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 칼럼] 지명풀이 이림성(爾林城)

최규성

이림성(爾林城)’일본서기현종천황기와 흠명천황기에 등장하는 지명이다. 먼저 일본서기현종천황(홍계천황) 3년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해에 기생반숙니(紀生磐宿禰;키노이쿠하노스쿠네)가 임나에 웅거하여 고구려와 교통하였다. 그리고 서쪽으로 삼한의 왕이 되고자 하여 관부(官府)를 정비하고 수리해서 스스로 신성(神聖)이라고 했다. 그는 임나의 좌로나기타갑배(左魯那奇他甲背) 등의 계책을 써서 백제의 적막이해(適莫爾解)를 이림성(爾林城)에서 죽였다.{爾林은 고구려의 땅이다}. 그리고 대산성(帶山城)을 쌓아서 동도를 막고 식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차단하여 군사를 굷주리고 곤핍하게 하였다. 백제왕은 이에 크게 노하여 영군(領軍) 고이해(古爾解)와 내두(內頭) 막고해(莫古解)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대산(帶山)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생반숙니(生磐宿禰)가 군사를 내어 역습하였다. 기력이 더욱 강해져서 가는 곳마다 모두 깨뜨렸으며 일당백의 기세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병사가 다하고 힘이 다하였다. 생반숙니는 일이 원만히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임나로 돌아왔다. 그러자 백제국은 좌로나기타갑배 등 300여인을 죽였다


그리고 일본서기흠명천황 114월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름 4월 경진삭에 백제에 있는 일본의 사자가 바야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백제본기에는 41일 경진에 일본 아비다(阿比多)가 돌아갔다고 한다.} 백제왕 성명이 사자(왕인)에게 임나의 일은 칙을 받들어 굳게 지키겠다. 연나사와 마도의 일은 문책할 것인지 아닌지는 오로치 칙에 따를 것이다.”라고 말하고 고구려 노() 6구를 바치고, 별도로 사자에게 노() 1구를 주었다.{모두 爾林을 공격하여 사로잡은 노예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이림성(爾林城)’이란 지명이 실려 있지 않은데, 이처럼 일본서기에만 실려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이림은 고려(=고구려)의 땅이라는 주석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도대체 이림성(爾林城)’은 어디를 말하는가


종래의 한국 학자들은 일본서기가 허위날조로 가득찬 허황된 책이라 여겨 거기에 기록된 내용 자체를 아예 믿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일본서기는 일본의 학자들조차도 신뢰하는 이가 별로 없을 만큼 허황해 보이는 내용이 많은 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대의 기록 자체를 덮어놓고 부정해 버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 할 것이다


종래의 학자들이 이림성(爾林城)이 어디인지 추찰해 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한국인들은 대부분 고구려의 강역이 한반도 북쪽 지역과 만주 일대에 걸쳐 있었고 한강 이남에는 신라와 백제가 동서 지역을 분점하고 있는 상태였다고 알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남해안 섬들을 뺏고 뺏기는 싸움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구려백제 신라 세 나라가 거제도를 비롯한 남해안 지역의 섬들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면 , 미친 놈 아냐?’하고 코웃음 쳐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기본 상식만 있어도 누구나 아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어 의심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그 고정관념이 문제다.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만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있는데, 머릿속 깊이 박혀있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코앞에 있는 진실조차도 제대로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일본서기에 고구려의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림성(爾林城)’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려면 기본적으로 차자표기를 알아야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를 분점한 상태에서 한강유역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는 기본적인 상식부터 떨쳐내야 한다. 그 잘못된 기본상식, 고정관념부터 떨쳐내지 않으면 그 어떠한 진실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청맹과니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가 놀부와 노리코』 『국명풀이 신라란 책에서 원시지명어소 [/sur][/bur]이 합쳐진 것이 [슬벌/sur-bur]이며 그것을 徐羅伐(서라벌)’이나 徐伐(서벌)’과 같은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하기도 하였고, 그것이 오늘날의 서울이란 지명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라 설명한 바 있다. [슬벌]의 앞에 더 크다는 의미에서 []을 덧붙인 이름 [닥스벌]도 있었던 바, [닥스벌/tark-surbur]鷄林(계림)’이란 한자로 차자하여 적기도 했는데, 鷄林(계림)’이란 차자표기를 참고하면 爾林(이림)’이란 지명 역시 별로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슬블]의 앞에 거대한 것을 의미하는 []을 덧붙이면 [일스블이스블]이 되는데, [이스벌]爾林이라는 한자로 차자하여 표기한 것이다. 한자 에 해당하는 한국고유어가 수풀인데 수풀의 고형이 스블이다. 그러니까 거대하고 넓은 땅이란 뜻에서 [이스블]이라 불렀던 곳을 한자로 차자하여 爾林이라고 적었다는 말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爾林은 도대체 어디를 가리키는가


한국어에서 넓은 들판을 가리키는 []을 일본어에서는 [하라/はら]라 한다. [이스벌]이 일본어에서는 [이스하라] 정도로 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곳이 있는가? 있다


어디에? 대마도(對馬島). 


