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리아의 시간여행

3. 별이 된 남자

비행선으로 돌아왔다. 역시 눈 깜빡 사이에 이루어진 이동이었다. 아저씨를 만난 여운이 그대로 남아 과거로의 여행이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되레 찹찹한 심정이었다. 내 표정을 보고 리아가 말을 걸었다.

 

너무 마음 아프게만 생각하지 마. 나도 아저씨를 만나고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 하지만 그 분의 인생이 아팠더라도 누구에게는 위로와 용기가 되고 있어. 오직 아저씨만 가능한 방법으로 말이야. 우리가 앞으로 만날 분들은 이미 하늘의 별이 되어 세상을 비추고 있어. 하늘의 별 속에 있을 아저씨 모습을 상상해 보니 아저씨는 슬픔을 지우고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어.”

 

그렇긴 해. 아저씨의 삶을 통해 의미 있는 작품을 남기셨으니까. 아까 만난 분 이중섭화가야. 맞지?”

맞아. 가족에 대한 사랑을 예술로 승화 시킨 훌륭한 분이셔.”

 

내가 만난 분은 책에서나 보았던 분이셨다. 내가 그런 분의 숨 소리를 듣고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니 실로 대단한 일이다. 더군다나 그 분의 가족애를 직접 들어 봤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일인가?. 아저씨의 외로움에만 초점을 두는 것도 옳지 않다. 리아가 말한 대로 아저씨는 별이 되신 분이다.

 

주연아. 곧 화가 한 분을 더 만나러 갈 거야.” 리아가 말했다.

그래? 나 서서히 적응해 나갈 것 같아. 이 여행 정말 보람 있어.”

 

진심이었다. 이 여행은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다. 내가 미소를 짓자 캡킨 다랑도 웃어 보인다. 나는 비로소 우리가 한 팀이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캡틴은 우리를 위해 음료를 준비했고 다음 여행을 위해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두 번째 여행을 출발한다는 캡틴의 신호를 받고 눈을 감았다. 잠깐동안 몸이 부웅 뜨는 것 같더니 발이 바닥이 닿았다. 처음 보다는 몇 초 정도 더 걸린 것 같았다. 우리는 내부가 보이는 철제 대문 앞에 도착했다. 대문 안으로 돌길이 있고 큰 키의 나무와 꽃밭이 조금 보였다. 리아가 대문을 밀어보았는데 닫혀 있어 움직이지 않았다. 리아는 내게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손짓을 했다. 잠시 후 수녀 한 분이 오시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우리는 수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수녀원인가보다. 돌길을 따라 걸어가니 담쟁이덩굴로 덮인 건물이 나타났다. 수녀를 보니 외국인이라 이곳에서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여긴 어느 나라야? 나 외국어 못해. 알아듣지도 못하고.”

괜찮아. 여긴 지구야. 다 알아듣고 말 할 수 있으니 안심해도 돼.”

 

나는 외국어를 못하는데 리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리아는 나와 말이 통하니까 대신 통역해 주겠지하며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수녀의 안내로 2층 복도를 걸어 어느 방문 앞에 섰다. 수녀가 노크를 하자 안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이 열리는데 푸른 눈의 짧은 머리 남자다. 리아와 나는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우리에게 의자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고 자신은 철제 침대에 걸 터 앉았다. 방안에는 알 수 없는 냄새가 풍겨온다. 그는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너희들은 내가 무섭지 않아?”

아니요. 무서웠더라면 오려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 리아가 대답하자 남자가 말했다.

나는 미친놈이야. 사람들이 나더러 미쳤다고 해. 내가 살던 곳에서 수십 명이 날 마을에서 쫓아내려고 난리를 피웠어. 그 뒤에 내 집이 폐쇄되기도 했지. 난 정신병자인 거야. 여긴 정신병원이고. 그런데 이상하게 여기로 온 뒤에 맘이 편해졌어. 그러니 나는 미친 게 분명하지.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이런 나를 만나겠다고 찾아온 거지?”

 

남자는 다소 흥분된 상태로 말을 하다가 멈췄다. 그의 말은 내가 쓰는 언어와 같았다. 정확하게 그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리아가 말한 지구의 언어가 이것인가?

 

아저씨가 미쳤다면 저런 그림은 어떻게 그리죠? 맨 정신이니까 붓도 잡고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거죠. 나는 아저씨가 아주 괜찮은 분이라고 알고 있어요.”

별난 아가씨군. 다들 날 피하려고 하는데. 허허허.”

