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나(任那)라는 국명에 대하여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비판을 늘어놓으면서 역사에 대해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 ‘임나(任那)’가 무엇을 표기한 것인지, 임나가 어디에 있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임나(任那)는 한반도 남부지역에 있었던 ‘가야’를 가리킨다고 하면서 “그러나 임나일본부는 없었다”는 말만 마치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한심한 일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任那(임나)’는 [맡나]라 일컬었던 국명을 ‘사음훈차+음차’하여 표기한 것이다. [맡/mot]을 한자 任으로 차자하고 [나/na]를 那라는 한자로 차자한 것이다. 다시 말해, ‘任那’는 [임나/imna]를 적은 것도 아니고, [미마나/mimana]를 적은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任那’를 한국에서는 “임나”라 하고 일본에서는 “미마나(みまな)”라 하지만 기실 둘 다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본래는 [ᄆᆞᇀᄂᆞ/mot-nor]라 하는 국명을 任那라는 한자로 차자하여 적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맡나/맏나]는 쉽게 부전(浮轉)된다. 발음이 서로 쉽게 넘나든다는 말이다. 한국인들에게 [맡나]와 [맏나]를 발음해 보라고 하면 똑같이 [만나(man-na]처럼 발음한다. 이를 두고 필자는 종성자음이 서로 부전(浮轉)된다고 하거나 [말/맏/맛/맞/맟/맡/만...] 등이 서로 부전된다고 설명한다. [맏놀/맏날]도 마찬가지인데, 이를 15세기 아래아 모음이 사용되던 시대의 표기법에 따라 표기한다면 [ᄆᆞᆮᄂᆞᆯ]이 될 것이다. 이 [맏놀]은 ‘으뜸’을 의미하는 [맏/mot]과 ‘너르다’는 의미의 [놀/nor]을 합친 말이다. 현대한국어 ‘맏아들, 맏누이, 맏딸, 맏며느리’ 등에 쓰이는 그 [맏/mot]과 넓은 곳을 가리키는 [놀/nor]이 합쳐져 [맏놀]이 된 것이다. [ᄆᆞᆮᄂᆞᆯ]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현대한국어에서는 [몯놀] 혹은 [맏날]과 같은 형태로 발현되고 표기도 그렇게 정착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모음이 혼교되어 [몯/맏]이 넘나들고 [놀/날]이 넘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몯놀, 몯날, 맏놀, 맏날...] 등과 같이 다양한 형태로 발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너른 땅 중에서 으뜸가는 곳을 [맏놀]이라 하였고, 그 [맏놀]을 한자 任과 那로 ‘사음훈차+음차’하여 적은 것이 바로 “任那”라는 얘기이다. 한자 任은 ‘맡을 임’자로 훈을 차용하여 적은 것이고, 那는 그 한자의 음만 차용하여 적은 것이다. 사음훈차(似音訓借)라는 용어는 진의훈차(眞義訓借)와 구별되는 개념으로 필자가 사용하는 전문용어인데, 이 글에서는 상술하지 않기로 하겠다. 사음훈차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분들은 필자가 쓴 다른 글들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모음 ‘ㅏ’를 ‘ㅗ’처럼 발음하는 경향은 영호남과 제주도 같은 남부지역 방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파리”를 “포리”라 하고, “맏이”를 “몯이”라고 발음하는 게 대표적이다. 그리고 ‘솔나무→소나무’와 같이 종성자음 [ㄹ] 소리가 약화탈락하는 사례도 아주 흔한 편이다. [ᄆᆞᆮᄂᆞᆯ/mot-nor]이란 지명을 사람들이 [맏노르, 맏노, 말로, 만노, 맏나, 말라...]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소리내기도 했을 거라는 말이다. 만약 그러한 일컫는 말들을 음차하여 적었다면 어떻게 적었을까?
