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리아의 시간여행

2. 그리움은 사랑의 빈자리

수에나

2. 그리움은 사랑의 빈자리

 

리아의 비행선 내부는 요술 공간이다. 분명 방 한 칸이었는데 요술 부리듯 두 개의 투명 벽이 만들어지고 각각 다른 용도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유리는 아닌데 그렇다고 비닐도 아니다. 투명한데도 각 공간의 내부가 보이지 않아 신비롭다. 내가 있던 곳은 세 번 째 방이라고 한다. 리아는 나를 데리고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주연아. 내가 소개할 분이 있어. 비행선 운행을 해 주시는 분야.”

여기에 너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었어?”

 

나는 리아 뿐인 곳이라 생각했었다. 갑자기 내 앞에 남자가 나타났다. 내가 멈칫하자 그분이 두 손을 들어 흔들며 반겼다. 나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언뜻 보기에 50대는 되어 보이니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남자는 내 인사가 불편했는지 손을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리아를 보고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리아가 나에게 말했다.

 

주연아, 나의 비행선에 탑승한 사람들은 모두 친구야. 이건 나의 세상이고 내가 정한 규칙이야. 캡틴 다랑이 하는 역할이 다를 뿐, 지구여행에서는 친구야. 캡틴 다랑도 이렇게 하길 원해. 그래야 동등한 입장에서 편하게 지구여행을 할 수 있거든.” 캡틴 다랑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좀 어색해서 리아에게 말했다.

 

난 아직 적응이 잘 안돼. 나이가 많으신 분인데 어떻게 친구를 해.”

그럴 거야. 점차 친구 사이가 얼마나 편한 건지 알게 될 거야. 캡틴 다랑도 널 친구로 대할 거니까. 캡틴은 라임에서 유명한 장군이야. 전쟁에서 성대를 다치셔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됐어. 지금은 라임에서 지구로 왕복하는 비행선을 관리하시지. 후임들을 위해 계속 현역으로 근무하는 거야.”

, 그래서 말씀이 없으셨구나. 많이 고생하셨겠어. 그곳에서도 전쟁이 있어?”

, 행성 마다 추구하는 가치의 차이도 있고 경쟁하는 관계라서 종종 전쟁이 벌어져. 평화로운 관계를 맺은 행성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행성도 적지 않아. 태양계 밖도 조용하지만은 않아. 지구에도 여러 나라가 서로 얽혀 있는 것처럼 행성끼리의 관계도 그래.”

 

리아는 내가 탄 비행선도 전쟁이 발생하면 바로 투입된다고 했다. 전쟁 상황에서는 리아가 직접 운행을 한다고 한다. 지금도 무장이 완벽한 상태라는 게 조금 무서웠다. 지구 여행이 끝나면 리아는 언제든지 전투에 임하는 용사가 된다. 리아가 용감해 보였다. 이제 리아의 당당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겠다. 리아는 나와 너무 다르다. 나도 리아의 이런 당당함을 갖고 싶어졌다.

 

리아와 캡틴이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비행선을 돌아본다. 흰 벽면에 엷은 은색으로 직선과 원형의 도형이 그려져 있다. 넓은 사각형과 원형도 있는데 그곳에는 아무런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선 외부가 보이지도 않는데도 어떻게 알고 날아다니는지 신기하다. 게다가 무장된 비행선이란 게 믿기지 않는다. 리아와 캡틴의 대화가 끝나자 내게 말했다.

 

주연아, 드디어 첫 여행을 시작할 때가 됐어.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여기에 앉아만 있으면 돼.”

 

리아가 나를 의자에 앉혔다. 내가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정말 과거로 가는 거야? 어떻게?”

 

맞아, 과거로 가는 거야. 비행선이 달이 자전하는 반대방향으로 돌아 다시 지구로 내려오면 우리가 만날 사람이 있는 곳에 도착할거야. 나도 실제로는 처음이지만 시뮬레이션을 해 보니 아주 빠르고 편했어.

언제로 가는 거야? 만날 사람은 누군데?”

