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강진 땅, 금릉 경포대에서 오른 월출산

여계봉 선임기자

조선의 방랑 시인 김시습은 "남쪽 고을의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晴天)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라고 월출산을 찬탄했다.

 

월출산(月出山)은 남쪽의 소금강산으로 불리는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능선마다 형상이 다른 걸출한 바위는 월출산의 매력이다. 월출산에는 기암괴석들 사이로 탐방로 6개가 조성돼 있는데, 오늘은 남쪽 강진에 있는 금릉(金陵) 경포대(鏡布臺)에서 오른다. 금릉은 강진(康津)의 옛 이름이다. 금릉 경포대는 강릉의 경포대와 이름이 같지만 가운데 한자가 바닷가 포()가 아닌 천 포()자를 쓰는데, 계곡 물줄기의 모습이 무명베를 길게 늘어놓은 것처럼 우아하다고 하여 경포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강진 녹차밭에서 바라본 월출산


오늘 산행은 금릉 경포대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경포대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길을 잡고 주 능선에 오른 후 통천문을 거쳐 정상인 천왕봉에 도착한 후, 기암괴석이 많은 주 능선을 따라가다가 바람재 삼거리에서 금릉 경포대로 내려오는 코스로 걷기로 한다.

 

산 들머리 금릉 경포대 지구


2019년부터 무료로 운영되는 경포대주차장을 출발하여 월출산의 천황봉과 구정봉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2km 길이의 경포대 계곡을 따라 걷는다. 이 길은 계곡의 수량이 풍부하고 주변에 너럭바위도 많아 여름철 계곡산행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등산로 입구에는 탁족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금릉 경포대는 천황봉과 구정봉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이다.


신록의 계절에 접어들기 시작한 계곡은 싱싱한 푸른색을 띠는 나무들로 덮여 있다. 남쪽 나라답게 동백나무, 사스레피나무 등 아열대성 상록수가 산길 주위에 가득하고, 상류의 계곡과 작별하고 고도가 높아지자 숲은 조릿대가 무성하다. 비자나무와 소나무로 무성한 숲을 지나 하늘이 잠시 열리자 묵직한 월출산의 주봉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곧 파란 하늘과 맞닿는 월출산의 주 능선에 오를 것 같았지만, 가파른 돌계단과 나무데크가 계속 이어지면서 거친 산 오름이 계속된 후에야 주 능선에 올라선다.


주 능선에서 뒤돌아본 사자봉 능선


주 능선에서 정상을 가기 위해서는 통천문(通天門)을 거쳐야 한다. 통천문 삼거리에서 천황봉 정상까지 불과 300m 거리이지만, 콧등에 땀이 맺힐 정도로 가파르다. 통천문은 천황봉 정상에 오르기 위해 통과 의례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마지막 관문이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좁은 바위를 지나면 100m 거리에 정상이다.

 

통천문을 지나야 천왕봉에 오를 수 있다.


통천문을 지나 전망대에 서니 아래로 1m, 52m 길이의 구름다리가 120m 높이의 창공을 가르며 눈앞에 위용을 드러낸다이 다리가 시루봉 앞 봉우리와 매봉을 잇는 가교다. 천왕사에서 출발하면 이 구름다리를 지나서 사자봉 능선을 거쳐 통천문으로 이어진다.

 

정상 아래 전망대에서 바라본 구름다리


사람 하나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통천문을 지나자 월출산 최고봉인 천황봉(天皇峯)이 나타난다. 300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을 만큼 크고 평평한 바위로 이루어진 천황봉 정상은 밖에서 보는 월출산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인 이미지이다. 그래서 뾰족함과 평평함, 음과 양 양면을 다 지닌 월출산은 밸런스와 언밸런스가 오묘하게 조화를 이룬다멀리서 보면 악산(岳山) 같고 가까이서 보거나 품 안에 들어서면 어머니처럼 정 깊은 산이다.

 

월출산 천황봉은 땅끝기맥 123km 줄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정상에 오르면 영암의 황토밭과 반듯한 논, 동서로 길게 누운 영산강, 서해 목포 앞바다, 강진과 남해 다도해, 나주 구시가와 혁신도시, 광주 무등산, 장흥 천관산이 멀리 보인다. 영산강의 도도한 물줄기가 나주, 영암 일대의 평야를 적시며 목포 앞바다로 빠지는 모습은 거대한 용틀임 같다.