 

벽면에 해바라기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리아는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고 아저씨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여기에 들어오고 나니까 세상이 조용해진 것 같아.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날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어졌어. 내 앞에서 전부 안개처럼 사라진 거지. 난 이 정신병원이 천국이야. 사람들이 억지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했을 때 난 펄쩍 뛰었어. 대체 왜 이렇게 못살게 구냐고 신경질을 엄청 부려댔지. 성난 황소처럼 화가 났었거든. 여기서는 아무도 날 괴롭히지 않아. 나에게는 제일 좋은 곳이야. ”

 

우리가 온 곳이 정신병원이라니 정말 의외다. 나는 수녀원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리고 남자는 계속 여기가 좋다고 말한다.

 

참 다행입니다. 여기서 안정을 취하실 수 있다면 바깥 어느 곳 보다 좋은 장소인 거죠. 여기 정원도 꽤 좋던데요. 숲도 있고 꽃 들도 많고요. 그런 것들이 그림 작업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아저씨에게는 마음의 안정에는 좋을 것 같아요.”

 

리아는 말하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저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화가에게 이상적인 곳이야. 산책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작업도 몰두할 수 있지. 빈 방도 많아서 다른 화가들도 여기로 와서 그림을 그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 하지만 다른 작가는 오지 않을 거야. 정신병원에서 그림을 그리자고 하면 웃겠지. 역시 너는 미쳤구나 하고 말이야. 그래서 더 이상 생각하진 않아. 아쉽긴 하지만.”

 

그럴 거예요. 아저씨와 다르게 생각하니 이곳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거예요. 이곳은 아저씨에게 천국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렇지 않은 거죠.”

 

리아의 말을 듣고 아저씨가 말했다.

 

내가 여기에 스스로 걸어 들어오기 전에 친구와 다툰 일이 있었어. 나는 친구에게 내 마음을 다 주었지. 내가 그 친구를 엄청 좋아했거든. 그 친구와 함께 한 집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 나는 무척 기뻐서 해바라기 그림을 한 점 그려 그가 묵을 방에 장식도 해 두었지. 해바라기를 그리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열심히 그렸는지 몰라. 친구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거든. 친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하고 싶었어. 해바라기를 그린 것도 그를 맞이하는 열정적인 나의 마음이었지. 반면 친구는 내 생각과는 달랐어. 아주 많이 달랐지. 나는 자연의 위대함을 화폭에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어. 자연은 경이롭거든. 나는 지금도 나무, , 하늘이 예뻐.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경이롭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지. 그 친구는 자연을 그리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어. 처음부터 어긋날 사이였던 걸 전혀 몰랐어.”

 

내가 듣기에 아저씨의 상태는 아주 정상적이었다. 친구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을 잘 했다. 무엇 때문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자연을 저토록 예찬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아저씨가 혹시 그 유명한 고흐가 아닌지 궁금했다. 머리를 둘러 싼 붕대를 봐도 고흐 같았기 때문이다.

 

아저씨 이름이 고흐 맞아요?” 내가 대뜸 물었다.

내 이름도 모르고 여길 찾아왔단 말이야?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온거야?”

 

아저씨가 두 눈을 치켜 떴다. 리아가 사이에 끼어들어 말했다.

 

제 친구는 화가님 이름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예요. 제가 같이 오자고 하면서 성함을 말해주지 않았거든요.”

그랬군. 그럼 아가씨는 날 알고 찾아온 게 맞아?”

. 맞아요. 고흐 작가님.”

 

고흐가 맞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그의 작품을 보면 누가 작가인지 금방 알아차릴 정도로 유명한 화가다. 내가 아는 고흐는 너무 불행했고 짧은 인생을 스스로 마감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만나는 이 순간의 고흐 아저씨는 정신병원 생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그나마 내 마음이 놓였다.

 

고흐 아저씨가 앉아 있는 철제 침대에서 삐걱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좀 더 안 쪽으로 들어 앉으며 난간을 잡았다.

 

이 쇠 침대가 좀 오래 되었나 봐. 가끔 이래. 아가씨가 앉아 있는 나무 의자 봐. 튼튼하지? 그거 전나무로 만든 의자야. 내가 12개를 샀는데 그 중 하나야. 그 의자가 그림 모델이 몇 번 되었었지.”

의자를 왜 그렇게 많이 사셨어요?” 내가 의자를 만지며 물었다.

 

의자에 앉을 사람이 정해져 있지 않아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이건 초청받을 사람을 위한 나의 존중이라고 생각하거든. 평소에 빈 의자라도 누군가 앉아 있다고 믿어. 내가 소망했던 것은 화가들의 모임이 활성화되어 스스로 자립해 나갈 화가 공동체 같은 거였어. 의자는 그에 대한 준비였지.”

