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바흐가 살았던 18세기에는 전염병(페스트)으로 인해 굶주림과 가난 속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래서 바흐의 음악에는 우울함이 짙게 깔려있는지도 모른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바흐의 시대처럼 전 세계적 재앙 속, 죽음과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살고 있다. 이럴수록 우울감과 공허감은 우리의 마음과 심장에 깊이 파고든다. 그러나 우린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바흐는 중세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흑사병(페스트)의 유행을 겪으면서 전염병에 상처 입은 영혼을 위해 칸타타 <내 몸 성한 곳 없으니>를 작곡했다. 페스트로 죽어간 희생자와 그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에게 바치는 음악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공포의 펜데믹 상황에서 그 무엇보다 위로와 격려를 해줄 수 있는 분야는 문학과 예술 분야가 아닌가 한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설치 음악’은 그가 직접 소리를 만들거나 발견한 소리들을 다양한 영상 속에 결합한 미디어아트이다. 그 속엔 ‘시 낭송’도 함께 한다. 낭송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존 케이지나 류이치 사카모토 같은 음악가들은 음악 너머의 음악, 언어 너머의 언어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낭송가 또한 낭송 너머의 낭송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의 깊은 바다에서 낭송을 낚아야 한다. 좋은 미끼도 중요하지만 직접 시의 해저로 들어가 미끼 너머의 그 무엇, 때론, 잠수부가 되어 직접 보고 살펴서 낚아야 할 이유가 있다.
詩는 詩歌이다. 고대 시가는 중세의 공개적인 낭송으로 음악적 요소가 강한 원시 종합예술(Ballad Dance)이었다. 애드거 앨런 포우는 “시는 아름다움(美)의 운율적 창조물이다”고했듯이. 시가 다른 장르에 비해 뚜렷하게 음악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낭송의 또 다른 의미이다.
예부터, 중국은 시 300수를 암송하게 했다. 그리고 신라의 향가인 ‘서동요’의 노래도 일종의 낭송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시대 ‘雅會(아회)’는 벗들과 함께 시문을 짓고 거문고를 타며 즉석에서 시를 낭독, 낭송했다. 이것은 시가 세계의 틀을 사고하는 ‘인식의 틀’이었기 때문이다.
문학의 정수인 시는 운율이다. 마찬가지로 낭송은 선율이다. 그것은 낭송가의 선율이 흐를 때 감동의 전율로 다가온 이유이면서 웅크린 심장을 활짝 열어주는 처방전이다. 이럴 때 듣는 시 낭송은 마음이 아프고 배고플 때, 특히 심리적으로 불안할 때 위로가 되는 진통제이고 청량제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울림 있는 낭송은 낭송가의 날숨이 청중의 들숨이 되고, 청중의 날숨이 낭송가의 들숨이 되어 서로 만나 화음을 이룰 때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때 낭송가는 청중에게 청중은 낭송가에게 서로의 의미가 된다. 낭송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3~4분이라는 짧은 시간의 낭송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감동으로 다가와 울림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낭송을 한다. 또한, 낭송해야 할 이유다. 맛있는 음식은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듯, 좋은 낭송 또한 조미료 범벅이 아닌 깊은 울림의 맛을 준다. 깊은 서정이 우러나온 시를 ‘그늘 있는 시’라고 한다. 낭송도 청자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면 ‘그늘 있는 낭송’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낭송은 특히 불안정한 심리의 소유자에겐 안정제가 되어 준다. 이것은 낭송도 ‘시 치료’, ‘음악 치료’, ‘미술 치료’처럼, ‘낭송 치료’의 효과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 에이미 로웰은 시 낭송을 듣거나 문학작품을 낭독하는 것 역시 형상화 기술을 증진 시킬 수 있다고 한다. 어린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 지력을 촉진 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시를 공부하기 위해서 시인일 필요는 없지만,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시를 공부해야 하듯, 낭송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낭송가일 필요는 없지만, 낭송가가 되기 위해서는 낭송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정규 대학 어느 학과의 커리큘럼에 시 낭송 강좌가 개설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낭송가가 되기 위해서는 기성 낭송가의 모방이나 추종이 아닌 자기만의 낭송법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굳이 유명한 시인의 익숙한 시만 낭송할 게 아니라, 낭송 계의 주류 스펙이 아닌 비주류로 남을지언정. 그런 아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곧 자기의 가치이고 브랜드이다. 개성적이고 진보적 생각은 남다른 관점에서 나오듯 남다른 생각은 남다른 생각에 자극받을 때 가능하다.
낭송가를 생각나게 하는 낭송이 있는가 하면 낭송 자체를 떠올리게 하는 낭송이 있다. 朗誦(낭송)이 끝났는데 울림과 여운이 있다면, “낭송 너머의 여운 朗外之韻(낭외지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韻’은 울림 즉, 맥놀이나 메아리 같은 餘韻(여운), 餘味(여미)다. 이것이 낭송가가 추구해야 할 이유이고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기 위해서는 획일화된 틀과 고정화 되고, 표준화된 형식에서 과감히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문학과 예술의 사조가 그러하듯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이 필요하다. 낭송 또한,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묘사하고 있는 인물 속으로 들어가 그 인물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느껴야 하듯, 좋은 낭송가는 낭송하는 시 품으로 들어가 시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으로 낭송을 해야 한다. 그때의 낭송은 청자의 몸속에서 감정이입의 기제를 자극하여 청자에게 스스로 읊조리게 해야 한다. 낭송가는 스스로 감동하지 않으면 청자를 감동케 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 심장이 뛰면서 시키는 낭송을 해야 한다.
지금은 비대면의 시대이다. 가까운 공원이나 자드락길을 홀로 微吟緩步(미음완보) 하면서 어떤 시가 문학의 한 소절을 나지막이 읊조려보는 것 또한 코로나19 시대를 이겨내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저 높은 낭송이라는 雪山 고지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등반 중인 낭송가들, 특히 <시 소리 낭송회>, 그들은 지금도 혹한의 계절에 아이젠을 다듬고, 옷깃을 다잡으며 머리엔 울림의 메아리 띠를 동여매고 베이스캠프에서 낭송의 텐트를 치고 있다. 시의 입술에 소리의 색을 입히고 있는 그들의 건투를 빈다. 필자는 낭송가가 아니다. 그렇기에 객관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壬寅年 元旦에.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문학작품 공모전 금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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