간단하다. “末盧(말로)”라고도 쓸 수 있고 “만로(萬盧)”라고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국명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다. 마한(馬韓) 54국 중에 보이는 ‘만로국(萬盧國), 말로국(末盧國)’이 그러하다. 만로국(萬盧國)은 현 전남 광양시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고대소국이고, 말로국(末盧國)은 현 큐슈 북단의 마츠라(松浦)시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고대소국이다. 이 둘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지만 사실상 같은 국명을 적은 것이며 동일한 국가였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까지 중간정리를 하자면, ‘넓은 곳 중의 으뜸, 가장 넓은 곳’을 의미하는 말이 [맏놀]이었고, 그 [맏놀]이란 국명을 고대의 표기자들이 ‘음차+음차’하여 “만로(萬盧)” 혹은 “말로(末盧)”라 적기도 하고 ‘사음훈차+음차’하여 “임나(任那)”라 적기도 했다는 말이다.이들이 모두 같은 [맏놀]을 차자한 표기이기는 하지만 모두 동일한 국가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필자는 [맏노]라는 나라 즉, 임나(任那)가 현 전라남도 광양시 지역과 큐슈 북단의 마츠우라(松浦)시에 걸쳐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이는 개인적인 추측에 지나지 않는지라, 앞으로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 임나(任那)의 위치에 대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는 만로국(萬盧國)을 현 전북 옥구 또는 충남 보령지역에 비정하고 있으나, 필자는 전남 광양지역에 비정한다. 『삼국사기』 잡지에는 광양의 고명인 희양현(晞陽縣)에 대하여 본래 백제의 마로현(馬老縣)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맏놀]을 ‘음차+음차’하여 적으면 末盧 萬盧 등으로 쓸 수 있고, ‘사음훈차+음차’하여 적으면 ‘任那’라 쓸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馬路’ 역시 마찬가지다. 馬路는 末盧나 萬盧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신라 경덕왕이 마로현(馬路縣)을 희양현(晞陽縣)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희양(晞陽)의 희(晞)는 ‘마를 희’자다. 빨래 따위가 햇볕에 말랐다고 할 때 쓰는 글자가 희(晞)인 것이다. 희양(晞陽)의 晞 역시 [말/mor]을 사음훈차한 표기이다. 그러니까 마로현(馬路縣)과 희양현(晞陽縣)은 [맏놀]이라는 동일한 지명을 차자방식만 달리하여 표기한 것일 뿐이다. 차자표기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덮어놓고 신라 경덕왕을 비난하면서 모화사상에 빠져 아름다운 우리말 지명을 모조리 한자식으로 바꿔 놓았다고 하는데, 이는 결코 온당한 지적이라 할 수 없다.
지명을 비정할 때에는 그 변천 과정도 무시할 수 없는데, 만로국(萬盧國)→마로현(馬路縣)→희양현(晞陽縣)→광양현(光陽縣)→광양시(光陽市)의 변천은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말로국(末盧國)→말라현(末羅縣)→송포(松浦: 마츠라)의 변천 역시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임나(任那)는 한반도 남부 지역의 가야를 가리키는 게 아니고, 현 전남 광양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만로국(萬盧國)’과 큐슈 북단의 마츠라(松浦)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말로국(末盧國)’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다시 말해, 임나는 전남 광양시와 큐슈 마츠라(松浦)시에 걸쳐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인 것이다. 임나의 위치와 관련하여, 흔히 인용되는 것이 『일본서기』 숭신기 65년조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秋七月, 任那國遣蘇那曷叱知, 令朝貢也. 任那者去筑紫國, 二千餘
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위 문장을 많은 연구자들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가을 7월에 임나국(任那國;미마나노쿠니)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을 떠나 2천여 리, 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펴낸 『한글역주본 일본서기』에도 이렇게 해석해 놓았고. 강단사학을 식민사학이라고 비난하는 학자들 역시 위 문장의 해석에 있어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임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가야를 가리킨다는 잘못된 인식이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보니 이와 같은 엉터리 해석을 내놓게 된 것일 터이다. 임나가 대마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이러한 해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밑줄친 부분 “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里” 이 문장은 “임나는 축자국을 향해 2천여리 가면 있다.”는 뜻이다. 축자국으로부터 2천여리 떨어져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 한번 생각해 보자. “我去釜山”이라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직접 한번 해석해 보시기 바란다. “我去釜山”이란 한문문장을 ‘나는 부산을 떠난다’라고 해석하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부산으로 간다’라고 해석한다.
