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의 시신이 잠깐 안치되었다가 떠난 충렬사 아래에는 흥선대원군 척화비가 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비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잘 알겠지만 흥선대원군은 고종 임금의 아버지로 강화도령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때 대왕대비였던 조대비와 같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12살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을 했던 사람이다.
1866년 프랑스군대가 쳐들어와서 막아내고 또 1871년 미국이 쳐들어와서 막아 낸 흥선대원군은 자신감이 넘쳐 전국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글을 새기고 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 비는 일제강점기 대부분 훼손되고 우리나라 몇 군데에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답사를 다니면서 예산에서 본 적이 있고 창녕에서도 본 적이 있다. 남해척화비는 남해 충렬사 아래 척화비가 있는 곳에 파출소가 생기면서 남해 노량 로터리로 옮겼다가 6·25 때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그 비를 남해노량의 파도횟집 사장님이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설천중학교 교장선생님께 보여드렸고, 교장선생님은 흥선대원군의 척화비라는 것을 알고 당시 설천중학교 교정에 세웠다.
나도 중학교 시절 그 비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다가 남해에 인구가 줄어들고 노량의 파출소가 사라지면서 처음 있었던 자리로 돌아온 비가 바로 흥선대원군의 척화비다. 참 많이도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아온 척화비를 볼 때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친다.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권력을 나누기가 싫어 무던히도 애썼던 한 남자가 쇄국정책을 펴면서 서양 오랑캐와 화친하는 자는 매국노라고 하며 척화비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 이 척화비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현대인들은 척화비 곁을 지나가면서도 무슨 비인지도 모르고 지나친다.
한 나라를 다스리거나 한 모임을 이끌어 가는 리더가 오래 존속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 중국을 통일하고 홍건적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던 진나라는 16년밖에 존재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 역시 근대화로 나아가는 세계사적인 물결을 읽지 못하고 척화비를 세워 조선이란 나라를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게 한 것은 아닐까?
작은 친목 모임도 마찬가지다.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오픈하지 않고 끼리끼리 입을 맞추는 모임이 건강하게 유지되기 힘들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 ‘권력은 십 년을 못 가고 활짝 핀 꽃도 열흘을 가지 못한다’고 했다.
차라리 그때 서양 오랑캐와 화친했다면 조선은 또 어떤 역사를 썼을까? 자못 궁금하다. 나라를 구하고 전사함으로써 살신성인의 최고봉이 된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와 권력을 쥐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흥선대원군의 그림자가 동시에 남아 있는 곳이 남해 노량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가 주는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서재심]
시인
남해군문화관광해설사
코스미안뉴스 객원기자
서재심 alsgml-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