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 칼럼] 인명풀이 신무천황(神武天皇)

최규성

신무천황(神武天皇)일본서기에 나오는 일본의 제1대 천황이다.

 

BC. 711년에 출생하여 45세 되던 해에 큐슈의 휴가국(日向國)을 떠나 동쪽으로 정벌을 시작하였고, BC.660(신유년)에 장수언(長髓彦; 나가스네히코)의 야마토국을 정복한 후 초대천황으로 등극했다고 한다. 일본은 그가 나라를 세워 천황으로 등극한 날짜인 211일을 건국기념일로 지정하여 오늘날에도 기리고 있다 한다.

 

신무천황(神武天皇)을 일본에서는 진무텐노(じんむてんのう)”라 하는데, 진무(眞武)도 일본어로 똑같이 진무(じんむ)”라 한다. 한국어에서는 神武(신무)眞武(진무)의 발음이 [신무/진무]로 다르지만 일본어에서 음독할 경우 神武眞武 둘 다 진무(じんむ)”라 발음한다. 발음상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신무(神武)”는 원래 진무(眞武)”였는데, 일본어에서 을 모두 [(じん)]이라고 똑같이 음독하다 보니 혼동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모르는 사이에 眞武에서 神武로 표기가 바뀌게 되었다는 게 필자의 추측이다.

 

神武(신무)”일본서기에 나오는 초대 천황의 이름이고, “眞武(진무)”삼국사기백제본기 아신왕 2년조 기록에 나오는 장군의 이름이다. 眞武(진무)는 백제 제17대 아신왕의 외삼촌 되는 인물인데 아신왕에 의해 좌장으로 임명되어 고구려에게 빼앗긴 관미성을 탈환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아신왕 2년조의 해당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又祭天地於南壇 拜眞武爲左將 委以兵馬事 武 王之親舅 沈毅有大略 時人服之 秋八月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圍關彌城 麗人嬰城固守 武以糧道不繼 引而歸.

 

2(서기 393) 봄 정월, 임금이 동명왕의 사당에 참배하고 또한 남쪽 제단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진무(眞武)를 좌장으로 삼아 병마에 관한 일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감복하였다.

 

가을 8, 임금이 진무에게 말하였다.

 

관미성(關彌城)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옷깃처럼 중요한 곳이다. 지금 그 땅이 고구려의 소유가 되어 있으니, 이것을 과인은 애통해 하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기울여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

 

임금은 마침내 병사 1만 명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에 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싸웠다. 석현(石峴) 5개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으나,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굳게 지켰다. 진무는 군량미가 계속 이어지지 못하여 병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아신왕(阿莘王)은 제15대 침류왕의 장자인데 385년 부왕인 침류왕이 사망할 당시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숙부인 진사왕이 왕위를 이었다가 392년 진사왕이 재위 8년만에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고 14년간 재위하다 서기 405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따라서 백제 좌장 진무(眞武)의 생몰연도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활동연대가 대략 진사왕~아신왕 때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300년대 후반에서 400년대 전반에 활동했던 인물인 것이다. 기원전 600년대의 인물로 알려져 있는 신무천황(神武天皇)과는 거의 1천년이나 차이가 나는 셈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두 사람이 동일인물일 수 있단 말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번 따져보지도 않고 모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선입견부터 버려야 한다. 올바른 역사적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경직된 사고와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필자는 일본서기편찬자들이 연도계산을 잘못하는 바람에 생겨난 오류일 거라고 추측한다. 후대인들이 잘못하여 400년대 전반기에 실존했던 인물인 신무천황을 마치 기원전 600년대 전설속의 인물인 것처럼 곡해하게 된 것이라 본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신무천황은 400년대 전반에 실존했던 인물인데 일본서기편찬자들이 천황 계보를 정리하면서 연대를 잘못 계산하였거나, 아니면 그들이 참고한 과거 자료들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을 거라고 본다는 말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일본어에서는 神武(신무)眞武(진무) 둘 다 똑같이 진무(じんむ)”라고 음독한다. 그러니까 동일한 이름 진무(じんむ)”眞武라 쓸 수도 있고 神武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신무천황의 이름은 언화화출견존(彦火火出見尊; 히코호호테미노미코토)’이라고 하는데, 화화출견(火火出見; 호호테미)이 바로 백제를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졸저 국명풀이 백제에서 百濟(백제)’는 우리말로 [온닮]이라는 일컫는 국명을 차자하여 적은 것이라 설명한 바 있다. [온닮/안닮]오타라, 오토모, 아타라, 아담, 아덤, 아더미, 오호더미라고도 하였으므로 일본서기와 같은 일본쪽 문헌들에는 의다랑(意多郞), 안교(鞍橋), 대반(大伴), 대우(大友), 안담(安曇), 아담(阿曇), 아적(阿積), 수적(穗積), 오유(吾嬬)’ 같은 식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화화출견(火火出見)’ 역시 [호호테미(ほほてみ)]를 음차한 표기로 수적(穗積; 호츠미)’과 마찬가지로 백제를 가리키는 말이라 함이 타당하다. 다시말해, ‘언화화출견존(彦火火出見尊; 히코호호테미노미코토)’이라는 신무천황의 이름에 이미 백제를 암시하는 말이 들어가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신무천황기에 나오는 월삭간지만 살펴보아도 그가 기원전 600년대의 인물이라는 주장은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는 견해임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신무천황기에는 신무천황이 동정(東征)을 시작한 것이 45세 되던 해인 갑인년(甲寅年) 10월 정사삭 신유라 되어 있고, ‘11월 병술삭 갑오에 축자의 강수문(岡水門)에 도착하였으며 ‘12월 병진삭 임오에 안예국(安藝國) 애궁(埃宮)에 머물렀다고 되어 있다. 다음해인 을묘년 3월 갑인삭 기미에 길비국(吉備國)의 고도궁(高島宮)에 도착해 그곳에 머무르며 3년간 준비한 후, ‘무오년 2월 정유삭 정미에 다시 동쪽을 향해 출발했다고 되어 있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연대를 계산하여 신무천황은 기원전 711년에 출생했고, 45세 되던 BC.667년 동쪽 정벌을 시작해 BC.660년에 나라를 세우고 천황으로 등극하였으며 76년간 재위하다 BC.585127세로 사망한 것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니까 신무천황이 동쪽 정벌을 시작한 갑인년은 BC.667년이고, 7년 후인 BC.660(신유년)에 건국을 했다고 주장해 온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신무천황기에 기록되어 있는 월삭간지들이 실제 기원전 667년의 월삭간지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남대학교 한보식 교수가 펴낸 중국연력대전에 따르면 BC.667(갑인년)101일은 무오일(戊午日)’로 되어 있다. 실제 BC.667년의 10월은 정사삭이 아니고 무오삭인 것이다. 정사일(丁巳日)은 하루 전날인 930일의 간지다. , 실제 월삭간지와는 하루의 오차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신무천황기에는 그 다음달인 11월을 병술삭, 12월을 병진삭이라 했으나 중국연력대전의 실제 BC.66711월은 병술삭이 아니라 정해삭이고, 12월은 병진삭이 아니라 정사삭이다. 12월 바로 뒤에 윤달이 들어가는데 윤12월의 초하루가 병술(丙戌)이다. 12월이 병술삭인 것이다.

