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학자인 당곡 정희보는 60년 일생에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까지 5대의 왕조가 바뀌었고 그 시기 조선에는 선비가 크게 화를 당하는 4대 사화가 일어났다. 무오사화는 사초에 기록된 이야기로 사화가 일어나서 역사 사(史)를 쓰지만, 그 외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는 선비가 크게 화를 당했다 하여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4대 사화를 다 겪어서 그런지 당곡 정희보는 정치로 진출할 것을 접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남해 초양마을에서 태어나 17살 무렵 함양으로 이주하여 공부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만 매진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차츰 당곡의 제자들은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래서 이름을 알리니 선비들은 당곡 선생의 사재에서 풍류를 즐기기도 하고 학문을 연구하고 서로 강론을 하면서 당곡 선생의 선비정신은 영남과 호남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전한다.
당곡 정희보 사후에는 당곡의 제자들이 13살 아래인 남명 조식의 문하에 들어가 배움을 계속했고 그런 제자들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두 의병장으로 분기하게 된 것이다. 곽재우, 정인홍, 고경명 등이 다 남명의 제자들인데 남명 조식이 생전에 ‘알면 실천하라.’고 강조해서 그런지 그의 제자들은 나라가 위기에 빠지니 선비로서 가만히 있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를 몸소 실천했다.
영남과 호남에서 의병장이 된 대부분의 선비가 남명 조식의 제자라고 하지만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남명 조식의 제자와 당곡 정희보의 제자가 한 나무의 가지이니 당곡 정희보의 사상이 짐작이 된다.
임진왜란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하늘도 깜짝 놀랄 일이었고 그런 위급한 상황에도 의연하게 일어났던 의병장들이 남해 출신 선비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옛날 우리 할머니가 ‘큰 나무의 덕은 못 보아도 큰 사람의 그늘은 팔십 리를 간다.’고 했다. 이 운곡사 주변에서 운곡사의 기운을 얻고 뛰놀던 사람 중에 남해를 알리는 큰 사람은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고두현 시인이 서면 정포라고 했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을 한 다음 날 고두현 시인을 만나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선생님, 서면 정포에서 태어나셨다고 하셨지요?”라고 물으니 “우물이지요. ‘달의 뒷면을 보다.’란 시집에 정포리 우물마을이란 시가 있어요.”라고 대답해 주셨다. “그래요, 그 시집 다 읽기는 했는데...”하고 집으로 와서 시집을 펼쳐 바로 확인했다. 시가 참 좋다.
정포리 우물마을
물처럼 바람처럼
흘러 본 사람들은
알았을까
흙에서 와 흙으로 가는
물처럼 바람처럼 강처럼 바다처럼
스스로 길이 되어 흐르는 사람들
남해 서면 정포리 우물마을에서 보았다
윗물과 아랫물이 서로 껴안고
거룩한 몸이 되어 반짝이는 땅
봄마다 다시 돋는 쑥 뿌리 밑으로
우렁우렁 물이 되어 함께 흐르며
연초록 풀빛으로 피어나는 사람들
당곡 정희보의 제자들이 남명 조식의 제자가 되고 그 제자들이 임진왜란 때 스스로 자력으로 의병을 모으고 나라를 구하는데 목숨을 던졌다. 학문이든 정치이든 그 분야에서 빛을 발하면 그것이 예술이 아닌가 싶다.
작가 박경리가 “이순신은 정치를 예술로 승화시킨 분이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곡 정희보는 학문을 예술로 승화시킨 분이다. 정희보의 사당이 있는 운곡사가 남해 서면 중현마을에 있다.
재미난 스토리를 하나 더 단다면 당곡 정희보의 제자 중에 청련 이후백이란 사람이 있는데 충무공 이순신이 함경도 동구비보 군관 시절 감사로 왔었다. 모두에게 깐깐하게 대했지만 이후백은 충무공 이순신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충무공께서 “감사가 깐깐하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왜 내게만은 이렇게 호의적이냐”고 물었더니 “내가 아무에게나 그리하겠는가 나도 옳고 그름은 안다.”하고 답했다고 한다. 당곡 정희보의 사상으로 물든 사람 중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알아본 제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