모르고 가는 게 좋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거야. 만나서 누군지 알아도 되고 몰라도 돼. 이건 선입견 없는 여행을 위해서야. 나도 대략적인 것 외엔 아는 것이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심호흡을 했다. 긴장되고 떨리는 시간이다. 리아가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리아도 의자에 앉았다. 캡틴은 허공의 스크린을 조작하는지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곧이어 우리를 바라보며 엄지를 치켜 세웠다. 리아가 눈을 감으라고 했다.

 

리아와 땅을 밟았다. 맨흙으로 된 언덕길이다. 나무판자로 지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언덕이었다. 이곳이 어디이고 어느 때인지 궁금하다. 분위기로 봐서는 빈민들이 사는 마을 같다. 남루한 차림의 어린아이가 우리 곁으로 오더니 시커먼 때가 묻은 손을 벌렸다. 무얼 달라는 거였다. 하지만 내겐 어린아이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리아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우리가 빈손일걸 알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언덕 위에 앉아 있는 사람과 얼굴이 마주쳤다.

 

저분이구나. 올라가자.” 리아가 우리를 바라보던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도 뒤따라 언덕길을 올라갔다.

골목이 복잡한데 제대로 찾아오는구나.”

 

그가 앉은 채로 말했다. 과거로 가면 만나기로 한 분들과 이미 약속이 되어 있다고 하더니 우리를 자연스럽게 맞이했다

 

혹 저희를 기다리셨어요?” 리아가 물었다.

아니, 기다리지는 않았어. 그냥 앉아 바다를 보고 있었지. 여기가 내 자리거든.”

바다요? 그러네요. 바다가 잘 보이는 동네예요. 바다를 좋아하시는가 봐요.”

 

리아가 말하며 바다로 얼굴을 돌린다. 나도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잔잔한 바다 위에 크고 작은 배들이 떠 있었다. 검푸른 빛깔이 반듯한 자세로 펼쳐져 있었다.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이 맑았다. 바다와 하늘은 형제 같다. 크고 넓고 푸른 것이 닮았다. 잠깐 동안 아무 말 없이 바다를 응시하던 아저씨가 말했다.

 

아무 얘기나 듣고 싶어 온다고 했으니 나도 생각 나는 대로 말하지. 작년의 바다는 내게 큰 행복을 주었어. 물이란 게 공기랑 같잖아.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도 한 공기 속이고 물속에 같이 들어가도 한 물 속이고.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해 준 바다가 좋았지. 아이들이랑 물장구 치며 놀 땐 세상 근심거리 하나 없었어. 물 속에 뛰어들어 놀다가 돌 틈 사이 게를 잡는 것도 재미있었지. 바위틈을 누비는 게는 엄청 빠르거든. 쉽게 잡히질 않으니 더 재미가 있었던 거지. 내가 가족들과 함께 있어서 바다가 더 좋았던 거야. 내게는 그런 시간들이 많지 않았어. 그러니 하나하나 그 모든 순간들이 내겐 다시 얻을 수 없는 기쁨이었지. 내 모든 걸 다 걸어도 될 만큼 사랑하는 아이들이랑 함께 했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 아저씨는 바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처음 보는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지금은 같이 있지 않으세요?” 리아가 묻자 아저씨가 말했다.

저 바다 건너에 내 사랑들이 있어. 그 땐 그리도 작았던 바다가 이렇게 큰 바다가 되어버렸네. 바다가 너무 넓어졌어. 내가 헤엄을 칠 수도, 뗏목을 타고 건너갈 수도 없을 만큼 넓어졌어. 바다가 무섭도록 커지고 말았어. 아니, 이건 핑계겠지. 바다가 움직인 적은 없으니까. 그저 내가 못난 탓이야. 마지 못해 떠나 보내야 했으니까.” 아저씨의 말을 듣고 내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가족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시면 되잖아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요.” 아저씨가 나를 바라봤다. 아저씨는 미소를 띠었다.

내 꼴을 한 번 봐. 남에게 얻어 입은 군복에 저 판자집 구석에 겨우 의탁하고 있는 중이야. 사정도 이렇고 어차피 지금은 바다 건널 배편도 없어. 갈 수 있다면 백 번도 더 갔을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봤지. 그래도 뾰족한 방법은 없었어. 돈 좀 벌어보려고 푼 돈이라도 생기면 종이를 사서 그림을 그렸어. 내다 팔면 될 거 같았거든. 그런데 이 시국에 그림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먹고 살기에도 등골이 휘는데. 다행히 친구 덕에 종군화가가 되었으니 삽화를 그리면 앞으로는 끼니 걱정은 안 하겠지. 내 처지에 그나마 다행인 거야.”

