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은 첫째, 父母俱存兄弟無故(부모가 다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무고한 것), 둘째, 仰不愧於天府不怍於人(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고 땅을 굽어보건대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않은 것), 셋째, 得天下英才而敎育(천하의 영재들을 얻어 가르치는 일)이라고 했고, 공자는 學而時習之不亦說乎(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남이 자기의 뜻을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아니하면 군자답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두 성인 모두 가르치는 일이 즐거움이라고 했다. 두 성인의 가르침대로 40여 해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보람으로 살아왔다. 승진이나 출세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묵묵히 교단을 지키며, 학문과 시 쓰는 일에만 전념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그렇게 살다가 보니 평교사로 교단을 떠날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학교 다닐 때 신통치 않았고 교사가 되고나서도 교육자로서 학식덕망이 없을뿐더러 친구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없던 친구들은 세상물정에 밝아 교육은 제쳐두고 출세에 급급하더니 승진하여 교감, 교장이 되고, 장학사, 교육장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그런 친구들은 대개 자기 우월감에 빠져 승진하지 못하는 평교사친구를 우습게보고 거드름 피우는 꼬락서니를 보면 구역질이 나서 동창회나 교사들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 그런 친구들은 평교사는 무능이고 자기네들은 유능하다는 자기만족의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머릿속은 텅 빈 친구들이 교육계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면 가관이 아니다. 우리나라 교육계는 승진이 되면 그 순간 교육자가 아니라 교육행정가로 돌변한다. 교육에는 관심도 없고 중이 젯밥에만 신경 쓰듯이 어디 돈 고물은 떨어지지 않나하는 생각, 어느 선생이 자기한테 깍듯이 인사를 잘 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자기 우월감에 빠져 아무 것도 아닌 권력을 휘두르는 재미에 빠져 거드름피우는 꼴은 목불인견이다. 나는 그런 친구들이 불쌍하게 보인다. 그 지위에 오를 자격이 없는 위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날마다 깊은 사색과 명상을 하며 작품을 쓰는 즐거움, 책을 읽는 즐거움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 즐거움 때문에 내가 걸어온 나의 삶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글픈 것은 젊은 교사들이 나보다 나이 적은 교감, 교장한테는 제부모보다 더 깍듯이 굽실거리면서도 평교사들에게는 같이 함부로 대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그게 당연한 직장 예절로 착각하고 있는 교직풍토가 참 우스운 일이다. 자기보다 높은 서열의 직위에 인사하는 모습은 동물사회의 모습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권력은 돈과 폭력과 지식에서 나온다고 했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동물을 잡기 위해 폭력을 행사해왔고 그 뒤 자연에 가하는 폭력으로 부를 축척해왔다고 보고 인류의 발달과정을 이 세 가지 개념으로 사회현상을 파악했다. 돈의 변질된 형태가 경제력이고, 폭력의 변질된 형태가 공권력, 군사력, 권위, 등이라고 했으며, 지식은 학문, 정보 등을 포함한다고 했다. 우리가 어린 날 부모님들께서 나는 일해 먹고 살지만 자식만은 공부시켜 출세시키겠노라고 해서 오늘날 우리나라가 경제발전을 이루었는데 토플러의 주장을 그대로 실천했을 뿐이다.