 

일본서기BC.667(갑인년)10월을 정사삭, 11월을 병술삭, 12월을 병진삭이라 했으나 실제 BC.667(갑인년)의 월삭간지는 10월이 무오삭, 11월이 정해삭, 12월이 정사삭, 그리고 윤12월이 병술삭인 것이다. 들어맞는 게 하나도 없다. 이러한 오류가 전승과정에서 생겨난 문제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후대의 집필자들이 연도를 계산해 꿰맞추느라 애를 쓰다가 정교하지 않은 역법을 사용하는 바람에 빚어진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아니면 당대의 사람들이 엉터리 역법을 사용했다는 얘기밖에는 안 될 것이다.

 

어쨌거나 월삭간지의 대조결과가 이처럼 전혀 일치하지 않음에도 신무천황이 BC. 600년대의 인물로 추정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학자가 있다면 그는 학자가 아니라 그냥 억지 주장을 내세우는 고집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그러면 신무천황(神武天皇)을 백제 아신왕 때의 좌장 진무(眞武)와 동일한 인물로 볼 경우 즉, 400년대 전반기에 실존했던 인물로 볼 경우에는 그러한 월삭간지들이 모두 정확히 들어맞는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모두가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백제 좌장 진무(眞武)370년 쯤에 출생했다 가정하고 맞춰 보면 왠지 모르게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가 45세 되던 해는 414(갑인년)인데 414년의 월삭간지를 보면 10월이 정해삭, 11월이 병진삭, 12월이 병술삭으로 일본서기신무천황기에 기록된 월삭간지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듬해인 을묘년(415) 3월의 월삭간지를 보면 갑인삭으로 정확히 일치한다. BC.666(을묘년) 3월의 월삭간지는 을묘삭이지만, 415(을묘년) 3월은 갑인삭으로 일본서기신무천황기에 기록된 을묘년 3월 갑인삭과 일치하는 것이다. BC.666년과 415년 둘 다 간지연도는 을묘년이지만 해당연도 3월의 월삭간지를 보면 BC.666년의 3월은 을묘삭이고 415년의 3월은 갑인삭으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3월 갑인삭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BC.666년보다는 AD.415년이 더 타당해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물론 한두 개의 사례만을 바탕으로 추론해서는 안되고, 전체적으로 따져봐야 할 것이다. 일본서기신무천황기에는 24개의 월삭간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을 모두 대조해 보면 어떻게 되는가?

