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알프스 부럽지 않다, 봄에 만난 금강산 화암사 설경

여계봉 선임기자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

 

- 오은, '계절감' 중에서

 

봄의 문턱을 넘어선 지 오래건만 눈이 유난이 인색했던 올겨울에는 계절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다는 미련이 가슴에 남아 있었는데, 춘분을 하루 앞둔 강원도 고성 진부령 고개는 온통 눈으로 덮여 우리 곁에 온 봄을 시샘하고 있다. 눈에 대한 미련이 많다 보니 시구(詩句)처럼 봄에 겨울을 만나는 호사로운 계절감을 누리는 것 같다.

 

리조트 객실에서 바라보는 설악산 비경 울산바위는 가히 압권이다. '바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높이 873m, 둘레 4km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울산바위는 하나의 거대한 산이나 다름없다. 울산바위의 설경을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리조트에서 가까운 금강산 화암사의 천년숲길을 걷기로 한다.


대명 소노캄 델피노에서 바라본 설악산 울산바위


리조트에서 차량으로 10분 거리에 있는 금강산 화암사의 겨울 풍광은 장관이다. 현판이 걸린 일주문으로부터 1km 가량 뻗은 참나무 숲길은 하얀 눈으로 덮여 이 길을 뽀드득 소리를 내며 걷는 것만으로도 속계의 번잡함을 비워내게 하고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선계로 안내한다.

 

화암사(禾岩寺)는 신라 혜공왕(서기 769)때 창건된 사찰로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금강산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전통사찰이다. 주소는 강원도 고성이지만 위치적으로는 강원도 속초시에 접근되어 있다.

 

사찰 매점 앞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10분 만에 화암사의 랜드마크 수바위(穗岩)에 도착한다. 여기서는 설악산 방향으로 눈을 뒤집어쓴 채 동면에 든 달마봉과 울산바위, 그리고 들머리인 화암사 경내가 잘 조망된다. 이곳에서 소나무 숲길을 따라 금강산 속살을 헤쳐가며 성인대로 향한다.


화암사 범종루에서 바라본 수바위


성인대는 금강산 신선들이 내려와 놀고 갔다 하여 신선대라고도 불린다. 정면에 우뚝 선 기암괴석은 그야말로 불법을 외호(外護)하는 호법신장(護法神將)과 흡사하다. 전망대에 서면 너른 신평벌과 푸르른 동해바다가 펼쳐지고 화암사의 주봉 신선봉이 목전에 있다. 고개를 북쪽으로 더 돌리면 송지호까지 보인다.

 

성인대. 마치 화암사를 지키는 호법신장 같은 모습이다.


여기가 바로 금강산이 시작되는 곳이다. 미시령과 연결되는 상봉과 신선봉....이들 봉우리는 마산봉을 거쳐 진부령,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이룬다. 화암사의 주봉 신선봉은 금강산 제1봉으로, 남녘 땅에는 금강산 12천 봉 중 7개가 있다.

 

좌로부터 설악산 황철봉, 미시령, 상봉, 신선봉이 파노라마로 이어진다. 뱀처럼 꾸불꾸불하게 이어지는 산길 미시령은 눈 속에 숨어 있다. 백두대간 산꾼들의 추억이 서린 고개 정상의 휴게소는 터널 개통 이후 폐업하고 이제는 속초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찾는 피서지로 변했다. 잊혀진 길은 잊혀진 사람을 떠오르게 하여 잠시 연민에 젖게 만든다

 

미시령 옛길. 잊혀진 길은 그저 서럽기만 하다.


이곳 성인대에서 신선봉(1,204m)까지 가는 6km의 등산로는 천국문이라 불리는 바위틈 사이로 가야 하는 등 다소 어려움이 있는 코스다. 그러나 신선봉에 오르면 푸른 동해가 발아래로 보이고 맑은 날씨에는 향로봉 너머로 금강산 연봉까지 보여 눈 호강을 누릴 수 있다.

 

성인대 전망대에 서면 너른 신평벌과 동해바다까지 조망된다.


눈에 파묻힌 성인대 너럭바위로 발걸음을 옮길수록 외설악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좌로부터 달마봉, 화채능선, 중청, 울산바위....설악산 정상 대청봉은 울산바위 가운데 봉우리에 가려져 있다. 대자연의 웅장함 앞에 그저 바라만 봐도 가슴 벅찬 감동이 밀려오고 말문이 닫힌다. 둘레가 4km, 6개의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울산바위는 고서에 천후산(天吼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바람이 6개의 거대한 암봉을 지나면서 내는 소리가 하늘이 우는 소리로 비유한 것이다.


울산바위가 잘 보이는 성인대 너럭바위 설경은 알프스 못지않다.


성인대 삼거리에서 화암사로 내려서는 숲길은 명상의 길이다. 사박사박 쌓인 눈 위로 산의 적막이 깊어진다. 나무도 숲도 계곡도 하늘도 일체가 묵언에 들어있다. 절집을 향해 자분자분 눈길을 걷다 보면 산오름에 거칠어졌던 호흡이 차분해지고 들떠있던 마음도 평정심을 되찾는다.


화암사로 내려가는 산길은 하얀 적막에 잠겨 있다.


눈 외투를 두른 하얀 산에 바람이 부니 산길에 눈꽃이 난무한다. 푹신하게 내린 눈이 한 점 새소리마저 흡입하여 고요했던 산길은 계곡 물소리가 들리면서 산의 적막이 깨어진다. 계곡 길의 끝, 하늘 가린 나무들의 차양이 물러나며 산기슭이 훤해지는데 거기 청명한 둔덕에 화암사가 있다. 너른 품 가슴께에 살포시 안긴 암자의 기운이 싱싱하고 다사롭다. 서슬 퍼런 한풍도 이곳에서 순해진다. 절을 하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절집이 산에 있음은 얼마나 다행인가.

 

암자의 뜰에 나뒹구는 햇살은 봄에 찾아온 겨울을 산사에서 내몰고 있다.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
















 

작성 2022.04.04 11:01 수정 2022.04.0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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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