 

천황봉은 항상 안개 속에 가려 신비스러움을 간직해야 제맛인데 오늘만큼은 희디흰 자기 속살을 다 드러내고 있다. 윤선도가 '월출산 높더니만 미운 것이 안개로다'라고 읊었는데 오늘은 윤선도의 시조가 통하지 않는 날이다.


산정에서 바라본 경포대와 강진의 산하


월출산은 정상의 천황봉을 비롯해서 구정봉, 향로봉, 장군봉, 사자봉 등의 암봉이 마치 금강산을 떼어다 놓은 듯 닮았다 해서 '남한의 금강산'으로도 불리는데, 그래서인지 그 한 폭의 수묵화 속으로 발을 들여놓기가 더욱 조심스럽다.


산정에서 바람재로 내려서는 등로


천황봉을 내려서면 구정봉과 향로봉으로 향하는 실뱀 같은 등로가 기다린다. 천황봉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바위 능선들이 한 폭의 그림이다. 한참을 내려와서 조금 전에 올랐던 천황봉을 뒤돌아본다이곳에서 떠남은 저곳에서 만남이다. 밖으로 매달린 이 자리의 고단한 인연을 떨쳐내고 저편 세상의 새로운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 희열이다


수석전시장에서 뒤돌아본 천왕봉


월출산은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하나의 완벽한 예술품이다. 천황봉에서 바람재 삼거리까지 1.1km 주변에는 기암들의 열병식을 보는듯하다. 남근바위, 돼지바위, 매바위, 햄버거바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어느 조각가가 감히 이토록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 것이며, 어느 위대한 화가가 이렇듯 아름다운 명화를 그릴 것인가? 수많은 봉우리들이 기치창검(旗幟槍劍)을 두른 듯 높이 높이 솟아있고, 갖가지 기암괴석은 자연의 오묘한 조화 속에 그 위용을 서로 시샘하듯 자랑하고 있다.



남근바위는 건너편 구정봉 아래의 베틀굴과 환상의 콤비를 이룬다.


넓은 평지 위로 왼쪽은 향로봉, 오른쪽은 구정봉이 자리하고 있다. 구정봉은 사람 얼굴 형상을 하고 있는 월출산의 '큰 바위 얼굴'이다. 다니엘 호손은 단편 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 부와 지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성찰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인물이 '큰 바위 얼굴'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는 산을 사랑하고 산처럼 어진 인물들이 많아서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월출산 구정봉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


그 옛날 다산 정약용이 강진 땅으로 유배 가던 길에 이곳을 지나면서 뾰족한 봉우리들을 보고 고향 땅과 가까운 도봉산의 만장봉, 자운봉 줄기 같다는 느낌을 시로 남겼는데, 월출산은 설악산, 주왕산과 함께 한국의 3대 바위산으로 불린다. 그러나 월출산은 설악산과 같지 않고, 주왕산과도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준다. 설악산이 울창한 숲과 바위의 향연이라면 주왕산은 거대하고 둔중한 바위들의 산이지만, 월악산은 바위 하나하나가 다양하면서 다채롭고, 장엄하면서 아름답다.

 

월출산 아래 달의 이름을 빌린 '월하리'


바람재 삼거리로 내려와 경포대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이 길은 경포대가 있는 월하리로 내려서는 길이다. 월출산 아래의 마을들은 동네 이름조차 천년의 세월을 버리지 못했다. 월곡리, 월남리, 월하리, 월봉리.... 수백, 수천 년을 흙내음 속에 살다간 민초(民草)와 도공(陶工)들의 체취가 오롯이 살아있는 그네들이 마을 이름 첫머리에 달의 이름을 빌린 것은 차라리 필연일지도 모른다.

 

하산길은 초입부터 잡목이 울창해 햇빛 한번 보지 못하고 내려온다. 실낱같이 가느다란 계곡은 경포대 삼거리를 지나며 넓어진다. 계곡 길을 따라 동백나무 꽃잎을 밟으며 하산하는 꽃길이 그렇게 정겹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

 

이름처럼 달이 뜨는 순간 산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난다는데, 보름달 아래 월출산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그 날이 과연 올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


 









작성 2022.05.02 11:16 수정 2022.05.03 10:20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여계봉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2025년 4월 24일
2025년 4월 23일
2025년 4월 22일
나는 지금 '행복하다'
2025년 4월 21일
2025년 4월 20일
2025년 4월 19일
2025년 4월 18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6일
2025년 4월 15일
2025년 4월 14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2일
2025년 4월 12일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