대마도(對馬島)에 있는 대마시(對馬市)의 예전 이름이 엄원(嚴原; 이즈하라)’이었다. 일본서기에 고구려의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爾林城(이림성)’은 바로 대마도의 이즈하라(厳原)’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니, 고구려의 땅이 어떻게 대마도(對馬島)에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필자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차자표기를 바탕으로 분석해 보니 이림성(爾林城)은 분명히 대마도의 엄원(嚴原; 이즈하라)과 상통하는 이름이었지만, 대마도가 어떻게 고구려의 강역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나 자신을 의심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차자표기로 된 지명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내가 직접 도출해낸 결론이었지만, 나 자신조차도 그 결론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나 역시 학교에서 배운 기존 고정관념의 틀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백제본기 진사왕 8년조,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즉위년조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석현성(石峴城)과 관미성(關彌城)이란 지명을 제대로 파악하고 광개토왕릉비 신묘년조의 내용과 대조해 보니 391년 신묘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공격한 곳은 한반도 남쪽의 섬들과 대마도, 그리고 큐슈 북쪽 해안에 위치한 마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백제 26대 성왕의 아들인 여창왕자(훗날 위덕왕으로 즉위)가 서기 554년에 신라와 전투를 벌인 관산성(管山城)’은 충북 옥천이 아니라 경남 거제도에 비정하는 것이 옳고, 성왕이 신라군의 기습으로 전사했다는 구천(狗川)’은 경남 통영시 견내량(見乃梁)에 비정하는 것이 옳다는 것까지 깨닫고 나서 보니, 이림성(爾林城)은 대마도의 현 대마시(對馬市)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황하게만 여겨지던 일본서기의 기록도 예사로 봐 넘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록 오류투성이이긴 하지만 일본서기역시 쓸모없는 내용으로만 가득채워진 책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 것이다


391년 신묘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이 현재의 대마도(對馬島)를 가리키고, 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남거성(男居城)’은 현재의 이키섬을 가리키며, ‘임나(任那)’는 현 마츠우라(松浦), ‘가라(加羅)’는 현 가라츠(唐津), ‘종발성(從拔城)’은 축자성(筑紫城)과 동일한 지명을 차자한 것으로 현재의 후쿠오카(福崗)시를 가리킨다는 점에 대해서는 백제 성왕이 전사한 곳은 어디인가』 『대마도와 일기도』 『임나의 지명같은 책을 참고하시기 바라고, 여기서는 더 상술하지 않기로 하겠다


12세기 후반 일본의 천태종 승려 현진(縣眞)이 썼다는 산가요략기삼한정벌기에는 대마도가 고구려의 목()인데 신라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曾対馬嶋高麗國牧矣新羅住之(일찌기 대마도는 고구려의 목이었는데, 신라가 거주하였다.)” 


종래의 연구자들은 대마도가 고구려의 목(, 행정치소의 단위)이라고 한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신빙성이 없는 기술이라 여겨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었으나, 결코 현진 스님이 멋대로 지어내서 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391년 신묘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백제의 요충지인 관미성(대마도)을 공격해 빼앗았고, 이후 고구려의 강역은 대마도를 비롯하여 거제도 등 주변의 여러 섬과 해안에 위치한 성()들에 뻗치고 있었던 것이다


, 일본서기웅략기 8년조에는 고구려왕이 신라를 지켜주기 위해 정에병사 100여명을 보내 축족류성(筑足流城)에 주둔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축족류성(筑足流城)’[닮발류]를 차자한 표기로, 다르게 차자하면 축자성(筑紫城)’이라 표기할 수도 있는 지명이며, 광개토왕릉비에 새겨져 있는 종발성(從拔城)’과도 상통하는 지명이다. “從拔[따르발/달발]사음훈차+음차한 표기이다


일본서기흠명기 23년조에는 대장군 대반련협수언(大伴連狹手彦; 오호토모노무라지사데히코)을 보내 고구려를 쳐서 깨뜨렸다고 되어 있다. 협수언의 침공에 고구려왕은 황급히 담을 넘어서 도망을 쳤으며, 협수언은 왕궁으로 들어가 고구려왕의 내전 침실에 있던 칠직장 등 많은 보물과 두 명의 미녀를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의 연구자들은 이 흠명기 23년의 기록이 완전한 허구 날조라고 여겨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고려(=고구려)’가 대마도를 가리키고 협수언의 공격에 황급히 도망쳤다는 고구려왕이 한반도 북부지역이 아니라 대마도 지역을 통치하던 인물이었다면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일본서기흠명기 23년조의 기록은 허구 날조가 아니라 더없이 정확한 기록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마도가 고구려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일본서기의 기록들이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차자표기를 바탕으로 추찰해 본 이림성(爾林城)’은 현 대마도 대마시의 고명인 엄원(厳原; 이즈하라)’과 일맥상통하고, 이는 삼국사기』 『일본서기』 『산가요략기』 『광개토왕릉비등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과도 잘 합치된다. 물론 유적이나 유물의 발굴을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실증이 되어야 하겠지만 관련분야의 연구자들이 본격적인 연구검토에 나서 준다면 머지않아 검증될 것이라 믿는다


대마도가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면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미친놈이라고 욕부터 하려고 덤비거나 국뽕에 취한 놈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한심한 학자들은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왕비에 기록된 내용이 무훈의 과장과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온 이들 역시 크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한반도 중부지역에서만 치열하게 싸웠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은 이제 그 잘못된 고정관념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391년 신묘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잔을 정벌했다는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은 삼국사기백제본기 진사왕 8년조에 나오는 석현성(石峴城) 관미성(關彌城) 등 여러 성들의 공함(攻陷)과 같은 사건을 기록한 것이며, 그 성들은 대마도(관미성)를 비롯하여 여수 돌산도(석현성), 거제도 등, 한반도 남해안과 큐슈 북쪽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며,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전투를 많이 벌였던 곳이 바로 그 지역임을 알고 올바른 역사 연구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burkurtar@naver.com

 

작성 2022.04.29 10:20 수정 2022.04.2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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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