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 깃을 여미게 하는 추운 겨울날이 되면 꼭 생각나는 생선이 있다. 이맘때 동해안에서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연탄불에 구워 먹는 생선, 우리가 흔하게 먹을 수 있는 ‘도루묵’이다. 도루묵은 겨울이 오면 청정 바다 동해 근해로 모여든다.
불에 노랗게 잘 구워져 탱탱해진 알을 씹으면 톡톡 알이 터지면서 고소한 맛이 입안 전체에 퍼진다. 속살이 부드럽고 비늘이 없으면서 껍질이 얇아서 조금만 열을 가해도 금새 익기 때문에 강원도에서는 ‘도루대기(도루묵의 사투리)는 겨드랑이에 넣었다 빼도 먹을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도루묵은 고생했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돼 도로 물리는 처지가 됐을 때 ‘말짱 도루묵’이라 불렸던 어원 때문에 그 맛에 비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생선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피난 길에서 선조 임금은 ‘목(目)’이라는 생선을 맛있게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맛있게 생선을 먹은 임금은 그 맛에 걸맞게 생선의 이름을 ‘은어(銀魚)’라고 하라고 했다. 대궐로 돌아온 임금은 어느 날 불현듯 피난 길의 은어가 떠올랐다. 하지만 임금이 다시 먹어본 은어의 맛은 옛날의 그 감칠맛이 아니었다. 실망한 임금은 이름을 ‘도로 목’이라고 하라고 명하여 ‘은어’가 ‘도로목’이 되었고, 오늘날 ‘도루묵’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60년대와 70년대 동해안에 명태가 많이 잡힐 때, 잡히라는 명태는 안 잡히고 그물에 하얗게 도루묵 떼가 걸려오기 일쑤였다. 어민들은 난감했다. 명태보다도 그물에서 떼어내는 게 손이 더 많이 갔다. 크기도 작을 뿐만 아니라 머리에 뾰족한 가시가 있어 그물에서 도루묵을 떼어내다가 가시에 찔려 손가락을 다치는 일이 많았다. 그물에서 힘들게 떼어낸 도루묵은 사 가는 장사꾼도 없었다. 그러니 도루묵이 많이 잡혀도 어부들은 영 반갑지 않았다.
도루묵이나 양미리가 많이 잡힐 때는 이들을 식용으로 먹지 않았다. 거름으로 쓰려고 밭에다 파묻기도 했고, 어분 사료공장이 생기고 나서는 사료로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렇게 흔하디흔했던 도루묵이 제대로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사료용으로만 팔리던 도루묵이 식품용으로 가공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도루묵이 잡히는 대로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면서 금값이 되어버리자 동해안 지역에서도 도루묵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남획으로 어획량도 급감했고 설사 잡히더라도 값이 비싸서 감히 밥상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 흔한 도루묵이 우리 밥상에서 모습을 감춘 것이다.
도루묵이 우리 밥상에 다시 오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다. 그동안 자원 보호 노력이 결실을 맺었고, 특히 인공부화 성공으로 치어를 대량 방류해 개체 수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도루묵은 보통 석쇠 위에 소금을 친 도루묵을 올려놓고 굽는 알도루묵구이가 최고 별미인데,자칫하면 태우기 쉽다. 그래서 양미리는 손님이 직접 불에 굽더라도 도루묵은 보통 식당 주인이 대신 구워준다. 또 다른 별미는 도루묵찌개로 무와 대파, 고춧가루를 넣고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해서 국물이 자박자박할 정도로 졸여서 먹는데, 살이 워낙 연해서 센 불에 가열하면 살이 다 풀어지니 중불에 끓이는 게 좋다.
몸의 절반을 알로 채우고 있는 생선, 반짝이는 몸빛 때문에 오랫동안 ‘은어’로 불려왔던 생선, 곤궁한 동해안 어민들에게는 은보다 더 귀했던 생선, 싼값으로 사 먹을 수 있어서 가난한 서민들의 식탁을 금새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던 생선.
먹거리가 지천으로 넘쳐나는 요즘에도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는데 도루묵은 그저 평범한 생선이 아니라 동해 바닷가 사람들에게는 추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백두대간에 쌓인 눈이 하루가 다르게 사라질 때면 동해안 도루묵도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동해안 사람들이 1년 뒤에 만날 도루묵과 작별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여계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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