주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앞뒤 연도의 월삭간지들은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행 1년 7월은 기사삭인데 실제 71년 7월 간지를 찾아보면 경오삭이다. 그리고 경행 3년 2월은 경인삭인데 실제 73년 2월은 신묘삭으로 역시 어긋난다. 다른 간지들도 마찬가지다.
경행천황이 서기 71년~130년 사이에 재위했다는 말이 허황하기 그지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경행천황이 그저 가공의 인물일 뿐이며 실존했던 인물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려왔다. 그렇지 않다. 경행천황은 실존했던 인물이 분명하다. 언제? 500년대.
경행천황은 서기 71년이 아니라 500년대에 큐슈의 구마천(球磨川) 하류 야츠시로(八代)시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큐슈백제(=백제담로)의 왕으로 추측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재위기간은 서기 531년~564년 정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월삭간지를 대조해 보면 거의 대부분이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음 표에서 보듯 경행천황의 재위기간을 531~564 정도라 간주하고 월삭간지를 대조해 보면 신기하게도 거의 대부분이 일치한다.
천황년 | 월 | 월삭간지 | 월삭간지 대조 |
경행1 | 7 | 기사삭 | 531년 7월 기사삭 |
경행2 | 3 | 병인삭 | (532년 1월 병인삭) |
경행3 | 2 | 경인삭 | (533년 1월 경인삭) |
경행4 | 2 | 갑인삭 | 534년 2월 갑인삭 |
경행4 | 11 | 경진삭 | 534년 11월 경진삭 |
경행12 | 8 | 을미삭 | 542년 8월 을미삭 |
경행12 | 9 | 갑자삭 | 542년 9월 갑자삭 |
경행12 | 12 | 계사삭 | 542년 12월 계사삭 |
경행17 | 3 | 무술삭 | 547년 3월 무술삭 |
경행18 | 4 | 임술삭 | 548년 4월 임술삭 |
경행18 | 5 | 임진삭 | (548년 3월 임진삭) |
경행18 | 6 | 신유삭 | 548년 6월 신유삭 |
경행18 | 7 | 신묘삭 | (548년 5월 신묘삭) |
경행19 | 9 | 갑신삭 | |
경행20 | 2 | 신사삭 | 550년 2월 신사삭 |
경행25 | 7 | 경진삭 | |
경행51 | 1 | 임오삭 | 555년 1월 임오삭 |
경행51 | 8 | 기유삭 | 555년 8월 기유삭 |
경행52 | 5 | 갑진삭 | (556년 6월 갑진삭) |
경행52 | 7 | 계묘삭 | (556년 8월 계묘삭) |
경행53 | 8 | 정묘삭 | 557년 8월 정묘삭 |
경행54 | 9 | 신묘삭 | 558년 9월 신묘삭 |
경행58 | 2 | 신축삭 | |
경행60 | 11 | 을유삭 | 564년 11월 을유삭 |
『일본서기』의 초창기 천황의 월삭간지들은 원가력과도 일치하지 않고 의봉력(=인덕력)과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532년 3월의 경우, 원가력에 따르든 의봉력에 따르든 모두 을축삭으로 나온다. 병인삭이 아니다. 532년에는 윤달이 들어있는데 원가력에는 윤3월이고 을미삭이다. 의봉력(인덕력)에는 윤5월이고 을미삭이다. 윤달이 어디 들어가느냐에 따라 월삭간지 오차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 큐슈와 서일본 지역의 나라들이 사용한 역법이 원가력이나 의봉력과는 좀 달랐을 수도 있지 않으냐는 얘기다.
후대의 편찬자들이 소설 쓰듯이 꾸며 넣은 것으로 의심되는 내용도 많은 것이 바로 『일본서기』이다. 후대의 기록자들이 딴에는 원가력 혹은 의봉력에 따라 계산하느라고 했지만 역법을 잘못 적용했거나 윤달의 계산을 잘못하는 바람에 어긋나게 되었을 수도 있다. 물론 후대의 전승자와 편찬자에 의한 오류가 아니고, 500년대 당대의 역법 자체가 올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오류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한두 달 오차가 생겼다가 그 다음 이어지는 월삭간지들은 다시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보면 역법이나 기록 자체의 정확성에 의심이 갈 수는 있겠지만 경행천황의 재위기간이 531년~564년 무렵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전체 재위기간은 약 34년.
『일본서기』 경행기는 후반부의 월삭간지를 끼워 맞추려고 중간부분에 일본무존(=구형왕)의 기록을 억지로 삽입해 재위기간을 60년으로 늘이는 바람에 경행천황이 무려 143세까지 살았던 결과가 되어 완전히 비현실적인 인물이 되어 버렸고, 졸지에 기록 전체가 황당무계한 얘기로 전락해 버렸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잘못 계산되어 있는 천황의 활동연대를 바로잡고 나서 보면 『일본서기』라는 책이 결코 거짓말로만 채워진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행기에 실려있는 내용이 전부 다 옳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본서기』는, 특히 계체기 이전의 천황기들은, 후대인이 재창조하듯이 이리저리 얽어서 끼워 맞춘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기술된 내용을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 일단 경행(景行)천황의 실제 이름은 [오타라시, 오타라]였고, 그것을 “대족(大足), 대대(大帶), 의다랑(意多郞), 경행(景行)” 등으로 표기했으며, 그의 재위기간은 531~564 정도로 추정된다는 데까지 중간 정리를 마무리 짓기로 한다.
[최규성]
전 MBC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