 

다음 표에서 보다시피 그 어느쪽도 정확히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월삭간지 대조결과를 단순하게 비교하여 둘 중 어느 쪽이 더 많이 일치하느냐만 가지고 조급하게 결론을 내릴 게 아니라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연도

일본서기에 기록된 월삭

BC.600년대

실제 월삭간지

AD.400년대

실제월삭간지

갑인년

10월 정사삭

BC.667.10.무오삭

414.10.정해삭

 

11월 병술삭

BC.667.11.정해삭

414.11.병진삭

 

12월 병진삭

BC.667.12.정사삭

414.12.병술삭

을묘년

3월 갑인삭

BC.666.3.을묘삭

415.3.갑인삭

무오년

2월 정유삭

BC.663.2.무술삭

418.2.정묘삭

 

3월 정묘삭

BC.663.3.정묘삭

418.3.병신삭

 

4월 병신삭

BC.663.4.정유삭

418.4.병인삭

 

5월 병인삭

BC.663.5.정묘삭

418.5.병신삭

 

6월 을미삭

BC.663.6.병신삭

418.6.을축삭

 

8월 갑오삭

BC.663.8.을미삭

418.8.갑자삭

 

10월 계사삭

BC.663.10.갑오삭

418.10.계해삭

 

11월 계해삭

BC.663.11.갑자삭

418.11.계사삭

 

12월 계사삭

BC.663.12.계사삭

418.12.임술삭

기미년

2월 임진삭

BC.662.2.임진삭

419.2.신유삭

 

3월 신유삭

BC.662.2.임술삭

419.3.신묘삭

경신년

8월 계축삭

BC.661.8.계축삭

420.8.계축삭

 

9월 임오삭

BC.661.9.계미삭

420.9.임자삭

천황즉위

(신유년)

1월 경진삭

BC.660.1.신사삭

421.1.경술삭

2

2월 갑진삭

BC.659.2.을사삭

422.2.갑술삭

4(갑자년)

2월 임술삭

BC.657.2.계해삭

424.2.임진삭

31(신묘년)

4월 을유삭

BC.630.4.병술삭

451.4.을묘삭

42(임인년)

1월 임자삭

BC.619.1.계축삭

462.1.임오삭

76(병자년)

3월 갑오삭

BC.585.3.을미삭

496.3.갑자삭

77(정축년)

9월 을묘삭

BC.584.9.병진삭

497.9.을유삭

 

 

필자가 보기에 BC.600년대쪽은 계속적으로 하루의 오차가 있는 듯하고, AD.400년대쪽은 계속적으로 한 달의 오차가 있는 듯하다. 하루의 오차가 한 달의 오차보다는 훨씬 작으므로 당연히 전자의 신뢰도가 더 높을 것 같지만, 역법 계산의 오류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후대인들에 의해 정교하지 않은 역법 계산이 행해졌다면 하루씩 계속 밀리는 것이나 한 달씩 계속 밀리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는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단지 시간의 단위 크기만 다를 뿐, 그 단위 개수의 관점에서 보면 하루씩 밀리는 것이나 한 달씩 밀리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지 않으냐는 말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연도의 기록들이 후대인들에 의해 잘못 꿰맞춰진 거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문제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리하기로 하겠다.

 

일본의 초대천황 신무(神武)’는 백제 17대 아신왕의 외숙부인 진무(眞武)’와 동일인으로 추측된다. 진무(眞武)는 서기 370년쯤에 출생하여 400년대 전반기에 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391(신묘년) 7월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의 석현성(石峴城, 현 여수시 돌산도)을 비롯해 남해안 지역의 여러 성들을 빼앗고, 10월에는 관미성(關彌城, 현 대마도)을 쳐서 빼앗아 갔는데, 그 사실이 삼국사기백제본기 진사왕 8년조와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즉위년조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에도 새겨져 있다. 흔히 말하는 광개토왕릉비 신묘년조의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

 

진무(眞武)는 아신왕에 의해 좌장으로 임명되어 고구려에게 빼앗긴 성들을 탈환하려 애썼으나 결국 되찾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그러하다.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은 대부분 진무(眞武)가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세가 등등해진 고구려군에 대항하기 힘들어지자 진무(眞武)45세 되던 해인 414(갑인년) 동쪽으로 옮겨갈 결심을 하고 일본 열도 동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후대인들에게 전승되면서 신무동정(神武東征)이라는 전설로 자리잡게 된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신무천황(神武天皇)은 백제 아신왕의 외숙부인 좌장 진무(眞武)와 동일인이라는 것, 기원전 600년대의 인물이 아니라 서기 400년대에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것, 신무천황(神武天皇)은 개화천황(開化天皇) 응신천황(應神天皇) 등과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것, 391(신묘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빼앗긴 석현성(石峴城)과 관미성(關彌城) 같은 성들을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결국은 역부족으로 패퇴하고 말았다는 것, 그리하여 큐슈 지역을 떠나 일본열도의 동쪽으로 옮겨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

 

이러한 필자의 견해는 단지 차자표기의 관점에서 고대의 인명 파악을 바탕으로 한 추측일 뿐이어서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러나, 앞으로 유물이나 유적의 발굴이 계속 이어지고 종합적인 연구검토가 이루어지면 언젠가는 역사적 진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 믿는다. 관련분야 연구자들의 맹성을 촉구하는 바이다.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burkurtar@naver.com


작성 2022.04.09 11:07 수정 2022.04.0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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