‘任那者去筑紫國’ 역시 ‘축자국을 떠난다’가 아니라 ‘축자국으로 간다(=축자국을 향해 간다)’고 해석해야 옳다. 비슷한 예륻 들어보겠다. 대전에 있는 사람들이 김해의 위치에 대해서 얘기할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보통 “김해는 부산으로 500리쯤 가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김해가 부산으로부터 500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대전에서 부산으로 500리쯤 가면 그 인근에 김해가 있는 것이다. 즉 부산과 김해 모두 화자(話者)가 있는 대전에서 50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임나(任那)는 『일본서기』를 편찬한 사람들이 있는 아스카(현 나라현 다카이치군 아스카촌) 지역에서 축자국을 향해 2천여 리 정도 가면 그곳에 위치해 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에 나오는 구절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위치한 곳이라면 불을 보듯 뻔하다. 다음 지도에서 보듯 큐슈의 마츠우라(松浦)시밖에 없다.
『일본서기』가 잘 설명해 놓은 문장인데, 후대인들이 해석을 순 엉터리로 해 가지고 임나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느니 대마도에 있었다느니 하고 헛된 주장을 펼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임나의 위치에 관해서는 당나라의 장초금이 쓴 『한원(翰苑)』이란 책에 실려있는 내용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한원(翰苑)』 번이부(藩吏部) 의 신라강역에 관한 기술에서 “국포자로(國苞資路) 지총임나(地摠任那)”라 하여 ‘나라는 자로(資路, =사로)를 포괄하고 땅은 임나를 총괄(總括)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덧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齊書云加羅國 三韓種也 今訊新羅耆老云 加羅任那 昔爲新羅所滅 其故今並在國南七八白里 此新羅有辰韓弁辰二十四國及任那加羅慕韓之地也.
『제서』에 이르기를, “가라국은 삼한의 일종이다. 지금 신라의 노인들에게 물으니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라와 임나는 옛날에 신라에게 멸망당했다. 그들의 옛 땅은 오늘날 나라의 남쪽 700~800리 되는 곳에 나란히 있다.” 이는 신라가 진한 변진24국과 임나 가라 모한의 땅을 가졌다는 것이다.
가라와 임나가 신라에 의해 멸망당했으며 그 옛 땅은 나라의 남쪽 700~800리 되는 곳에 나란히 있다고 하였다. 임나(任那)는 지금의 마츠우라(松浦)를 가리키고 가라(加羅)는 지금의 가라츠(唐津)을 가리킨다. 200㎞는 약 750리이다. ‘임나(任那)’가 현 마츠우라(松浦)이고 ‘가라(加羅)’가 현 가라츠(唐津)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한원(翰苑)』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 감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위 지도에서 보다시피 임나와 가라는 신라의 남쪽 700~800리 되는 곳에 나란히 위치해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 숭신기 65년조에 기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아스카 지역에서 축자국으로 2천여 리 가면 위치해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혔으며,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앞에서 만로국(萬盧國)과 말로국(末盧國)의 국명이 사실상 동일하며 차자방식을 달리하여 표기하면 임나국(任那國)이라 쓸 수도 있다고 한 바 있다. 그리고 이들이 단지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동일한 국가일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런데 『일본서기』 숭신기 65년조와 『한원』 번이부 신라조에 기록되어 있는 임나(任那)의 위치를 보건대 전남 광양보다는 큐슈 북단의 마츠우라(松浦)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 할 것이다.
물론 당시의 강역개념이 지금과는 달리 바다를 경계로 하지 않고 바다 이쪽저쪽 걸쳐서 존재했을 수도 있는 바, 필자는 임나와 가라가 아래 지도에 표시한 것처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으며, 왜 백제, 고구려, 신라, 일본 등과 뒤엉켜 혼재했던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맏노]는 “萬老, 末盧, 任那” 등으로 표기가 되었고, [가라]는 “葛, 加羅, 加耶, 駕洛, 角鹿” 등으로 표기가 되었으며 [담마]는 “伴跛, 但馬, 丹波, 蜻蛉” 등으로 표기가 되었을 것이란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별로 어렵지 않게 추측해낼 수 있는 일이다.
■ 임나(任那)의 이명(異名)에 대하여
앞에서 임나(任那)는 실제 당시 사람들이 [맏놀]이라 일컬었던 국명을 ‘사음훈차+음차’하여 적은 것이라는 점에 대해 논한 바 있다. 다르게 표기하면 萬盧(만로)나 말로(末盧)라 적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전남 광양시의 고명인 마로현(馬老縣)과 희양현(晞陽縣) 역시 같은 [맏놀]을 차자하여 적은 것이란 점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밖에 또 다르게 쓴다면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고대의 차자표기를 분석할 때에는 내가 2천년 전의 기록자라 가정하고 그 표기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가장 좋다.
