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겨울 산사 가는 길

망월사 가는 길은 한편의 시 같은 서정(抒情) 넘치는 길


영국 역사가인 토마스 칼라일은 자연은 신이 갈아입는 옷이라고 말한다.

 

산사(山寺)가는 길은 겨울을 입고 있다. 산사 가는 길에서 만나는 자연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들려주는 크나큰 스승이다. 겨울 산사 가는 길은 자신이 매순간 살아 있음을 오롯이 느끼며 자각할 수 있는 도()의 길이기도 하다.

 

고요한 침묵 속에 고즈넉이 앉아 있는 절은 한 권의 시집이다. 절에는 시가 있다. ()란 말씀 언()자와 절 사()가 결합된 단어다. 절에서 수행하는 구도자의 탈속한 언어는 바로 시가 된다.

 

그래서 산사 가는 길은 한편의 시 같은 서정(抒情) 넘치는 길이다.

 

도봉산 포대능선 기암절벽 아래 자리한 영산전과 눈 덮인 도봉산의 설경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다.

의정부 망월사역에서 내려 도봉산을 오른다. 안온한 겨울 햇살에 몸을 맡긴 산자락은 산사 찾는 이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망월사와 원통사가 분기되는 원도봉 계곡에 들어서자 망월사로 오르는 골짜기는 깊고 어둑하다. 빛깔도, 움직임도, 소리도 모두 지운 채 적멸처럼 잠잠하다.


계곡의 물길은 꽁꽁 언 얼음장으로 변한 채 흐르는 소리조차 기척하지 않는다.

 

 

집채 만 한 바위들이 온통 계곡을 메우고 있다. 눈 덮인 바위들 사이로 얼어붙은 얼음장 아래에서 들려오는 여린 물소리가 겨울 산의 적막을 깨우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나무 그림자 내린 산길은 맑은 한지처럼 순수하다. 산길이 해맑아 온몸으로 산과 섞인다. 여기에는 그 어떤 욕심도, 고뇌도, 번뇌도 없다. 그저 그 자체로 무구하고 아름답다.


골바람이 달려와 숲을 흔드니 세속에서 담아온 나그네의 번뇌가 떨쳐진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세월에서 묵은 때, 저자에서 얻은 먼지만 남는다.

 

극락교를 지나면 극락인가. 고요한 겨울 산골짜기는 이미 법당이다.

 

 

산길은 굽어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한다. 그동안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간 마음의 술렁거림이 보인다. 나그네를 따라오던 여린 물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숲의 적막 속으로 사라진다.

 

바로 앞에 법복 차림의 노보살 두 분이 오순도순 말을 주고받으며 산길을 오르고 있다. 평탄치 않은 산길을 걸머메고 둘러메고 꾸부렁꾸부렁 산사를 찾아가는 노보살들을 보면 불자의 진지함이 뚝뚝 묻어난다.

 

문득 30년 전에 작고하신 어머니가 생각난다. 마산 무학산 자락 서원곡 암자를 수십 년 동안 오르내리시면서 간절한 기도와 믿음으로 힘들고 버거운 세월의 바다를 건너신 어머니.


신심이 독실하신 당신께서는 딸을 내리 넷을 낳는 바람에 평생 아들을 서원(誓願)하셨는데, 당시에는 노산인 서른여덟에 그 잘난(?) 아들을 보게 된다. 그 외동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무조건, 무차별적인 모성은 중생을 향한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사랑이 아니었을까.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오늘은 그 아들이 비워진 마음에 믿음을 채우기 위해 산사 가는 길을 걷고 있다.

 

민초샘에 도착하자 잠든 영혼을 깨우고 지친 마음에 쉼표를 찍는 산사의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온다. 마지막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계곡 끝나는 곳에 하늘 가린 나무들의 차양이 물러나며 동트듯 산기슭이 훤해지는데, 거기 청명한 둔덕에 절이 있다. 달리 보면 고개를 약간 쳐들고 달을 바라보는 자세 같기도 하다.

 

신라 선덕여왕 때 해호(海浩)화상이 창건한 망월사(望月寺)의 이름과 관련하여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월성, 月城)를 바라보며() 왕실의 융성을 기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대웅전 동쪽에 있는 토끼 모양의 바위가 남쪽에 있는 달 모양의 월봉(月峰)을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설이다.

 

잔설로 치장한 망월사는 찬바람 속에서도 암자의 뜰에 하오의 햇살이 나뒹군다. 금싸라기처럼 눈부시게 차가운 늦겨울 산사에 온기가 배어든다.

 

공양간 앞 동굴 샘터 약수는 한겨울에도 얼지 않아 산사를 찾는 나그네의 갈증을 삭혀준다.


