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즉통(窮則通)이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 극단의 상황에 다다르면 도리어 해결할 방도가 열린다는 말이다. 2022년 대한민국은 궁(窮)하다. 보건의료환경이 궁하고, 정치적인 기품이 궁하고, 권세가들의 지즐거림이 궁함을 넘어 빈(貧)하다. 흔들고 있는 깃발이 남루하다. 언제쯤이면 이 궁빈(窮貧)한 목마름이 해갈(解渴)될까.
이런 시절에 생각나게 하는 유행가가 강산에의 <춤추는 나>다. 이 노래가 세상에 나온 1998년은 경제적으로 궁하던 시절이다. 소위 IMF라는 냉혹한 시련의 터널 입구로 온 나라가 빨려 들어가던 시절이다. 그 시절 강산에는 세상을 향하여 역설적인 노래를 내지른다. 난세(亂世)의 분(憤)을 흥(興)으로 발산한 것이다. 아니 발산을 유도했던 것이다. 대중예술가의 기치이고, 기백이고, 기발이다.
예술가의 영혼은 대중들 삶이 진화(進化)·승화(昇化)·강화(講和)되면서 행복지수를 증대시켜가는 곳을 지향해야 한다. 이념의 상대성과 감성의 동질성에 치우치면 그는 이미 예술가가 아니다. 동서남북을 척도로 하는 지역정서의 틀을 만들어 스스로를 좌파·우파·북파·남파로 가두어도 안 된다. 지역 분할을 기도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예술가의 영혼은 영원히 고고(孤苦)·고독(孤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산에는 예술가다. 춤을 추는 나는 바람 그대는 물결~.
바로 이런 음악으로/ 춤을 추고 싶었던 거야/ 기다렸어 이런 느낌/ 몸이 저절로 흔들리네/ 날 붙잡고 힘든 모든 것/ 자유로움의 몸짓으로 날려보네/ 온몸으로 그들 향한 춤을 추면 되/ 온종일 부서지는 저 뜨거운 태양으로/ 나는 살고 있어/ 푸른 저 바다 위에 누워/ 거대한 산이 되어 가슴으로/ 온 세상을 마셔버리고/ 춤을 추는 나는 바람이 되고/ 물결이 되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멈추게 할 순 없어/ 온몸으로 뜨거워진 나를/ 멈추게 할 순 없어/ 그대를 향해 춤을 추는/ 나는 바람이 되고 물결이 되고/ 온종일 부서지는 저 뜨거운/ 태양으로 나는 살고 있어/ 푸른 저 바다 위에 누워/ 거대한 산이 되어/ 가슴으로 온 세상을 마셔버리고/ 춤을 추는 나는/ 바람이 되고 물결이 되고/ 자유롭게 흔들리는 몸짓/ 온몸으로 흔들리는 몸/ 자유롭게 흔들리는 몸/ 온몸으로 흔들리는 몸/ 자유롭게 흔들리는 몸/ 온몸으로 흔들리는 몸/ 자유롭게 흔들리는 몸/ 하나 둘 셋 넷/ 춤을 추는 그대는 바람/ 나는 물결이 되고/ 춤을 추는 그대는 물결/ 나는 바람이 되고/ 춤을 추는 그대는 바람/ 나는 물결이 되고/ 춤을 추는 그대는 물결/ 나는 바람이 되고/ 내가 있고 또 그대가 있고/ 내가 있고 또 그대가 있고/ 내가 있고 또 그대가 있고/ 내가 있고 또 그대가 있고/ 춤을 추는 그대는 바람/ 나는 물결이 되고/ 춤을 추는 그대는 물결/ 나는 바람이 되고/ 춤을 추는 그대는 바람/ 나는 물결이 되고.
내가 노래가 되고, 내가 악기처럼 풍풍거린다. 하나 둘 셋 넷~ 이 암울한 상황을 퇴치하자. <춤을 추는 나> 노래가 발표된 시절은 경제적 빈곤, 나라는 모라토리움(Moratorium, 지불불가·유예)의 문전을 얼씬거렸고, 백성들은 졸라맨 허리띠에 스스로의 숨통이 막혀 들어가던 시절이다. 경제적 상황과 목 조르기를 하듯 죄이는 삶의 굴레가 스스로 이승을 등지게 하는 상황이 꼬리를 물던 시절이다.