(1)응유(鷹遊)
먼저, 응유(鷹遊)라는 표기가 있다.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 권3. 제3 탑상 ‘황룡사구층탑’ 편에는 신라 27대 선덕여왕이 부처님의 자비로운 힘을 빌려 이웃 나라의 침공을 방지하기 9층탑을 세웠다고 기록하면서 안홍법사의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 일부를 인용해 놓은 부분이 있는데, 해당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또 해동의 명현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제27대에는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올바른 도리는 있어도 위엄이 없어서 구한(九韓)이 침범하는 것이다.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침범하는 재앙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제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契丹), 8층은 여진(女眞), 9층은 예맥(濊貊)을 진압시킨다.”
신라를 침공하는 이웃나라들을 진압할 수 있을 거라며 1층부터 9층까지 탑의 각 층에 해당하는 주변국들의 이름을 열거해 놓았는데 제3층의 ‘오월(吳越)’은 대왜(大倭)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大倭, 大和, 尾張, 大泊瀨, 大針” 등이 모두 일본어에서 [오왈/오와리]라는 국명을 차자한 표기로 추정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여러 차례 논한 바 있어, 여기서는 상술하지 않기로 하겠다.
제5층의 ‘응유(鷹遊)’가 낯선 국명일 수 있는데, 사음훈차를 알고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표기다. 한자 鷹은 ‘매 응’자이고, 한자 遊는 ‘놀 유’자이다. [매놀]이라 하는 국명을 “鷹遊”라 적은 것이다. 鷹과 遊 둘 다 사음훈차한 표기이다. [맏놀]을 [마놀/매놀]이라 일컫게 되어 그렇게 차자한 것이다. 다시말해, [맏놀/mot-nor]이라는 국명을 萬盧(만로) 末盧(말로)라고도 적었고, 任那(임나)라고도 적었으며, 鷹遊(응유)라고도 적었다는 말이다.
(2) 응준(鷹準)
고려 충령왕 13년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에는 ‘鷹準(응준)’이라는 표기가 보인다. 바로 앞에서 다룬 ‘응유(鷹遊)’를 참고하면 ‘응준(鷹準)’도 별로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한자 準은 표준을 뜻하는 글자다.
한국어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말이 사어가 되어 사라져 버렸지만 일본어에는 그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표준이나 기준을 뜻하는 일본 고유어는 “노리(のり)”이다. 일본에는 “노리코(のりこ)”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많은데, 한자로는 “法子, 典子, 紀子, 律子, 規子, 憲子, 範子, 伯子, 準子”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들 이름표기를 통해 일본고유어 “のり(노리)”가 어떤 의미를 지닌 말인지 유추할 수 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졸저 『놀부와 노리코』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러니까 일본어로 “노리(のり)”라 하는 말을 準이라는 한자로 차자하여 적었다는 말이고. ‘鷹準(응준)’은 고대한국어와 일본어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었던 임나어에서 [매놀/매노리]라 일컬었던 국명을 한자로 차자하여 적은 표기라는 얘기다.
(3) 전라(前羅)
『양직공도(梁織貢圖)』에는 백제의 방소국(傍小國)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 중에 ‘전라(前羅)’라는 이름이 보인다. ‘전라(前羅)’의 前은 [맞]을 차자한 표기이다. 한국어로 앞쪽을 [맞]이라 한다. ‘맞은 편, 마주보다, 마빡(맞박=이마)’ 등에 쓰이는 그 [맞]이다. 일본어 ‘마에(まえ)’도 이들과 같은 어원에서 분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맞라]라 하는 국명을 “前羅”라는 한자로 차자하여 적은 것이다. ‘사음훈차+음차’이다.
(4) 매두라(梅豆羅)
『일본서기』 신공기에는 매두라국(梅豆羅國)이 나온다. 매두라국은 지금의 마츠우라(松浦)시에 있었다고 하는데 말라현(末羅縣; 마츠라 아가타)이라고도 했다 한다. [맏라]를 연진발음하면 [마드라]가 된다. 그리고 [마드라/매드라]는 쉽게 부전(浮轉)된다. 부전(浮轉)은 발음이 물위에 뜬 것처럼 쉽게 왔다갔다 넘나들었다는 말이다. 그 [매드라]를 “梅豆羅”라고 음차하여 표기한 것이다.