 

리아는 나와 아저씨를 번갈아 보면서 마른 침을 삼킨다. 아저씨가 말을 이어갔다.

 

내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은 가족 뿐이야. 내 사랑스런 덕이, 두 자식을 가슴에 품고 있지. 나는 열심히 그림을 그릴 거야. 이것이야 말로 나의 그리움을 풀어 줄 유일한 방법이야. 당장에야 돈은 안되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정식으로 전시회를 열고 내 그림을 보여주면 그림을 이해해 줄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믿어. 그럼 여유가 생길 거야. 나는 요즘 더 처절하게 나의 사랑을 생각하고 울부짖고 있어. 매일 울어도 울음이 계속 나오는 걸 보면 나는 더 울어야 하는 가봐. 눈물이 아직 덜 말랐으니 말이야. 너무 보고 싶어서 가슴이 아릴 땐 잠도 못 이뤄. 온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게 식구들 얼굴이야. 다음에 기회가 되어 함께 산다면 가족이 내 삶의 목적이었다고 말할 거야. 내가 사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은 그림으로 모두 풀어내고 싶어. 어제도 편지를 썼어. 서귀포 바닷가에서 애들이 물놀이 하던 게 생각나서 그림으로도 그려서 보냈지. 편지 쓰다 그리고 그리다가 편지를 쓰고 있지. 종이가 젖으면 젖는 대로 하구. 내가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 오직 바라는 건 하루 속히 가족이 모여 함께 사는 거야. 그곳이 어디가 되든 간에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아저씨는 가족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의 부모님도 이랬을까? 나를 보고 싶어하고 사랑해 줬을까? 나는 언제부터 혼자였을까? 나는 엄마, 아빠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없다. 아주 작은 조각 같은 기억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아저씨는 아름다운 사랑을 하셨나 봐요. 부인과 아이들이 퍽 행복했겠어요. 사랑을 많이 주셨을 테니까요.” 리아가 말했다.

 

함께 할 땐 물론 둘 다 행복했지. 옛날로 돌아가자면, 난 사랑하는 사람을 타국에서 만났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 거지. 우린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마냥 애인한테 신세 지면서 살 순 없었어. 난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고 덕이는 잘 사는 집안 외동딸이었어. 나는 성공해서 덕이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지. 스스로의 힘으로 아껴주고 싶었거든. 그런데 막상 고국으로 돌아오니 쉬운 게 아니었어. 내내 가난했지. 그 때 덕이가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나 있는 곳으로 달려왔어. 내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몰라. 다시 만나 살면서 생애 가장 달콤한 시간을 보냈지. 아이가 둘이나 태어나고 나니까 우리의 사랑이 열매를 맺는구나 했었지. 그런데 이런 전쟁이 터지고 나서 우리는 살기 위해 이별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어.”

 

그런 분과 다시 이별을 하신 거 군요. 아이들도 아빠가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갑자기 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리아가 말했다.

 

그렇겠지.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헤어졌으니 내 마음이 괴롭지. 아빠를 다시 만날 때 까지 잘 자라달라고 편지에 쓰곤 해. 돌아가서 나은 생활은 하겠지만 건강도 걱정 돼. 덕이가 여기 있을 때 많이 아팠어. 너무 못 먹어서 그랬어. 애들도 그랬지만 난 덕이 아픈 것이 그리도 괴로웠어. 여기 있다간 넷이 다 죽겠더라. 마지못해 보내야만 했었지. 다시 바다 건너로 돌려보내는 기회를 잡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어.”

 

아저씨는 성냥불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입에서 후욱 뿜어져 나왔다. 아저씨가 인상을 쓰자 눈가에 잔주름이 더 깊어져 보인다. 나는 과거로 왔다는 것을 잊었다. 과거로 왔다는 것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아저씨가 누군지 모르지만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나는 리아에게 속삭였다.

 

리아야, 이분 누군지 알지? 미래에 어떻게 될 거라고 말해 주면 안돼? 위로가 되는 말을 해드리고 싶어.”

