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리군(加須利君)=가실왕(嘉悉王)=중애(仲哀天皇)
『삼국사기』 기록에 남아있는 가야국의 ‘가실왕’은 가야금의 명인 우륵에 관한 기사에 그 이름만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는 시조 수로왕에서부터 마지막 제10대 구형왕까지 가야국을 다스렸던 왕들이 모두 실려있으나 이상하게도 ‘가실왕’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역시 ‘잡지 악(樂)’편에 가야금의 명인 우륵(于勒)과 관련하여 잠깐 언급만 했을 뿐, 그 외에 특별히 따로 기술해 놓은 내용은 없다. 그러므로 차자 표기된 이름을 제대로 분석파악해 내지 않고서는 이들 표기가 동일한 이름을 차자만 다르게 하여 적은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렵고 이들이 동일인이란 사실도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13년(551)조에 진흥왕이 우륵의 가야금 연주를 직접 들었다는 내용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우륵이 가야금을 안고 신라로 망명하기 전 가실왕 밑에 있었던 것은 500년대 초반이었을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가실왕 역시 그 무렵에 실존했던 왕이었을 거라는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여기까지, [가슬/kasur]이란 이름을 가실(嘉悉)이라고도 표기하고 가수리군(加須利君)이라고도 표기했으며, 차자방식을 달리하여 중애(仲哀)라는 한자로 사음훈차하여 표기하기도 했다는 점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이름이 같다고 해서 무조건 동일인일 거라고 단정해서는 안되겠지만 일단 이름이 같다면 동일인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할 것이다.
만약 이들이 동일인물 맞다면 『일본서기』에 나오는 중애천황(仲哀天皇) 역시 활동했던 시기가 500년대 초반이라는 얘기가 된다. 진짜로 그러할까?
『일본서기』에는 중애천황이 192년~200년 사이에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500년대 초반의 실존인물일 수가 있을까? 『일본서기』가 아무리 연대착오를 범하거나 고의날조를 했다 하더라도 설마하니 500년대 초반에 실존했던 인물을 300년이나 끌어올려 200년 무렵에 활동한 것처럼 꾸몄겠는가?
그렇게 의심하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역사를 꽤 많이 공부했다는 사람들일수록 더 그러하다. 자신이 여태껏 믿어온 고정관념을 떨쳐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떨쳐내야 한다. 여태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것들 과감히 떨쳐내고 바로잡아야 한다. 중애천황(仲哀天皇)은 가수리군(加須利君)과 동일한 인물이며 500년대 초반에 실존했던 가실왕(嘉悉王, 嘉實王)과도 동일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름이 같다는 점뿐만 아니라, 월삭간지(月朔干支)를 대조해 봐도 그러하다.
『일본서기』 중에서 중애천황 즉위 원년의 기사 일부를 발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원년 봄 정월 경인삭 경자(11일)에 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
가을 9월 병술삭(1일)에 모황후를 황태후(皇太后)로 높였다. |
겨울 11월 을유삭(1일)에 군신에게 “짐이 아직 약관도 되기 전에 부왕이 이미 죽었다(崩). 신령(神靈) 백조(白鳥)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셨다. 사모하는 마음은 하루도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바라건대, 백조를 잡아서 능역(陵域)의 연못에 기르게 하라. 그리하여 그 새를 보면서 그리는 정을 위로하고자 한다.”고 명하였다. 곧 여러 국(國)에 명하여 백조를 바치도록 하였다. 윤11월 을묘삭 무오(4일)에 월국(越國;코시노쿠니)이 백조 네 마리를 바쳤다. |
원년 봄 정월 경인삭 경자(11일)에 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가을 9월 병술삭(1일)에 모황후를 황태후(皇太后)로 높였다.
겨울 11월 을유삭(1일)에 군신에게 “짐이 아직 약관도 되기 전에 부왕이 이미 죽었다(崩). 신령(神靈) 백조(白鳥)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셨다. 사모하는 마음은 하루도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바라건대, 백조를 잡아서 능역(陵域)의 연못에 기르게 하라. 그리하여 그 새를 보면서 그리는 정을 위로하고자 한다.”고 명하였다. 곧 여러 국(國)에 명하여 백조를 바치도록 하였다.
윤11월 을묘삭 무오(4일)에 월국(越國;코시노쿠니)이 백조 네 마리를 바쳤다.
위 인용문에는 모두 4개의 월삭간지가 등장한다. ‘원년 봄 정월 경인삭’이라는 말은 중애천황 즉위 원년인 192년의 정월이 경인(庚寅)으로 시작한다는 말이다. 즉 192년 정월의 초하루가 경인일(庚寅日)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9월 병술삭’은 그해 9월 초하루가 병술일(丙戌日)이라는 말이며, ‘11월 을유삭’은 11월 초하루가 을유일(乙酉日), ‘윤11월 을묘삭’은 윤11월 초하루가 을묘일(乙卯日)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위 중애천황기의 즉위연도가 진짜라면 실제로 서기 192년의 1월이 경인삭(庚寅朔), 9월이 병술삭(丙戌朔), 11월이 을유삭(乙酉朔), 윤11월이 을묘삭(乙卯朔)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영남대학교 한보식 교수가 펴낸 「中國年曆大典」의 간지표와 대조해 보면 서기 192년의 실제 월삭간지는 1월 경인삭(庚寅朔) 하나만 일치할 뿐, 나머지는 전혀 맞지 않다. 9월은 병진삭(丙辰朔), 11월은 을묘삭(乙卯朔), 그리고 윤11월이 아니라 12월이 이어지는데, 12월은 을묘삭이 아니라 을유삭(乙酉朔)이다. 서기 192년에 윤달이 있기는 하지만 윤11월이 아닌 윤8월이다. 심하게 어긋난다. 따라서 중애천황이 즉위한 해가 서기 192년이라 하는 것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주장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1월 경인삭, 9월 병술삭, 11월 을유삭, 윤11월 을묘삭인 해를 찾기는 대단히 어렵다. 기원전 1384년부터 서기 2002년까지 6백 갑자의 연도 중에서 이 4개의 월삭간지가 정확히 일치하는 해는 없으며, 그나마 가장 근사하게 일치한다고 할 수 있는 해는 바로 서기 533년이다.
533년의 1월이 경인삭, 9월 병술삭, 11월 을유삭, 그리고 12월이 을묘삭이다. 『일본서기』 중애천황기에는 ‘윤11월 을묘삭’으로 되어 있지만 서기 533년에는 윤달이 없고 12월이 을묘삭이다. 어쨌거나 이 정도로 월삭간지가 거의 정확히 일치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다시 말해, 중애천황기에 기록되어 있는 월삭간지들이 가리키는 연도는 서기 192년이 아니라 서기 533년이라는 얘기다.
◆『일본서기』의 월삭간지 → 중애천황의 즉위연도는 533년
뿐만이 아니다. 이듬해인 중애2년의 월삭간지도 그러하고 중애8년과 중애9년, 그리고 그가 사망한 후 왕비인 신공황후 섭정기로 이어지는 월삭간지들도 모두 그러하다.
중애천황기는 192년~200년이 아닌 533년~540년의 월삭간지와 일치하며, 이어지는 신공황후의 활동시기 역시 다음 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단 하루 혹은 한두 달의 오차만 있을 뿐 대체로 541년~569년의 월삭간지와 일치한다. 신공기는 중애기에 비해 오류 혹은 의도적인 왜곡이 많은 것으로 추측되고, 표에서 추정한 실제연월이 정확한 것은 아니란 점 미리 밝혀둔다.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crazychop@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