(5) 매라(邁羅)
『삼국사기』 잡지 제6 ‘도독부의 13현’ 중에 마사량(麻斯良)과 매라현(邁羅縣)이 있는데, 이 두 지명은 임나의 이명일 가능성이 있다. [맏라/맛라/맞라/맟라/맡라] 등은 쉽게 [맛라]를 연진발음하면 [마스라, 마사라, 마시라] 등과 같은 형태로 발현된다. 또 [맏라, 말라]에서 앞소리 종성이 약화탈락하면 [마라]와 같은 식으로 발현되고 모음혼교(母音混交)에 의해 [마라/매라]는 아주 쉽게 넘나들 수 있다. [매라]를 음차하여 “邁羅”라고 적었을 거라는 말이다. 한자 邁를 한국어에서는 “매”라고 읽지만 중국어나 일본어에서는 “마이”라고 읽는다.
(6) 목라(木羅)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조에 목라근자(木羅近資)라는 인명이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목라근자 백제장군의 이름이라고 되어 있지만, 필자는 정확한 설명이 아니라고 본다. 木羅는 [몯+나]를 음차한 표기로, 任那(임나) 末盧(말로)와 같은 국명을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즉, 그 장군이라는 인물이 임나지역 출신이거나 임나지역을 주된 무대로 활동한 인물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필자는 목라근자(木羅近資)가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과 동일한 이름이라고 보고 이 둘을 동일인물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하는 분은 졸저 『임나의 인명』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7) 목출(木出)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왕 18년(서기74)에는 목출도(木出島)라는 지명이 실려있다. 목출도의 목출(木出)은 [몯나]를 ‘음차+사음훈차’한 표기로 보인다. 木羅는 [몯나]를 ‘음차+음차’하여 적은 것이요, 木出은 [몯나]를 ‘음차+사음훈차’한 표기이다. 그러니까 필자는 목출도(木出島)가 대마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큐슈북단의 현 마츠우라(松浦)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8) 모야(毛野)
『일본서기』 계체기를 비롯한 여러 천황기에는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이라는 인명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필자는 근강모야신의 毛野(모야)가 ‘모노(もの)’를 차자한 표기로 그가 임나지역 출신이거나 임나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리고 이미 『임나의 인명』에 쓴 바와 같이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과 응신기 3년조에 나오는 “기각숙니(紀角宿禰)”, 웅략기 9년조에 나오는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가 모두 같은 이름을 차자만 달리하여 적은 것이며, 이들이 모두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9) 물(物)
『일본서기』 계체기 9년조에 “물부련(物部連)”이라는 인명이 보인다. 사람의 이름이라기보다는 물부(物部)를 관장하는 대신(大臣)이라는 의미로 추측된다. 먼저 한자 連은 일본어에서 ‘무라지(むらじ)’라고 하는 직함을 적은 것으로 아주 높은 대신을 가리킨다. 고구려의 ‘막리지(莫里支)’와 같은 말이라 생각하면 된다. 현대한국어로 하면 ‘맏이’에 해당하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部”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일본어로는 “베(べ)”라고 읽는데 필자는 이것이 고대한국어에서 사람의 이름 뒤에 많이 붙었던 인명접미사 [-부]와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거칠부(居柒夫), 이사부(異斯夫), 수을부(首乙夫)’ 등의 쓰인 그 “-부”이다. 그리고 部의 앞에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많이 쓰였는데 역시 어떤 지역 사람이란 것을 나타낼 때 ‘○○部, ◇◇部’ 같은 식으로 썼던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황전별(荒田別; 아나타베)은 아나토(穴戶) 지역을 관장하는 인물을 나타내고, 녹아별(鹿兒別)은 살마국(薩摩國)을 관장하는 인물을 나타내고, 좌백부(佐伯部; 사에키베)는 사에키 지역을 관장하는 인물을 나타낸다는 얘기다.
그와 마찬가지로 물부(物部; 모노베)는 [모노] 즉 임나지역을 관장하는 인물을 나타내고 있다는 말이다. 物의 일본 고유어는 모노(もの)이며, 물부련(物部連)이 임나지역을 관장하는 대신이라는 걸 나타내기 위해 한자 物로 차자한 후, 거기에 部와 連을 덧붙였다는 얘기다.