2022년의 상황은 더욱 기이하다. 공공의 이익으로 눈가림을 한 부지기수의 돈 놀음 끝에 수많은 명줄이 끊어져 가고 있다. 어디까지일까. 1998년의 과정과 상황은 다르지만 국민들 참혹한 삶의 현실은 비슷하다. 국가와 정부와 지도자는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국민들의 삶과 안녕(安寧)에 대한 본질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 어렵던 시절에 ‘춤을 추는 나(대중)’를 역설할 발상을 한 강산에의 가슴팍이 궁금하다. <춤을 추는 나>는 강산에 4집에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과 함께 실려 있다. 컬컬한 목청, 토속적인 향취에 넘치는 정감과 공명, 역동적인 리듬과 사운드, 거침이 없는 샤우팅이 애청자들의 가슴팍을 후련하게 뚫어준다. 노래는 세상과 통한다. 이 세상은 바로 오늘이고,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난세분(亂世憤), 망국탄(亡國嘆), 치세락(治世樂)이다. 분통 터지는 노래와 한탄하는 노래와 즐거운 노래의 주인공도 바로 나다. 그 주인공인 너와 나의 어울림이 오늘의 세상이다.
<춤추는 나>를 열창한 강산에는 1963년 부산 출생 강영걸, 1986년 언더그라운드 라이브클럽에서 가수활동을 시작하였고, 동래고와 경희대 한의대(중퇴)를 거쳐 1992년 솔로 음반 <강산에 Vol.0>으로 데뷔하였다. 재일 한국인 2세 겐 마사유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샤우트 오브 아시아>에 주연으로 출연하였으며, 2006년 광복절 날 북한에서 진행된 남북평화기원 콘서트에 참가했었다. 이때 <라구요>를 열창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노래~. MBC 스페셜 ‘곰배령 사람들’의 내레이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홍대 브이 홀에서 인권콘서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도 열었다. 2010년 한국대중가요 100년 사상 최초로 트위텁 게릴라 콘서트를 열어 화제가 되었다. 트위텁은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기습적으로 번개모임을 갖는 콘서트, 2월 4일 2시 26분에 기습적으로 공개된 장소는 인사동 쌈지길이었다. 2020년 그가 10여 년 만에 새 싱글음반 <가만있어 봐라>를 냈다. 이 음반에는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재에 본인의 생각을 담아낸 <툭툭탁>(모기·거미·파리·나방·지렁이를 은유한 곡), 평화로운 강산에의 일상이 그려지는 컨트리풍 <성의김밥>(김밥·커피·땡초·만둣국을 얽은 노래) 등 두 곡을 실었다. 그는 신중현·안치환·신형원·정태춘 등과 함께 일상적이면서도 사회성 있는 철학을 노래한다.
우리 대중가요사에 <춤추는 나> 같은 시대 역설 유행가는 또 있다. 1972년 신중현이 내지른 <아름다운 강산>이다. 그 시절도 개발지향 산업화에 목구멍이 타들어 가던 시절이다. 1938년 서울 명동 출생 신중현, 그가 남긴 유행가 제목을 헤아리면 머리에 전율이 일어나고, 노래마다의 탄생 시대가 오버랩 된다. 시대이념을 절규하면서도 희망과 낭만을 버무린 노랫말과 서구적인 듯하지만 우리의 본혼(本魂)을 씨줄 날줄로 얽은 창의적인 멜로딩에 머리와 사지(四肢)가 먼저 꿈틀꿈틀 반응한다.
1972년 10월 17일 발표된 대통령 특별선언과 12월 27일 개정된 유신헌법 풍파(風波) 속, 그해 10월 29일 유니버샬 음반으로 발매된 유행가가 <아름다운 강산>이다. 이 곡은 하늘·바람·강물·광야·희망·자랑스런 이 땅~을 애국가처럼 절규한 소름 끼치고 가슴팍 오르라들던 시절에 대중들에게 희망 메시지를 선도한 노래다. 2022년에 세상을 향하여 이런 노래를 창작하고 샤우팅할 예술가는 어디에서 찾을까. 어게인 나훈아, 테스형~ 어찌하면 좋으리까?
