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쏟아지는 햇볕이 오후의 대지를 펄펄 달군다. 땅 위에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모조리 활활 태워버릴 듯 강렬한 기세다. 흔히 한여름의 혹독한 무더위를 두고서 찜통이니 가마솥이니 용광로니 하는 말들에다 빗대곤 하지만, 그런 비유가 하나도 부풀려진 표현이 아니다 싶다. 실내에 틀어박힌 채 가만히 앉아서 겨우 숨만 쉬고 있는데도 보리알 같은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린다.
사람의 체온을 넘나드는 가열찬 폭염이 근 보름째 꺾일 줄 모르고 위세를 부린다.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게 만드는 지긋지긋한 불볕더위로 몸도, 마음도 서서히 녹초가 되어 간다. 어서 빨리 가을로 바뀌고 선들바람이 불어왔으면, 그래서 이 펄펄 끓는 한증막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이런 마음이 고래 아니면 굴뚝같다. 소나기라도 한줄기 시원스럽게 퍼부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연신 하늘을 바라기해 보지만, 야속하게도 바늘 끝으로 찌르듯 햇살만 더욱 세차게 쏘아댈 뿐이다.
구름이 방석만 하게 모여드는가 싶다가 이내 흩어져 버리니 잠깐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어 버리기 일쑤다. 그악스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에 정신이 멍해지고, 연일 계속되는 열대야로 오늘 밤도 숙면을 취하긴 틀렸다는 예감에 미리부터 잔뜩 걱정이 앞선다. 줄곧 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고 말 것만 같은 막연한 두려움마저 엄습해 온다.
지난겨울은 정말 추워도 너무 추웠다. 사나흘에 하루꼴로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20도 어름까지 곤두박질쳤다. 이제껏 겪어 보지 못한 매서운 한파에 정원의 나무들 가운데 비교적 내한성이 약한 수종은 동해凍害를 입어 생육 상태가 영 신통치 못하다. 수십 년을 끄떡없이 잘 버티어 왔던 치자나무는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가 되어버렸고, 석류나무는 어찌어찌 어렵사리 꽃은 몇 송이 피웠지만 열매를 하나도 달지 못했다. 이례적인 혹한이 남긴 상처의 흔적이다.
요 근래 몇 해 동안 전에 없던 극심한 추위와 극심한 더위를 번갈아 겪었다. 한번 겪어 보니 알겠다, 저 열사의 대륙인 아프리카며 동토의 왕국인 시베리아 근방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힘겹고 고달플 것인가를.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지역인 한반도, 그로 인해 우리는 언제 또다시 6·25동란과 같은 비극이 일어날지 모르는 마음의 불안을 항시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런 불리한 지정학적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차례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아와 저마다의 풍경화로 눈의 호사를 누릴 수 있게 해주니, 내 조국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참으로 축복받은 땅임에 틀림이 없구나 싶다.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가 사람살이를 얼마큼씩은 고달프게 하지만, 그래도 여태까지는 아우성을 쳐댈 만큼 아주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 않았던가. 이 선택된 복지福地에서 태어나 삶을 영위해 가고 있음이 얼마나 고맙고 또 감사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육십 평생이 되도록, 일상사에서 조금만 힘에 부쳐도 자신의 주어진 여건을 원망했었다. 왜 이리 환경이 열악하고 생존경쟁이 치열한 나라를 조국으로 두게 되었냐는 볼멘소리를 걸핏하면 입 밖으로 내뱉곤 했다.
문득, 위를 올려다보며 살지 말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살라고 한 생전의 어머니 말이 귓가에 스친다. ‘그래 맞아. 그동안 너무 배가 부르고 호강에 받쳐서 내뱉은 푸념이었구나.’ 지나간 날들을 가만히 헤아려 보니 적이 스스러워진다. 이제부터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고마워하고 주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로 생을 엮어가야겠다며 생각을 고쳐먹는다.
내 앞에 펼쳐지는 하루하루가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함이,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 가다 보니 비로소 병아리 눈물만큼씩이나마 깨달아진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저 인구에 회자하는 소포클래스의 명언이 새삼 절절히 가슴에 와닿는다. 아름다운 지구별, 태어남도 내 뜻이 아니었고 갈 때 역시 내 뜻은 아니겠지만 오늘 지금을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이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축복이리라.
이런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생의 환희를 찬미하는 노래가 나도 모르게 입가에서 흘러나온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
김규련수필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