(10) 목협(目頰)
『일본서기』 계체기 24년 10월조에 목협자(目頰子)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목협(目頰)’은 일본어로 ‘메즈라(めづら)’라 하는 말을 표기한 것이다. 앞의 (4)번에서 설명한 매두라국(梅豆羅國)과 같다. 그러니까 목협자(目頰子)는 ‘매두라국’ 즉, ‘임나국’의 자손, 후손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라 할 수 있다.
(11) 모로(芼老)
『삼국사기』 신라본기 자비왕 14년조에 모로성(芼老城)이란 지명이 실려있다.
자비왕 14년(서기 471) 봄 2월, 모로성(芼老城)을 쌓았다.
자비왕 17년(서기 474), 일모성(一牟城)ㆍ사시성(沙尸城)ㆍ광석성(廣石城)ㆍ답달성(沓達城)ㆍ구례성(仇禮城)ㆍ좌라성(坐羅城) 등을 쌓았다.
이 모로(芼老)는 [ᄆᆞᆮᄅᆞ]를 음차한 표기로 임나(任那)와 같은 곳을 가리킨다. 즉 이 모로성은 지금의 큐슈 북단 마츠라(松浦)시에 비정된다는 얘기다. 『일본서기』 계체기 6년 12월조에 백제가 임나의 4현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4개의 마을 중에 ‘모루(牟婁)’라는 지명이 있다. ‘모루(牟婁)’ 역시 ‘모로(芼老)’와 마찬가지로 말로국 즉 임나국이 있던 현 마츠우라(松浦)시를 가리키는 지명이라 생각된다.
자비왕 17년조에 나오는 일모성(一牟城)은 현 이키섬을 가리키고, 사시성(沙尸城)은 현 사세보(佐世保)를 가리킨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소나라(素奈羅), 수나라(須羅羅)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성열성(省熱城) 활개성(活開城) 등은 모두 [ᄉᆞᄂᆞᆲ/snurb]이라는 지명을 차자한 표기로 현재의 큐슈 “사세보(佐世保)”를 가리킨다. 광석성(廣石城)은 『삼국사기』 열전 눌최전(訥催傳)에 보이는 노진성(奴珍城)과 같은 이름을 표기한 것이며, 『일본서기』 신공기 시세조에 보이는 하지전촌(荷持田村; 노토리타노후레)과도 같은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아사쿠라(朝倉)시 추월야조(秋月野鳥)에 남아있는 추월성터(秋月城迹)가 바로 그곳이다. 넓은 땅을 의미하는 [노돌/nor-tor]을 한국어에서 차자하여 적으면 노량(鷺梁)이나 노진(奴珍)이라 쓸 수 있고, [노돌/nor-tor]을 연진발음한 형태인 [노도리]를 일본어에서 차자하여 적으면 야조(野鳥; 노토리)라 쓸 수 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하는 분은 졸저 『임나의 지명』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일모성(一牟城)은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남거성(男居城) 또는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과 같으며,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에 나오는 남가라(南加羅)와도 같고, 『삼국사기』 열전 제5 박제상전에 나오는 ‘목도(木島)’와도 같은 것으로 지금의 이키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남그]를 후대인들이 “一木”이라고 표기하기도 했었고, 그 “一木”을 한자음 그대로 읽어 “일모성”이라 한 후, 그 [일모성]을 다시 음차한 표기가 일모성(一牟城)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본래는 넓은 곳이란 의미에서 [남그]라 하였는데, [남그]를 한자로 사음훈차한 표기 ‘木’이 등장하고 그 ‘木’을 “모/mo”라고 읽는 세력과 “키/ki”라고 읽는 세력이 번갈아가며 잠깐씩 그 지역을 뺏었다 뺏겼다 하는 바람에 지명에 일관성이 없어지고 혼란이 가중된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일본서기』 계체기 24년 9월조에 보이는 ‘이사지모라(伊斯枳牟羅)’ 역시 ‘壹岐’를 일본어에서 훈독한 후 그것을 다시 음차해 적은 형태이며 현재의 이키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12) 만노(萬弩)