암울하고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의 풍랑 속에서 어찌 이런 담대한, 희망적인 노래를 만드는 도발(?)을 하였을까. 신중현의 가슴팍 속 간덩어리 크기가 궁금하다. 이 노래의 메시지는 새 희망이다. 봄과 여름이 지나면 가을 겨울이 온다. 정치적인 윤회와 진화를 은유했다. 2022년 대한민국도 정치적인 윤회의 봄꽃이 피어날 것이다. 아름다운 강산에 펼쳐지는 신의 섭리(攝理)다. 그 시절 아프고 서럽고 무서운 마음은 너의 마음이고 나의 마음이었다. 가슴 미어지는 울분과 응어리에 대한 공감대를 에둘렀다.
그래, 아름다운 이곳에 내가 있고 네가 있다. 그래, 손잡고 가보자 달려보자 저 광야로. 우리들 모여서 말해보자 새 희망을... 이 노래가 울려 퍼진 시기는, 우리 정치사의 황야의 사막언덕 같은 시절이다. 반추하고 싶지 않고, 왜곡 되게 각설(却說)하기도 하지만 엄연한 실존의 과거 역사다. 진화의 과정이었다. 그 과정은 성장통 같은 역사의 마디라고 할 수 있다. 노래는 같은 역설이지만, 시대는 세월의 산 능선을 몇 개나 넘었음을 기억하시라. 풍상세월(風霜歲月)에 묶고 삭여진 노래 속에는 창작 당시 예술가의 담대한 영혼이 아롱져 있다. 테스형은 선창하고 있으리라. 2022년 대한민국이여, 하나둘 셋 넷~. 앞으로 갓!
<아름다운 강산> 노래 발표 당시 신중현은 35세였다. <춤추는 나>를 발표할 당시 강산에도 35세였다. 2022년 오늘, 팍팍한 시대와 비뚤어진 권위를 향하여 새 희망을 싱어송텔링할 대중가요 유행가 작품자는 어디에서 찾을까. 말초적이고 육감적이면서 즉흥적인 사랑과 이별을 얽은 곡조가 아니면, 흘러갔거나 흘러온 노래를 다시 불러 내 은근슬쩍 묘하게 자기화(음정·박자·리듬·가사·가창·율동 등을)하여 상업적으로 공유하는 각종 노래 경연과 남발하는 스핀오프(spin-off. 유사한 프로그램) 기획연출의 소실점(消失點)은 어디쯤일까.
언제까지 대중(시청자)들은 눈알에 아롱지는 재미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하는 흥미를 얽은 모니터 앞에 안방 1열로 앉아서 꺄악~ 반응하는 우민(愚民) 방청객으로 남아야 할까. 가슴팍에 아롱지어 뜨끈뜨끈해질 의미(義味) 있는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을까.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제작 연출가들이여, 대비하시라~ 포스터 코로나19 시대에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희망의 메시지와 모티브 아이템을,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유행가와 역사 앙상블 스토리텔링을~.
2022년 대한민국의 수많은 대중예술(예술가들)이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춤을 추듯이 비지니스적으로 건들거리고 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회적 내로남불 메카니즘 속에 흔들리는 세상을 외면이라도 하듯이 인기 시청률에 편승한 기획으로 대중들 사유(思惟)의 감성을 매몰시키고 있다. 미디어적인 선동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너는 내 편인가 네 편인가? 갈라치기가 일상화를 넘어 목표화되어가는 시대다.
보편적인 가치와, 경우와 상식이라는 철학적인 준거가 사라진 오늘, <춤추는 나>와 <아름다운 강산> 같은 시대를 절규할 싱어송라이터가 그립다. 춤을 추는 바람 같은 그대 앞에서 나를 물결로 일렁거리게 하고, 춤을 추는 물결 같은 그대 앞에서 나를 바람으로 만들어 줄 예술가~. 언중사중시중동중(言中思中時中動中)의 예술가여 어서 세상 밖으로 나오시라. 서둘러 오시라~.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유행가스토리텔러 제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