망월사는 여섯 개의 좁은 문으로 바깥에서 안으로 연결되어 있다. 해탈문, 통천문, 자비문, 여여문, 월조문, 금강문은 모두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로 좁고 높이도 낮다. 해탈하려면 하심(下心)을 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통천문. 좁은 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너르고 아늑한 부처님 품안으로 들어선다.

 

 

도봉산 너른 품 가슴께에 살포시 안긴 천중선원의 기운이 싱싱하고 다사롭다. 서슬 퍼런 한풍(寒風)도 이곳에서는 순해진다. 절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래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절집이 산에 있음은 얼마나 적실한가.

 

가는 눈발에 꽃비처럼 너울너울 흩어져 내리는 눈은 절집 마당에 떨어지고, 법당 지붕에 앉고, 바위에도 쌓인다. 지극한 정교함과 절묘한 여백의 미가 완연한 바위 벼랑들이 눈과 한파 속에서 어엿하게 절집을 수호하고 있다. 그 속에서 절집은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내공으로 한겨울을 견딘다.


포대능선 아래 천중선원. 스님은 참선에 들었는가. 텅 빈 듯 고요한 산사의 하오가 미묘하다.

 

영산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가히 일품이다. 이곳에서 뜨는 달을 망월사를 지은 해호가 보았고, 신라의 마지막 태자가 보았고, 부도탑을 남긴 혜거가 보았고, 만해의 제자 춘성이 보았으리라. 저마다 견뎌온 세월의 겹이 두터우니 그 안에 담긴 사연은 또 얼마나 흥건하랴.


 

드센 찬바람에 영산전의 문풍지가 소리 내어 울고 있다. 오른편으로 관음전인 낙가보전이 보인다.

 


영산전을 뒤로 돌아서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세월의 이끼가 두텁게 낀 부도 하나가 서 있다. 양명(陽明)한 이곳은 언제나 어머니 품처럼 따사롭고 포근하다.


고려 혜거(慧炬)국사부도. 혜거국사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으로 팔각지붕 모양의 탑신이 이채롭다.

 

 

사찰 입구에는 아니온 듯 다녀가소서간판이 서있다. 자연 보호를 위해 관광지와 캠핑장, 낚시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글귀이지만 나그네는 또 다른 상념에 젖어든다.


인생(人生)이란 바로 이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한 조각의 구름이 아닌가. 일순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순간 사라져버리는 것들. 고정된 실체가 없이 찰나생멸(刹那生滅)하는 이 세상에서 단지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갈 뿐.



누구나 와서 보되 흔적을 남기지 말고 그 안의 세상을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다녀가라는 글이다. 부귀와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져 진정 보고 느껴야할 것을 놓치고 있지 않은지 경종을 울리는 말로 들린다.



전각조차 마음을 비운 듯 허허한 모습으로 서있다. 암자 빈 뜰에 사뿐히 눈 내리니 눌려진 생각들, 감겨진 꿈들이 슬금슬금 풀린다. 한 올 바람처럼 머리가 가벼워진다.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번거롭고, 마음이 밝으면 세상이 밝다.


 

산사 위에 버티고 선 도봉산 주봉인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사천왕이 수미산을 호위하듯 망월사를 협시(挾侍)하고 있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 절이다. 절집을 나서며 뒤돌아보니 티끌 번뇌 흩어지고 맑은 생각이 피어난다.

적멸(寂滅)이란 모든 번뇌의 불이 꺼진 곳. 그렇다면 여기서 적멸이 멀지 않은 것인가.

 

산을 내려오자니 저 아래 사바(娑婆) 세상이 아득하다. 갈 길은 멀고 산색은 이미 검다.

 

겨울 산사 가는 길은 자연이 만들어낸 편린(片鱗)이고 무늬이며, 자연의 정신이자 반영이다.

산사를 내려오면서 자연에게 경건한 예를 올린다.

 

지심귀명례 (至心歸命禮)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9.01.13 12:09 수정 2019.01.13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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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개 (1/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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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님 (2019.01.14 14:35) 
망월사
산사의 깊은 맛을 되새겨 주시는 해설~~감동입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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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그리메님 (2019.01.13 21:17) 
망월사
망월사는 저도 참 좋아하는 절입니다. 포대능선갈때 일부러 망월사에 들렀다 갑니다. 한결같이 서정넘치는 기사에 감동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기사 부탁드려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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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랑님 (2019.01.13 21:10) 
도봉산
자주 가는 망월사인데 사찰에 담긴 사연은 처음 알았네요. 기자님이 어머니를 추억하는 대목에서 저도 잠시 짠~했습니다. 기사 너무 잘 읽었습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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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