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프로젝트] 두보가 서울 강남에 온다면

신경희



문을 들어서니 부르며 우는 소리 들린다.

어린 아들이 굶어서 죽고 말았구나.

내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으리

마을 사람들도 역시 흐느껴 우는구나.

부끄럽다, 사람의 아비가 되어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만들다니.

入門聞號咷(입문문호도) 幼子餓已卒(치자아이졸)

吾寧捨一哀(오영사일애) 里巷亦嗚咽(이항역오열)

所愧爲人父(소괴위인부) 無食致夭折(무식치요절)

 

당나라 시인 두보가 살림이 어려워서 가족들을 봉선현의 지인에게 맡겨 놓고 떠돌아다니다가 가족을 찾아가면서 쓴 500자의 시의 몇 구절이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지 못해 자식이 굶어 죽어 나가는데도 해줄 것이 없는 무능한 모습을 본다. 자신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으나 가정에는 한없이 무능한 아버지일 뿐이다. 이런 의문이 든다. 인간 두보에게 무엇이 소중한가? 시인가, 가정인가? 그는 가정을 도외시한 채, 오로지 시를 쓰는 데만 몰두했기 때문에 역사에 길이 남는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인가?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소중한가, 일인가, 가족인가?

 

예술가의 삶

 

많은 천재 예술가들은 생전에 가난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불우했다. 죽어서야 꽃을 피웠다. 고흐가 그러했고 모딜리아니도 그리고 슈베르트 등이 그렇다. 나는 여기서 매우 심각하게 생각을 해본다. 천재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불우해야 불후의 명작이 탄생하는가? 마치 누에 번데기가 자신의 몸을 삶아서 비단실을 뽑아내듯이 말이다. 숙명적으로 먹고사는 데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는가. 가난하고 불우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이럴 수도 있겠다. 세상에 많은 천재 중,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천재성이 인정받지 못하다가 죽어서야 인정받은 경우가 있기는 하다. 예수 그리스도도 생전에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으나 죽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탄생시켰으니 말이다. 살아서는 사람들의 눈과 귀에 거슬리지 않는 작품을 해야 박해받지 않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을 테고 만약 대중들의 가치관에 부합하지 못하는 작품은 사정없이 부수어질 수밖에 없다는 시선도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감히 대중들의 가치에 반하는 작품을 구상할 수 없는 것이다. 천재적 작품을 하려면 할 수 없이 대중과는 멀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 설령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재능을 구체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두보가 2020년 서울 강남에 온다면?

 

두보가 2020년 서울 강남에 온다면

 

우선 풍족함과 화려함에 놀랄 것이다. 보리를 심던 밭에는 높은 건물이 하늘을 찌르고 있고, 밤이 되면 달빛이 교교하게 사람 얼굴을 겨우 알아볼 정도로 비추던 하늘에 휘황찬란한 불빛이 사정없이 번쩍거린다. 저녁 해가 질 무렵에 나무 뒤로 드리운 노을이, 배고플 때 반찬 삼아 소반에 내려앉던 그곳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하다. 화면에는 먹고 죽기라도 할 듯이 먹어대고, 맛있는 음식이 넘실대는 먹방 방송이 채널을 돌리는 곳마다 나타난다.

중국에도 강남하면 장강 이남 지역으로 예부터 땅이 비옥하고 농사가 잘되어 굶어 죽는 사람이 없던 곳이다. 큰 강의 남쪽은 살림살이가 넉넉한 법이다. 제비도 강남을 가고, 나도 친구 따라 강남을 간다. 두보는 강남에 도착하자마자 지필묵을 꺼내어


朱門酒肉臭(주문주육취) 붉은 문 안에서는 술과 고기 냄새요,

路有凍死骨(노유동사골) 길에는 얼어 죽은 사람들의 뼈가 구른다.


시 쓰는 일을 제외하고는 생활에는 무능하고 성격마저 괴팍한 두보가 이 땅에 온다면, 소주 한 잔 걸치고는 열심히 뒷골목을 찾아다닐 것이다. 그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한다. “부잣집에서 술과 고기 냄새가 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어딘가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찾아다닌 결과 두보는 본인이 예상한 것과는 다른 반전 사실을 접한다. 곤궁한 생활의 핑계를 사회적 현상에서 찾아서, 자신의 무능력으로부터 도망가려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누에 번데기의 주름과 같은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시를 쓰는 젊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경악한다. 특히 이십 대 젊은 사람들은 시를 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쓰지를 않는다. 2020년 강남은 먹을 것을 자연에서 찾을 수 없다. 돈을 주어야 구할 수 있다. 돈 없으면 목숨 부지가 불가능하다. 생존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니 두보같은 삶을 강요할 수 없다.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아름답게 살아가려면

 

그러나 강남을 아름답게 수놓는 우리 젊은이들이 시를 쓰지 않는 현상은 많이 아프다. 예술보다는 취업에 목을 매는 상황이 뼈를 시리게 한다. 책방에서 가장 팔리지 않는 분야가 시집일 것이다. 80년대 서점가를 휩쓸던 시집은 이제 하루 10권만 팔려도 시 분야 베스트셀러에 등극한다고 한다. 지금은 자기계발서가 판매량 상위권을 점유하고 있다. 현재 그나마 유명하다고 하는 시인들은 거의 40대 이상이다. 우리 20대 젊은이들이 시를 멀리하는 이유가 매우 궁금하다. 그러나 내가 섣불리 이유를 예단하고 싶지는 않다.


간혹 시를 좋아한다는 모임에 가 보면 은퇴한 사람이거나 시간에 여유가 있는 직장에 근무하는 분들이 취미로 참가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대체로 절실하게 매달리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대학에 국문과나 철학과는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 말을 아름답게 빛낼 천재 시인을 애타게 고대하는 마음에서 저세상에 가신 두보를 불러내어 보았다. 한글로 쓰인 노벨문학상은 정녕 불가능한가.


2020년 강남으로 대표되는 시대에서 두보같이 시만 쓰는 생활 무능력자를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우리 한글을 아름답게 가꾸고 국민들의 감성을 정화시켜 줄 시인의 명맥이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엘리트 체육처럼 천재적 재능을 가진 청소년을 일찍 발굴하여 생활 걱정 없이 시를 쓸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시행해야 하지 않을까. 제안하는 바이다.


신경희

이메일 : sty087@naver.com

 

작성 2022.02.11 10:50 수정 2022.02.11 11:16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이정민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