 

아저씨와 다투었다는 사람에게도 마음을 다 주었다고 했는데 서로 방향이 맞지 않아 고생하셨겠어요. 그 친구분이 첫 번째로 초대하신 분이셨죠? 좋은 방향으로 서로 화합할 수는 없었어요? 남을 위해 의자도 준비해 두는 자세라면 어느 정도는 양보하고 원만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리아가 물었다.

 

그 친구를 위해 샀던 의자는 특별했지. 팔걸이가 있는 멋지고 고급스러운 의자였어. 내가 살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비싼 거였지. 내 의자는 보다시피 지극히 평범한 거야. 난 친구와 가장 이상적인 예술세계를 함께 할 거라고 기대를 했었거든. 그래서 의자 살 때도 신경을 아주 많이 썼어. 그런데 한 집에 지내면서 트러블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친구 입장을 고려하는데 이 친구는 그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그래도 화해하고 발전적으로 관계를 이끌어 나가려고 여행도 갔었는데 또 한 번 대판 싸우는 바람에 오히려 관계가 더 틀어졌지. 돌이켜 보면 이게 다 내 잘못인 거야. 나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함께 하려고 했다면 친구는 나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교우 관계를 가지려 했던 것 같아. 그러니 친구가 나한테 질렸겠지. 난 그런 게 아니라 진심을 다했을 뿐이거든.”

 

고흐 아저씨는 친구와의 지난 날이 떠 오르는지 고개를 떨구었다. 누구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서로의 이상이 맞지 않는 사람끼리의 동행이 문제였다. 고흐 아저씨가 친구 얘기로 골치 아파하자 리아는 화제를 돌리려고 다른 얘기를 꺼냈다.

 

작가님 작품은 주로 어떤 내용을 다루어요? 현실적인 내용을 그린 작품 중에 [감자 먹는 사람들]을 알고 있거든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으세요?”

 

“[감자 먹는 사람들]은 농민 화가가 되려고 그렸던 그림 중 하나야. 컴컴한 집에서 사람들이 모여 감자와 차를 마시는 장면을 그렸어.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양식을 먹는다는 것으로 삶의 진실함을 표현하고 싶었어. 내가 많이 그려 온 것은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야. 내가 성직자가 되려고 했던 것도 사람들의 고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하나님만이 우리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는 분이야. 사랑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의 거리는 가까워질 거야. 그래서 화가의 예술은 진실한 사랑의 표현이어야 해.”

성직자도 되려고 하셨군요. 의외에요. 지금은 화가가 되셨으니 예술가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시겠어요.” 리아가 말했다.

신학교도 다녔었고 탄광에서 설교도 했었어. 세상의 부조리가 눈에 띌 때마다 분노가 올라오더라. 나는 약자 편에서 하나님을 불렀지. 가난한 노동자와 함께 지내는 건 또 다른 고통이기도 했었어. 그럴수록 나는 사명감에 사로잡히곤 했었어. 탄광촌에서 목탄으로 사람을 그리면서 미술에 더 흥미가 생겼어. 원래가 그림에도 관심 있어서 나중에는 그들을 위한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했지.”

그렇게 살아 온 적이 있으셨군요.”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흐 아저씨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말했다.

 

자연 역시 사람과 같은 하나님의 작품이지. 나는 여기서 자연에 대한 관찰을 깊이 있게 하려고 해. 전부터 늘 그려왔지만 자연물 속에도 사랑이 있다고 믿거든. 이 침대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면 무수히 떠 있는 별들이 보여. 별은 내 꿈을 보여주고 있는 거야. 어젯밤에도 가슴으로 스케치를 수없이 했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은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아저씨는 그동안 사연 많은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움푹패인 볼과 까칠한 수염은 삶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두 눈은 생기가 넘친다. 무슨 일이든 해낼 만한 눈빛이었고 힘이 있는 눈이다. 그러나 얼굴의 표정은 그늘진 것이 역력했다. 순간적으로 어렸을 적 고아원 원장님이 내게 소리치던 기억이 떠올랐다.

 

눈 치켜 뜨고 어딜 봐! 뭘 잘 했다고. 어린 것이 못 됐어!’

