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머무는 은비령을 찾아 또 다른 친구들과 함께 길을 나선다.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IC를 빠져나와 44번 국도로 들어서니 사방 천지가 눈 세상이다. 그저께 내린 눈으로 올겨울 제대로 누리지 못한 눈 구경을 실컷 하면서 소양강을 따라 간다. 인제시장에 잠시 들러 먹거리를 챙긴 후 은비령을 향해 달려간다.
소양강 상류를 지나 하추리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작은 고개를 넘는 동안 드문드문 만나는 강원도 산간 마을은 3월 하순에 내린 폭설로 은빛 설국이다. 원래 군사도로여서 길이 넓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순백의 바위와 돌들 사이로 개울물이 깨끗한 속살을 드러내고 봄을 향해 달리고 있다.
조금 더 가다가 보니 현리에서 바로 한계령으로 이어지는 필례로와 만난다. 이 도로는 이제 한계령 정상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간다. 계곡 오른쪽으로 아주 준수한 미남자 같은 봉우리들이 눈을 덮어쓴 푸른 소나무숲 사이로 삐죽삐죽 모습을 드러낸다. 오른쪽으로 1,424m의 점봉산이 고개를 내밀고 일행을 ‘어서 오라’ 하며 반겨준다.
여기가 마치 남설악의 진수임을 증명하려는 듯 바위의 형상이 갈수록 기기묘묘하고 늠름하고 우람한 고봉들을 감상하면서 계속 고갯길을 올라가면 필례약수라는 간판이 보인다. 간판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식당과 주차장, 그리고 필례약수가 나온다. 필례는 약수터 주변 지형이 베 짜는 여자, 즉 필녀(匹女)와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위장병, 피부병, 숙취에 좋다고 알려진 필례약수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친구와 만나 철분으로 인해 약간 비릿한 맛이 느껴지는 약수를 한 사발 들이킨 후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온천수로 지은 산나물이 듬뿍 들어간 산채비빔밥과 참나무로 훈연한 돼지고기를 안주 삼아 옥수수 동동주를 한잔 들이키니 심산유곡에서 이런 호사가 어디 있으랴. 원기를 듬뿍 채운 후 한계령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
필례약수에서 한계령을 향해 넘어가는 고갯길은 그야말로 겨울왕국이다. 오, 순백한 설악의 아름다움이여. 눈을 머리에 인 봉우리마다 삐죽삐죽 올라온 기암절벽과 그 사이를 하얀 눈꽃으로 가득 채운 흑백의 수묵화에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도로 왼쪽으로 당당하게 솟은 1,518m의 가리봉은 한계천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 서북능선과 어깨를 견주고 있다. 이어서 주걱봉, 삼형제봉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온다.
필례약수로부터 한계령 휴게소까지 5km의 길은 그 전까지 작은 한계령, 또는 필례 약수터가 있다고 해서 필례령이라고도 부르던 것이 어느 날부터 은비령(隱秘嶺)이란 새 이름을 얻었다. ‘신비롭게 깊이 감춰진 땅’이라는 의미를 갖는 은비령, 지도에 전혀 나오지 않아 이름도 알 수 없었던 고갯길. 이 길이 바로 은비령이다.
1996년에 발표돼 주목을 받은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 그 소설이 한갓 이름 없는 작은 한계령에 머물렀을 이 고갯길에 은비령이라는 신비스러운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그리고 세계에서도 예를 찾아보기 드물게 문학이 길을 만들고 마을을 만든 것이다. 가상의 고개였던 ‘은비령’은 이제 어엿한 실제 지명이 되었고 지도에도 등재되었다.
은비령은 옛날 동해안에서 만들어진 소금이 내륙 산골로 전해지던 '소금길'이었다. 양양에서 구운 소금, 말린 생선 등이 봇짐으로, 혹은 나귀와 소의 등에 실려 이 고갯길을 넘어 인제에서 곡식, 나물, 버섯 등으로 물물교환했던 보부상들이 다니던 길이었다.
아니 설악에 이런 진귀한 구경거리가 있었단 말인가? 옛날 내설악과 외설악을 아니 다닌 것이 아니로되 이처럼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는데, 역시 나이가 좀 들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이 그만큼 절절한 것인가?
한계령 정상에 도착해서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다. 은비령에는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이윽고 자동차는 우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한계령 남쪽 고개로 돌아간다. 은비령으로 다시 가는 중이다.
필례약수에 차를 주차한 후 은비령 골짜기에 있는 친구 움막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게르마늄 온천인 필례온천과 텐트촌을 지나면서 인적이 사라지고 본격적으로 ‘인제천리길’로 들어선다. 어쩐지 이 고갯마루가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의 무대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어여쁜 이름이다. 인제 젊은이들이 옛사람의 자취, 역사, 문화가 서린 길들을 걷기 좋게 연결하고 정비하고 복원한 길로, 그 길의 코스가 20개나 되고, 길이는 400㎞ 남짓 된다. 이름하여 천리길이다. 인제천리길 20개 구간 중 열 번째 구간은 가리산 방재체험마을에서 시작해 대목령, 필례약수를 지나 군량분교까지 이어지는 12㎞의 둘레길이다. 이 길은 우리나라에서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가리봉 중턱의 친구네 움막 가는 겨울 산길은 황량하다. 사람의 발길과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에 가까운 숲속의 나무들은 헐벗었다. 그렇지만 쓸쓸하지는 않다. 오히려 매력적이다. 공기는 유리처럼 차고 투명하다. 하늘은 푸르고 높다. 잎을 떨어뜨린 채 온몸을 드러낸 나목들 사이로 산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나그네는 명상가가 된다.
1996년 이순원의 소설 [은비령]을 읽고 다음 해 바로 여기를 찾았었다. 우리가 묵은 화전마을에서 바라보이는 삼형제봉과 주걱봉, 가리봉은 마치 우뚝 막아선 거벽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친구가 사는 움막을 찾아 수십 년 만에 다시 이 길을 걷고 있다. 역시 운명의 힘은 무서운 것, 무엇에 홀린 듯,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은비령에 발을 들여놓고 만 것이다.
예부터 화전민 마을이 있었던 곳을 지나서 인제천리길과도 작별을 하고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계곡을 끼고 올라가니 산 중턱 햇살 양명한 곳에 친구 토굴집이 있다.
친구들이 잠든 시간, 밖으로 나와 보니 은비령 밤하늘에 별이 나와 있다.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와 남편의 친구를 사랑하게 된 여자가 2,500만 년의 시간과 인연을 실어 보낸 밝은 별이 있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걸리는 시간이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인가? 다만 그 만남을 위해 은비령에 묻어둘 별이 있느냐 없느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닐까.
아파할 사랑 없는 생애가 부끄러울 뿐
시들시들 말라가는 시간의 저편을 떠나보내고
남루함 덮어줄 그리움마저 묻어버린다
이제 불타는 숲의 산문을 걸어 잠그고
은비령의 그가 부르는 바람의 노래를
마저 부르리라.
- 전승선, ‘은비령엔 그가 산다’ 중에서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