 

어떤 분인지 알지만 말해드릴 수가 없어. 안타깝지만 저 분은 앞으로 가족을 만날 기회가 없어. 나도 마음이 아프지만 미래가 그래. 우리가 사람들의 미래를 바꿀 수 없으니까 말 할 수 없는 거야.”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가족이 없어서 아저씨의 상심이 내 일처럼 와 닿았는데 가족을 만나지 못한다니 가슴이 저렸다. 더군다나 아저씨는 가족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 나도 아저씨처럼 가족을 만날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찢어진 듯 갈라져 만날 수 없는 가족이라면 이런 운명은 너무 싫다. 슬픔이 밀려 온다.

 

아저씨는 몇 번이나 바다에 눈길을 돌렸다. 그럴 때 마다 나도 바다를 보았다. 나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 아빠, 엄마의 사랑도 모른다. 솔직히 사랑이 무언지 모르겠다. 사랑이 괴로움은 아닐 텐데 괴로운 상태의 아저씨를 보니 더 혼란스럽다. 내게는 그리움에 대한 갈망이 크다. 내가 간직하지 못한 부모님에 대한 생각으로 막연한 그리움만 있기 때문이다. 아저씨도 사랑하는 가족을 그리워 하기에 물어보았다.

 

아저씨, 사랑하고 그리움이 차이가 있나요?”

 

사랑과 그리움? , 내 생각은 이래. 사랑은 같이 있을 때가 사랑이고, 그리움은 같이 있지 못할 때의 사랑 아닐까?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함께 있고 싶은 것에서 시작해. 사랑은 은근히 욕심쟁이라 소유욕도 생기게 만들거든. 보고 또 봐도 좋고 잘 해 주고 싶고, 가진 모든 걸 주고 싶어하는데 함께 하지 못한다면 자연스레 그리움이 생기게 되지. 나도 내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리움만 쌓이는구나. 학생은 왜 이걸 물은 거야?”

 

저는 고아예요. 부모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요. 어떤 땐 궁금하고 그리워서 여쭤 본 거예요.”

 

, 저런. 그랬구나. 난 너희들 행색이 좋아서 어느 귀한 댁 자제라고만 여겼지. 너도 아픔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너도 많이 외로운 사람이구나. 부모님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셨을 거야. 부모는 자식과 목숨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란다. 언젠가 만날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네가 나중을 위해서 너 자신을 아끼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그걸 기대하고 지냈으면 좋겠구나. 그리움을 사랑으로 채우는 날을 위해서 말이야.”

 

저는 버려졌다고만 여겨왔어요. 누구도 제 곁에 남아주지 않았어요. 그간 살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많았거든요. 아저씨처럼 기다림이 사랑이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어요.”

 

사랑을 위한 기다림은 고통스럽지. 그 고통 속에서 힘 나게 하는 게 또한 사랑 아니겠니? 내가 힘들어도 버티는 이유는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야. 그러니 너도 혼자라는 고독을 벗어날 수 있다면 좋겠구나. 옆에 친구도 있잖니?”

 

아저씨의 희망 섞인 말이 씁쓸하게 들렸다. 나는 이미 무디어진 감정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사실, 기다림이나 사랑, 이런 게 와 닿지는 않았다. 길지 않은 생을 끝내려고도 했는데 나에게 희망은 무슨 말인가? 그런데 아저씨는 희망을 가지고 슬픔을 이겨내려고 한다. 더 이상 가족을 만날 수 없는 미래 뿐인데 아저씨는 기대를 품고 있다. 자신의 미래를 모른다는 것이 다행인가? 아저씨가 안쓰럽다.

 

전쟁만 없었더라면 가족과 행복했을 텐데 안타까워요. 아저씨는 폭풍 속에 놓여진 모습이에요. 아저씨가 그리는 그림은 분명히 사랑 받을 거에요. 많은 사람들로부터요.”

 

리아도 아저씨의 말을 들으며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리아의 말에 아저씨가 웃었다.