 

나는 왜 혼나는지 몰랐지만 바짝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시점부터 고아원의 외톨이에다 미운털이었다. 무척 소심했던 나에게 세상은 거칠었다. 나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고민을 하기도 전에 머리는 굳어지고 심장은 오그라들어 버렸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떻게 고아원에서 살았는지 아찔하다. 중학교 때에도 거의 혼자였기 때문에 미술 과목을 좋아했다. 그때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고흐의 [자화상]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지금 내 앞에 앉아 말을 하고 있는 얼굴과 그림의 자화상이 똑 닮아있다. 리아는 고흐 아저씨와 대화를 이어갔다.

 

창이 있어서 바로 하늘이 보이네요. 아래로는 마을도 내려다보이고 전망이 좋아요. 작가님에게는 이런 한적한 곳이 작업하기엔 좋을 수도 있겠어요.”

지금은 확실히 그래. 난 지친 것도 사실이거든. 내가 사람들에게 뭔가를 요구했는지도 모르겠어.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는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려고 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내가 당한 실연을 다른 곳에서 위로 받고 싶어했을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한 여자들은 모두 내 곁을 떠났지. 화가 친구인 고갱도 날 경멸하며 떠났어. 난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말썽이 일어난 것 같아. 어린 시절부터 그랬지.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으니까. 애들이 바글대는 기숙사 생활이 너무 싫었거든. 3~4년 전에 벨기에 미술학교에 등록했는데 몇 달 만에 퇴학당한 적도 있어. 나는 진실하게 살고 싶은데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네. 정신병원까지 오고 말이야. 내게 유일한 힘이 되는 사람은 동생뿐이야. 동생만이 나를 이해해 주고 있어. 내 생활비 전부를 대주고 있으니 미안한 맘도 커. 내가 동생에게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좋은 그림을 많이 그려서 동생이 운영하는 갤러리에 보내는 거야. 아까 잠깐 얘기하다 말았는데 여기선 밤하늘의 풍경을 그리려고 해. 보이는 풍경도 그리고 내가 보아왔던 풍경, 그리고 내 가슴 속의 풍경을 그리려고 해. 동생에게도 편지를 썼어. 여기 오고 나서 그림에 더 집중할 수 있어서 오길 잘했다고.”

아직 밤하늘을 그린 건 없어요? 있으면 작품을 보고 싶어요.”

 

리아의 말에 나도 공감했다. 진짜 별을 그린 그림이 보고 싶었다. 병실에 있던 그림은 의자였다. 의자 그림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럼 옆 방으로 가자. 막 시작한 그림이지만 보여줄게.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흐 아저씨는 허리가 아팠는지 맨주먹으로 허리를 몇 번 두드렸다. 고흐 아저씨를 따라 옆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의자가 두 개 더 있었고 이젤과 작은 책상이 있었다. 책상에는 물감과 붓들이 널려져 있었고 벽면에는 캔버스가 포개져 있었다. 이젤 위에는 그리다 만 그림이 있는데 붓 자국이 무척 자유분방해서 낙서처럼 보였다.

 

, 이 그림 어때? 별이 빛나는 밤의 처녀작이야. 푸른 밤에 찬란한 별이 떠 있어. 이 작품을 시작으로 더 많은 그림을 그려 나갈 거야.

 

고흐 아저씨는 문 뒤편의 벽면에 걸린 작품을 보여줬다. 리아와 나는 바짝 다가갔다. 푸른 하늘에 춤 추는 듯한 나선형의 붓 자국이 선명한 그림이었다. 첫 작품은 벌써 완성된 상태였다. 물감덩어리가 균일하지 않아 상당히 즉흥적으로 붓질이 간 듯 했다. 밤 하늘이라기 보다는 푸른 색의 바다를 그린 것 같기도 하다.

 

하늘이 요동치고 있어요. 밤하늘이 푸른 것도 특이해요. 실제 하늘은 이 정도는 아닌데 그림으로 보니까 색다른 느낌이에요.” 리아가 말했다.

하늘만 본다면 세상에 이런 하늘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밤하늘을 뚫어져라 바라본다고 변하는 건 없겠지. 내가 그린 하늘은 내 심장 속의 열정을 끄집어낸 거야. 붓을 잡을 때면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힘이 솟아나곤 해. 신이 나서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안 써. 이 그림을 그릴 때도 그랬어.”

그림을 보니 그러신 게 전달이 돼요. 어떤 기분으로 하셨는지 상상이 가고요.”

 

리아는 고흐 아저씨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좋긴 하지만 너무 빨리 그린 것 같았다.

 

그림을 정성스럽게 그린 것 같지는 않아 보여요.” 내 말에 고흐 아저씨가 웃었다.