권력의 이동이다. 가난한 사람이 권력을 쟁취하는 방법은 오직 지식 밖에 없다는 것을 아셨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폭력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권력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원시적인 권력을 쟁취하고자 출세의 대열에 나서고 있다. 공부해서 지위를 확보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즐거움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폭력은 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돈을 많이 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식한 부동산 졸부가 돈이 많으면 폭력은 얼마든지 살 수 있다. 판검사. 의사, 권력을 쥔 사위를 돈으로 사와서 싱류층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이 없는 것은 지식이다. 그 지식이 없기에 그들은 죽을 때까지 공허하다. 많이 배운 친구가 부럽다, 왜냐하면 지식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해볼 때 젊은 교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교직의 관료적 위계서열인 폭력 앞에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권력을 사랑하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사람의 인격보다 권력자 앞에 잘 보여 권력에 가까이 가보려는 권력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이 노예임을 모르고 평교사에게 불손하게 대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들이 불쌍하게 보일 뿐이다. 무식한 관리자 앞에 자신의 지식이나 주장을 한번 말 하지도 못하고 “예예”로 일관하는 폭력 지향적 습성이 사람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교사에게 배운 제자가 또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은 암담하기만 하다. 문제는 교사들의 철학적인 삶의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바르지 못한 권력 앞에 무기력하고 사람을 물질적인 가치로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안타깝기만 한다.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교사가 그러하니 다음에 올 미래 사회의 앞날이야 말 것도 없지 않겠는가? 나는 평생을 학문에 몰두하여 경영학, 교육학, 문학 석사 학위를 세 개나 받게 되었다. 그게 자랑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 학문을 한다고 했는데 모르는 것이 더 많고 나의 무지함 앞에 인간이란 너무나 나약하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이제까지 교육을 잘 못해온 것만 같아 부끄럽기만 하고 더 많은 공부해야겠구나하는 생각이 앞선다.
그런데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는 속담은 맞는 것 같다. 교양은 쌓지 않고 승진욕구에 평생을 바쳐 승진대열에 끼어 교장이 된 것이 큰 벼슬에 오른 것처럼 뻐기고 거드름을 피우며 폭력을 행사하는 작태를 보면 관리자들이 어떻게 보면 시중에 폭력배보다 더 많은 죄를 짓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나는 더 많은 죄를 짓지 않아 다행이다.’하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짓는다. 일찍 권력의 맛을 알아 권력의 노예가 되어 권력자의 뒤꽁무니 졸졸 따라다니며 출세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 측은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교장은 직책이 교장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자기가 맡은 직분에 충실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직책이 그 사람의 인격의 척도가 아니다. 높은 직책이 높은 인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야 한다. 높은 직위에 오를수록 그에 걸맞게 인격의 높이도 올라가면 좋은 현상이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그 직책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게 아니겠는가?
같이 늙어가며 교육활동에 고생한 사람들이 조금 높은 직위에 올라갔다하여 평교사를 깔보는 것은 인격의 성숙이 안 된 몰이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시중의 폭력집단의 우두머리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제 실력 없이 비빔질 잘하여 승진한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하면 밟고 강한 사람한테는 굽실거리기 마련이다.
삶의 철학이나 교육관이 없이 교직에 들어온 교사들이 문제다. 오직 자기의 목적달성에만 신경을 곤두세운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한테는 굽실거리고 나이 많은 평교사는 맞먹으려든다. 평교사를 선배교사로 존경이 대상이 아니라 무능의 대상이요, 자신의 이익에 방해되는 거추장스러운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를 볼 때마다 직위가 낮음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그들의 눈에 내가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게 행동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지곤 한다. 다 내 탓이다. 저들도 언제 가는 승진을 못하면 나의 모습이 될 것이다. 자신의 미래 모습 앞에 폭력의 잣대로 인간을 보는 눈이 어느 땐가 그런 일이 부끄러워지지 않겠는가?
직위의 높고 낮음을 따지려면 교직을 찾지 말아야 한다. 교사는 평생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이 가장 큰 보람으로 여겨야 하지 않는가? 나는 즐겁다. 아이들과 가까이 생활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주체적인 나의 삶을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기쁘다. 만약 나에게 다시 태어나서 교사의 길을 걷는다면 역시 승진하지 않고 평교사로 살 것이다. 승진은 교사가 아니라 행정가로 전락하기 때문이고 행정가란 결국 위계라인의 꼭두각시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런 삶이 전혀 부럽지 않기 때문이다.
[김관식 시인]
노산문학상 수상
백교문학상 대상 수상
김우종문학상 수상
황조근정 훈장
김관식 kks419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