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형 칼럼] 온 세상은 기적이다

하진형


지난해 퇴직 후 겨울에 얼어있는 시골의 땅을 밟았다. 집 주변 곳곳엔 쓰레기가 작은 산을 이루고 집 뒤 밭의 감나무는 몇 년째 퇴비 구경을 하지 못해 허기져 늙어가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구는 늘그막에 일 구덩이에 빠졌다는 말을 남기며 혀를 찼다. 30년 넘게 실컷 일속에만 빠져있던 퇴직한 친구가 편하게 지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는 즐거웠다.

 

쓰레기 더미를 보면서 막막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천천히, 차분히 치워나갔다. 어릴 적에 아버지께서 많지 않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힘들어하시던 모습을 기억하며 옆집 농장 어르신에게 묻기도 하고 인터넷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작업복과 장화를 가까이했다. 일은 끝이 없었다. 안 쓰던 근육은 뻐근하게 근육통이 되기 일쑤고 서툰 농사 준비는 시행착오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한 평씩의 공간이 깨끗해져 갔다. 뒤돌아볼 때마다 자신이 대견스러워졌고 땅이 낯익어져 갔다. 전정(剪定)이 진행될수록 감나무가 모양을 갖추어가고 잔가지를 걷어내면 흙이 보였다.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 괭이질을 하면 텃밭이 생겨나고 쓰레기 푸대가 늘어날수록 지구가 깨끗해졌다. 서툴지만 덩달아 나도 농부가 되어갔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낙엽을 정리하자 봄기운을 머금은 땅이 온갖 것들을 밀어 올렸다. 곳곳에서 놀라움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흙에서 어쩌면 그렇게 곱고 아름다운 꽃들이 형형색색으로 피어날까, 낙엽 속에서 늦잠을 자던 노란 아기 난초가 햇볕을 받자 파란 잎으로 변하더니 가운데에서 속살이 올라오며 노란 하얀 꽃들을 피우고, 마른 가지만 있던 배나무에선 웬 망울인가 싶더니 흰 배꽃이 튀어나왔다.

 

땅을 뚫고 올라오는 온갖 새싹, 노란 민들레, 개나리, 피보다 더 붉은 꽃, 파란 쑥, 처녀치마 등등 모든 것이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땅속이 온통 물감공장 같았다. 도저히 나의 얕은 지식으로는 설명을 할 수 없는 기적의 향연이었다. 초보 농부의 눈에 비친 봄날의 모든 것과 그 한켠에서 내가 숨 쉬며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었다. 이처럼 사계절마다 정확한 시침에 맞춰 오는 모든 것은 엄청난 기적이었다.

 

생각해보면 겨울은 멈추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얼음 밑 깊은 땅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뿐이다. 그 기운은 고통과 갈등을 떠나보내고 더 큰 기운으로 새로운 생명과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눈을 감고 생각한다. 어두운 밤을 지내고 감았던 눈을 뜨며 새날을 맞이함이 곧 기적이니 어찌 자연이 기적이 아니겠는가.

 

수개미 날개만큼 알고 있는 것을 지식이라고 뻐기다가 소리 없이 형형색색으로 피어나는 꽃 앞에서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문다. 가끔씩 무슨 큰 건물이 부실공사로 무너져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고 보도되기도 하는데 나는 아직까지 까치집이 무너져 내려 까치 새끼들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새로운 차()가 나왔다며 경쟁적으로 사서 과속하다가 교통사고를 일으켜 몇 명이나 죽었다는 소리는 들려도 수만 마리의 철새가 동시에 군무(群舞)를 펼 때도 공중에서 서로 부딪혀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이처럼 기적은 순간(瞬間)과 영겁(永劫)에 있고, 봄과 자연 등 온 세상에 있다. 만 가지 꽃으로 피어나게 하는 것이 부처고, 모든 것에 사랑이 깃들게 하는 것이 예수다. 때가 되면 피게 하고 또 때가 되면 익게 하는 것이 자연이고 어머니다. 대추를 익게 하는 천둥도 기적이며 소생되는 만물도 기실 자연의 품속에 안겨 있는 것이다.

 

아침에 맺혀있던 이슬방울이 낮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기적을 준비하고 계속하는 것이다. 근년(近年)에 섭리(攝理)와 이치(理致)를 나름대로 깨닫고 세상을 조금 알게 된 것도 기적이다. 땅을 밟고 산다는 것, 불어오는 바람이 나의 몸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가서는 어딘가로 간다. 이로 인해 나는 숨 쉬며 살아간다. 이처럼 내가 살아있는 것도 자연의 기적 덕분이니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교육부, 행정안전부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3회 코스미안상 금상

이메일 bluepol77@naver.com


작성 2022.04.15 10:50 수정 2022.04.1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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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