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칼럼] 불과 글

고석근

 

글이 있는 곳에 불은 꺼져 있고 신비가 있는 곳에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 조르조 아감벤

 

오래전에 고향집에 갔더니 어머니께서 마당에 서서 먼 산을 보고 계셨다. “엄마, 뭐해?”, “그냥.”

 

돌아가시기 두어 달 전의 어머니 모습이다. 어머니께서는 먼 산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우리가 어릴 적에 어머니께서는 자주 말씀하셨다. “너희들만 다 크면 훨훨 날아갈 거다!” 이제 우리가 다 컸는데, 걷기도 힘들어하시는 어머니.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참새 점쟁이가 그러는데, 내 병이 무병이라고 하더구나. 내가 점쟁이가 되면 너희들 앞길을 막을 텐데.” 그때 우리 아들들이 어머니에게 적극적으로 무당이 되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어머니가 무당이 되었으면 훨씬 더 건강하게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오랫동안 신경증을 앓으셨다. 예민한 성격에다 힘겨운 삶을 보내셔서 그랬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보릿고개. 어머니의 반평생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말했다. “글이 있는 곳에 불은 꺼져 있고 신비가 있는 곳에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는 오랫동안 불의 신비 속에 살아왔다. 하지만 글이 불을 꺼뜨려 버리고 문명을 일으켰다. 나는 학교에서 글을 배우며 신비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읽지 못했던 것이다.

아감벤은 말한다. “글이 있는 곳에 불은 꺼져 있지만 글은 불을 필연적으로 상기시킨다.” 뛰어난 시인, 작가들에게서 상기를 읽는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는 일상에서 신비를 경험하지만 의식하지 못한다.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언어가 되지 않는다. 언어가 되지 않으면 신비 경험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다. 나는 51세 때 신비체험을 했다. 5월 어느 날 밤이었다. 잠을 자다 깼는데, 내가 죽어가고 있었다.

 

심장은 마구 뛰고, 팔과 다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 내가 죽어가는구나!’ 그런데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일상이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 나 혼자 죽어 가는데, 내 마음은 밤공기처럼 고요했다.

 

어떻게 그렇게 죽음 앞에서 무심할 수 있었을까? 아마 내 몸의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약한 불꽃 같은 생각은 너무나 또렷했다. ‘어떻게 할까?’ 지금 옆에 자는 아내를 깨우면 놀랄 텐데.

 

아침에 죽어 있는 나를 보게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다음 날 깨어났다. 해마다 5월이 오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모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나는 그때의 죽음을 기억하며 해마다 새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차츰 죽음이 삶의 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언젠가 죽음이 온전한 삶의 모습으로 내게 올까? 인간의 몸은 물질이면서 에너지다. 실제의 몸은 에너지인데, 우리 눈에 물질로 보이는 것이다.

 

물질의 몸이 겪는 것은 글로 나타낼 수 있지만, 에너지의 몸이 겪는 것은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뛰어난 문학가들은 고도의 상징과 비유로 몸의 전체 경험을 표현한다. 이런 글이야말로 진정 뛰어난 글이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

 

-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를 꿈꾸며> 부분

 

나는 이제 신비의 글을 만나려 한다. 나 전체를 만나기 위해,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해.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6회 민들레 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hanmail.net


작성 2022.04.28 11:47 수정 2022.04.2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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