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학교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발이 들어서기 무섭게 어디선가 음을 맞추는 높고 낮은 행진곡과 밴드 연습 소리가 물세례처럼 퍼붓고 곧바로 얼굴에 분칠한 연극영화과 학생들이 무엇인가 먹으며 지나갔다.
이곳이 바로 예술풍경을 한 폭의 도화지에 전시해 놓은 것 같은 교정의 풍경이었다. 나에게 아주 귀한 기회였다. 나는 미술관을 나섰다. 평소 그림을 즐기는 내게는 본래의 고향으로 들어가는 느낌으로 둘러보고 싶었다. 미술관으로 가는 입구에 줄 서 있는 조각상들이 웃음없는 얼굴로 나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벽마다 가득 그려진 그림들이 나를 위해 무대를 내어준 기분이다.
첫 번째 어린 학생반을 먼저 둘러보았다. 늘 그림을 그리는 일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고 느끼며 산 내게는 저들에게도 나 같은 필연의 운명이 주어질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 같은 팔자를 저들도 타고났는지 찾아보는 특별 시간 같았다.
물론 그림을 시작하는 학생들 모두의 적성을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림보다는 과학을, 그림보다는 문학을 원하여 떠날 수 있는 것이 어린 학생들의 세상이다. 떠났던 학생도 자신의 적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학생들의 인생관이다.
과학도 문학도 예술도 그들만의 깊은 성찰이 필요한 일처럼 그 모두가 예술이라는 세상에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일이다. 그들이 준비하는 예술처럼 세상 모든 만물이 어느 것 하나 의미 없이 창조되는 일은 없다. 과연 저 학생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을까. 없는 실체를 형상화하여 이루어 내는 예술이라는 운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찾아오는 인생의 고독도 절망도 각각 다른 화폭의 그림으로 담아내는 연습을 끝까지 지켜갈 수 있을까. 아주 짧은 순간에 나는 그들의 일생을 그리고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미완성 작품을 위하여 죽음만큼 깊은 잠에서 얼마나 방황하게 될까.
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들의 생을 지켜보고 있었고 학생들은 붓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바로 나의 모습을 보듯 꽤 신선해 보였다. 칠판에는 ‘나의 선생님 얼굴’이라고 쓰여 있고 모델이 된 선생님은 반대 방향으로 돌아앉아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번 보았던 선생님의 얼굴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그려내는 일이다. 그렇게 예술의 첫걸음 시작을 하는 것이다. 선뜻 자신 있게 달려드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선생님을 영감으로부터 부르기 위하여 잠시 침묵하는 학생도 있었다.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표현이 시작된다. 심각할 것 같은 모습들이 순간순간 다르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장난기 어린 호흡 같아도 마구 쉬는 게 절대 아니다.
성악가처럼 들숨과 날숨이 다르다. 귀를 곧바로 세우며 누군가의 말을 듣는 듯하다가 옆에 앉아있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말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얼굴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누군가와의 대화로 옮기는 예술이다. 학생들이 분명 빙의된 눈을 껌벅거리며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의 습관과 같았다. 선생의 윤곽이 보는 각도에 따라 그림의 소재가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들이 그린 선생님 얼굴은 천재 예술가의 길로 가는 첫 얼굴이다.
분명 그림을 그리는 예술은 태어나면서 특별히 선택된 것 같다. 그 모습이 그들이 성찰하는 얼굴이다. 그들이 꾸며놓은 성찰의 공간에서 병아리처럼 고운 손으로 선생님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훗날 더 큰 예술의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다. 꿈을 하루에도 수없이 운명의 옷을 빌려 입고 세상에 나서야 한다. 그런 일을 그들이 과연 해 낼 수 있을까.
마치 알에서 깨어나 삐악대는 병아리의 울음소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어 울어대는 소리처럼 세상일 어느 것 하나도 알 수 없는 시작이다. 언제라도 병아리가 보고 싶어 찾아가면 만날 수 있는 곳은 초등학교 앞이다. 어느 세상으로 팔려 갈 것인가 알 수 없는 병아리들에게 가장 커다란 두려움이다.
예술을 하는 일은 바로 그 두려움 없이 시작될 수 없다. 선생의 얼굴을 그리던 그들도, 나도 그리고 병아리도 두려움도 절실해야 창조의 기적은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화가가 자기 귀까지 내어주고, 시인은 각혈하고 그렇게 미완의 세상을 두고 떠났던 것일까.
내 손에 누군가가 쥐여 준 붓을 들 때 캔버스 위에 세상이 담긴다. 선택한 화폭만큼의 많은 방황을 하며 외로움이라는 고뇌에 빠져 명상이라는 망상 속에서 잠이 든다. 내 안에 시끄러운 소리도 진짜 내 모습을 만나기 위한 망상의 그림을 그린다. 학생들을 보면서 너무 멀리 떠나온 나의 그림 세상으로 찾아가는 순백의 예술가를 만난 기분이다.
내가 그렸던 개, 고양이, 꽃 그 모든 사물을 다시 생명으로 깨어나게 하는 예술가들이다. 그리스 신화가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도 하늘을 들고 벌을 받고 있는 아틀라스 동상이 그들의 모든 것을 지켜주고 있다. 그만큼의 세월이면 원죄인 팔자의 대가로 인한 외로움을 충분히 갚고 남았을 텐데 알 수 없는 대가를 아직도 치르고 있다. 그 모습이 바로 내 모습만 같아 오랫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어느 사진 속에서도 찾아낼 수 없는 지금의 늙은 나의 모습의 조각을 지켜보고 있다. 먹을 것이 풍족하고 완벽에 가까운 질병 예방약으로 인간의 수명이 백 살을 가야 하는 게 커다란 숙제이며 화두다. 아이들도 나도 풀 수 없는 시간의 얼굴이다. 시간으로부터 저 어린 화가들도 나처럼 벌을 받을 것 같아 두려움이 앞선다.
시간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잔인한 걸까. 국민학교 시절 1교시가 끝날 때마다 학교 급사는 관사 처마 끝에 달린 종을 잡아당겨 땡땡대며 시간을 알린다. 그때 종을 쳐대던 급사도 이 세상 사람일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갈 줄 알았을까. 아마 급사는 자신의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어 종속에 달린 종의 심볼을 홧김에라도 떼어 버렸을지 모른다.
모두가 예술을 하며 산다.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게 시간을 영원히 멈추고 싶었던 급사도 어린 예술가들도 나도 인생 예술작품을 위한 종합예술을 하는 세상이다. 하늘을 쳐 받들고 서 있는 아틀라스의 운명처럼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인지 모른다.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
문경구 kimurg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