 

허허, 젊은 학생이 날 위로하는군. 고맙네. 내가 타국에서 덕이와 사랑에 빠졌을 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지. 참고로 덕이는 내 아내일세. 인간은 사랑을 할 때에야 가장 진실되고 아름다운 인간적인 면을 갖추게 된다는 걸 알았지. 사랑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약이야. 사람이 사랑을 하지 않으면 덜 여문 과일이나 마찬가지지. 사랑은 한 인간이 가진 온갖 감정의 샘을 다 퍼내도 마르지 않은 위대함이 있어. 그 샘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거야.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가지고 있는 샘이지. 나 역시 덕이가 내가 가지고 있던 사랑의 샘을 알게 해 준거야. 나는 그림을 공부할 때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 보고자 했고 복받치는 감정을 화폭에 담아내려고 했었지. 그게 다 사랑의 힘에서 나온다는 걸 알았어. 요즘은 아이들 그림을 많이 그리고 있어. 가족은 내 생명이고 그림의 전부야. 그래서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속히 사랑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네.”

 

아저씨의 표정이 조금 더 밝아졌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아저씨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는 아저씨 앞에서 봉투에 담긴 물감과 붓을 꺼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그가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뜨자 아저씨가 말했다.

 

전쟁 통이다 보니 물자가 귀해서 물감이 아주 비싸. 전에 사 놓은 걸 아껴 쓰고 있지. 물감 한 방울이 수제비 한 그릇 값은 할거야. 허허허.”

정말 그렇겠어요. 다들 생활이 힘들 때인데 아저씨는 재료까지 구하셔야 하니 너무 어려우시겠어요.” 리아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다른 재료도 찾아보고 있는 중이지. 천에다 스케치도 좀 해 보고.”

 

아저씨가 말하면서 내가 입은 옷을 바라본다. 햇빛에 비친 은색 천에 반짝거림이 있어 눈에 띄긴 한다. 주름진 곳은 갈색이 보였다.

 

이 옷감 수입품인가 보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옷감이야. 이런 데에는 그림을 그려도 괜찮겠어. 예전엔 비단옷에 사군자를 많이 쳤었지.” 아저씨의 말에 리아가 대답했다.

, 그래도 될 거예요. 제가 이 옷을 드릴게요. 그림 그릴 때 쓰세요.” 리아가 겉옷을 벗으려 하자 아저씨가 화들짝 놀라며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아무리 가난해도 그렇지. 어떻게 학생 교복을 뺏어. 어림없는 소리야. 내 옷도 있고 천지에 널린 게 그림 그릴 데야. 땅바닥에 해도 되는 거고.”

 

아저씨는 리아의 행동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한숨까지 쉬었다. 리아는 괜찮다고 했지만 아저씨는 리아를 말렸다. 나도 리아의 행동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학생, 이 담배갑에 그려도 되고 종이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 걱정 마. 원 세상에. 학생 참 대단하군. 교복을 다 벗어줄 생각을 하고.”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들고 말했다. 담배갑은 한 손에 움켜쥐어 구겨지고 말았다. 작은 소동이 마무리되자 리아가 아저씨에게 말했다.

 

아저씨, 그 담배갑 속지가 은박이 되어 있네요.”

, 담배 종이가 은박으로 되어 있지.”

 

아저씨는 담배갑을 펼쳐 속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얇은 은박지를 펴니 엽서 크기 정도가 되었다. 은박지는 구겨진 대로 주름이 가 있어서 그림처럼 보였다.

 

이것도 쓸만하군. 오늘 새로운 종이를 찾았네. 하하하.“

 

아저씨가 통쾌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 웃음 중 제일 큰 웃음이었다. 아저씨는 벌써 무얼 그릴지 상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담배를 감쌌던 은박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용도로 변할 것이다.

 

바다는 내내 고요하고 푸르렀다. 아저씨는 언덕 위 판자집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우리는 언덕을 내려오며 바다를 응시하는 아저씨를 몇 번이나 돌아봤다. 나는 아저씨가 좌절하지 않기를 계속 빌었다. 그리고 생이 다하는 날 까지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기를 바랬다.

 

제발요. 아저씨.!’

 

 

[수에나]

한국, 미국, 독일 20여 회 개인전

60여 회 그룹 전시 활동

미네소타 뉴욕 밀스 아트 리트릿 레지던시 활동

자하 갤러리 공모 전시 심사위원 역임

수에나 www.suena.creatorlink.net

 

 

작성 2022.03.10 11:15 수정 2022.03.10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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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