예술은 정성스럽게 만드는 게 아니야. 예술은 작가의 마음을 다하는 거야. 밤하늘에는 내 심장에서 시작된 격렬한 힘이 분출되는 것이 보여. 별 주변으로 춤추는 내가 보이거든. 나는 느끼고 보여지는 것을 화폭에 옮겨내는 것도 바빠. 내 그림이 정성스럽지 않다는 건 다른 그림을 기준으로 보기 때문이야. 내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걸 느끼는 게 중요해. 예술에서 하나의 기준이나 하나의 관점은 있을 수 없어.”

. 맞아요. 저는 제 기준으로 본 거네요. 그림을 다시 봐야겠어요.”

 

나는 그림을 다시 보았다. 붓 터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잘 그려 보려고 애쓴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고흐 아저씨 말대로 물감 묻힌 붓이 격렬하게 움직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캔버스는 율동감으로 가득 차 있고 천지는 깊고 깊은 푸른색으로 뒤덮였다.

 

내가 리아의 비행선을 타기 전에 보았던 푸른 밤하늘이 생각났다. 그날의 하늘은 고요했다. 나는 그렇게만 보았다. 아마 내 마음이 나름 고요했었나 보다. 고흐 아저씨의 하늘은 살아 움직인다. 무섭도록 살아 움직이는 하늘이다. 고흐 아저씨는 작품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작품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고흐 아저씨는 리아와 대화를 나누면서 한 손은 머리를 감싼 붕대 속을 긁적거렸다. 나도 모르게 붕대에 눈이 갔는데 물감과 때가 묻어 더러워진 상태였다. 새 것으로 갈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기다렸다가 예기가 거의 끝나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흐 아저씨, 붕대 새것 있어요? 지금 하고 계신 붕대가 많이 더러워졌어요.”

고흐 아저씨는 짐짓 놀라더니 말했다.

그렇잖아도 아가씨들이 간 다음에 새로 하려고 했어. 얼룩이 좀 있어서 갈아야 돼.”

제가 잘 할 수 있어요. 지금 할까요?”

 

리아가 말했다. 리아는 군인이니 이런 것도 잘할 것이다. 고흐 아저씨가 흔쾌히 승낙했고 우리는 다시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흐 아저씨가 가방에서 새 붕대를 꺼내 리아에게 건넸다. 리아는 감겨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나는 상처를 보고 싶지 않았지만 궁금해서 지켜보기로 했다. 붕대가 모두 풀어지자 상처가 드러났다. 귓볼이 조금 남겨지고 위 쪽은 남아있지 않았다. 온몸에 전율이 일어난다. 내 몸에 상처가 나는 기분이다. 더 이상 볼 수 없어 얼굴을 돌렸다. 새 붕대로 교체하는 것이 끝났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고 하자 고흐 아저씨가 말했다.

 

수고했어. 덕분에 내 일거리 덜었군. 어디로 갈 건지 마차 불러줄까?”

괜찮아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군. 하긴 여기까지 걸어올 순 없지.”

 

우리가 인사를 하고 나오려 하자 고흐 아저씨가 정문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앞장섰다. 우리는 고흐 아저씨의 뒤를 따라 건물 밖으로 나왔다. 돌길 옆 화단에는 아이리스가 널려 있었다. 5월의 봄 공기를 만끽하는 아이리스는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아이리스가 참 많아요. 꽃이 예쁘네요. 꽃도 그리시죠? , 해바라기 그림이 있었죠?”

 

리아의 말에 고흐 아저씨가 대답했다.

 

내가 아이리스 그린 걸 안 보여줬구나. 여기서 그린 첫 작품이 아이리스야. 바로 이 자리서 직접 보면서 그렸지. 원장님이 그림을 좋아하셔서 며칠 감상하라고 빌려드렸어. 다음에 다시 오면 볼 수 있을 거야. 그때는 작품이 많을 테니 볼 만할 거다.”

 

리아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는 다시 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심정이라 입이 꾹 닫히고 말았다. 리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흐 아저씨는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기대하는지 표정이 밝았다. 고흐 아저씨에게 이 시간은 어떻게 기억될까? 자신을 만나러 온 젊은 아가씨들 때문에 기분 좋은 하루로 기억될까? 모쪼록 그런 추억으로 남겨졌으면 한다. 대문 밖으로 나와 고흐 아저씨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는 아이리스가 있는 화단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수에나]

한국, 미국, 독일 20여 회 개인전

60여 회 그룹 전시 활동

미네소타 뉴욕 밀스 아트 리트릿 레지던시 활동

자하 갤러리 공모 전시 심사위원 역임

수에나 www.suena.creatorlink.net


작성 2022.03.17 10:47 수정 2022.03.17 11:37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전명희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