『삼국사기』 열전 제1 김유신전에는 김유신의 부친 김서현(金舒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부임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종래의 학자들은 만노군(萬弩郡)을 지금의 충북 진천에 비정해 왔다. 『삼국사기』의 여러 기록들을 보면 그러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삼국사기』의 기록 자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만노군(萬弩郡)은 현 충북 진천에 비정할 것이 아니라, 임나국 즉 말로국이 있었던 현 큐슈 마츠우라(松浦)에 비정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이는 『일본서기』와 『일본서기』 같은 고대의 역사서에 실려있는 인명과 지명들을 파악함으로써 도출해낸 결과이며, 지면상 이 글에서는 다룰 수가 없어 아예 언급을 하지 않기로 했지만 『삼국사기』 기록 중에서 만노군(萬弩郡)에 관한 부분만큼은 『삼국사기』가 범하고 있는 심각하고 중대한 오류 중의 하나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13) 희견(希見), 여포어(女捕魚) 및 그 밖의 표기들
앞의 (4)번에서 『일본서기』 신공기에 나오는 ‘매두라국(梅豆羅國)’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거기에는 ‘진(珍;메즈라)’과 ‘희견(希見;메즈라)’, ‘여포어(女捕魚; 메도나)’ 같은 표현도 함께 등장한다. 그러한 표현들 역시 [ᄆᆞᆮ라] 즉, ‘임나’를 가리키는 말로 보인다.
앞의 (6)번과 (7)번에서 ‘목라(木羅)’와 ‘목출(木出)’도 [ᄆᆞᆮᄅᆞ/ᄆᆞᆮᄂᆞ]를 차자한 표기이며 임나를 가리키는 말일 수 있다고 설명하였는데, 그와 비슷하게 “紀生(기생)”이나 “奇生(기생)” 역시 임나를 가리키는 말일 수 있다고 본다.
[몯나]를 木出이나 木生이라 쓸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木生이라 표기한 것을 후대의 일본인들이 잘 모르게 되면서 木을 키(き)라고 훈독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훈독한 키(き)를 다시 紀나 奇 같은 한자로 음차하여 적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차자표기 분석이 『일본서기』 홍계천황(현종천황) 3년조에 보이는 ‘기생반숙니(紀生磐宿禰)’라는 이름이나 칠지도(七支刀)의 명문(銘文)에 보이는 백제왕세자 ‘기생성음(奇生聖音)’의 올바른 해독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일본서기』에는 무내숙니(武內宿禰)라는 인물의 이름이 여러 천황기에 걸쳐 수없이 많이 등장하는데 “武內” 역시 임나를 나타내는 표기일 수 있다고 본다. 무내숙니(武內宿禰)를 일본에서는 “타케우치스쿠네”라고 읽고 있지만, 올바르게 읽고있는 것이 아니라 본다. 본래 [모노손이]라는 이름을 차자한 표기이며 “모노소이”정도로 읽어야 올바르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이름은 칠지도 명문에 보이는 왜왕의 이름 ‘지조(旨造)’와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旨造(지조)’를 일본어에서 읽으면 “무네소(むねそ)”인 바, [몬나]지역 즉 임나지역 출신이거나 임나지역을 관장하는 인물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옛날 대마도주의 성씨가 ‘무네(宗)’씨였고 오늘날에도 그 지역에는 ‘무네(宗)’라는 성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 하는데, 그 ‘무네(宗)’라는 성씨도 바로 임나(任那)를 가리키는 [ᄆᆞᆮᄂᆞ]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인들은 任那를 “임나”라고 일본인들은 “미마나(みまな)라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다. 언어가 다르니까 그럴 수 있는 일 아닌가? 워낙 오래된 고대의 일인지라 본래의 이름이 뭐였는지 모르다 보니 한국인 일본인 모두가 잘못 읽을 수 있는 일인데 그게 뭐 대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국명 따위야 아무러면 어떠냐고 무시해 버리기 쉽다. 그래서는 안 된다. ‘任那’라고 표기된 국명 하나만 제대로 파악해내면 지금까지 풀지 못하고 있던 고대사의 수수께끼들을 하나둘 풀어나갈 수도 있는 일이다. 국명 하나만 올바르게 파악해내면 과거 200년 동안 식민통치를 했느니 안 했느니 하는 지겨운 논란 따위도 저절로 사라지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burkurta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