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향에 들를 때면 예부터 이름난 ㅇㅇ찜닭을 먹으러 시장에 들른다. 모두들 으리으리하게 원조를 강조한 간판들이 자욱하여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오늘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분쟁의 발단은 누가 진짜 원조냐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도 저기도 원조란 간판 행렬만 사이좋게 시야를 메웠다.
그러나 같은 골목길에 이웃하던 인심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대신에 신경전이 오간다. 몇 군데를 슬쩍 물어보니 나름대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시장에서 처음으로 차린 집, 삼 대째 한결같은 맛을 낸다는 집, 자기가 직접 기른 친환경 식재료를 사용한다는 집 등등. 부분적인 원조임을 자부하는 것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정도의 비근한 차이로 살벌해지는 것은 누가 봐도 눈살을 찌푸릴 일이다.
상인회에서도 중재에 나서서 원조 표현은 모두 실내에서만 하도록 유도를 하고 있으나 이권과 직결된다는 믿음이 팽배해져서 아무도 나서질 않는다. 하는 수없이 골목 끝에 있는 간판이 없는 집으로 갔다. 원조 등쌀에 밀려 한쪽 구석에 차려놓은 집이다. 조용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지만, 노부부의 따뜻한 미소에서 시작된 그 맛은 환상적이었다. 이게 원조의 맛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고마움을 표현하고는 그길로 단골이 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유서 깊은 시골장터에서 이번엔 원산지분쟁이다. 사실 좁은 땅에서 제대로 정성을 다한 순수국내산은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간다. 곳곳이 ㅇㅇ참외요 ㅇㅇ사과이며 ㅇㅇ마늘 등을 팔고 있다. 나들이를 마치고 유명세를 하고 있는 품목을 구입하러 일부러 현지에 들려서 올 때가 있다. 생산지에서의 말들을 들어보면 백화점이나 몇 군데를 계약 공급을 하고 나면 겨우 이삼십 프로에도 못 미치는 양이 시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더구나 문제는 원산지를 속여도 소비자가 분간을 못 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하동에서 잡히는 ㅇㅇ재첩은 전국수요의 5% 정도라는데 어딜 가도 ㅇㅇ재첩이 아닌 곳이 없다. 사람들도 지나친 원산지선전이나 원조 주장이 불러온 화려한 간판 싸움에는 그다지 믿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유럽 등의 서양 문화권에서는 제아무리 간판이 커봐야 스케치북만 하다. 그것도 눈에 띄게 화려하거나 예쁜 장식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수수하기만 하다. 특히 명품가게인 피에르가르뎅이나 샤넬, 루이뷔통, 오마샤리프 등의 원조 가게에 가 보면 초행엔 못 찾을 정도로 드넓은 실내의 규모에 비해 간판의 크기와 모습은 조그마하며 색상도 거의 없다.
그리고 업체 간의 소모성 원조경쟁 따위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한 번이라도 매장이나 식당 등에 들러 자신의 취향에 맞는 물건이나 음식을 만나면 차츰 신뢰를 갖게 되어 평생 고객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장인과 고객이 만나서 진정한 단골이 되는 계기이다.
인간의 성향도 이와 닮아서 소위 스펙 사회란 늪에 빠져있는 작태를 자주 목격한다. 이는 간판과 배경이 판치는 부조리한 환경을 만들고 대단한 듯이 이력으로 도배를 하지만 실력이 자기선전에 턱도 없이 미치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알고 있다. 명함의 한 면에 허위사항과 위조도 일부 섞어 빈자리가 없을 정도의 과대포장으로 빼곡하다.
받는 자를 순식간에 무식한 사람으로 전락시킨다. 혹시나 해서 한두 줄 쳐다보면 역시나 좀도둑이란 감이 온다. 힘든 과정을 스스로의 노력과 정열을 바쳐서 이룩한 것이 아니라 돈으로 끌어모은 것들뿐이다. 겉보기 타이틀을 달고 거들먹거린다는 걸 느끼는 순간 모두들 실소를 하며 구겨버리거나 밟아버린다. 그도 모르게 그의 얼굴이 뭉개지는 순간이다. “역시 실력이 형편없는가 보군, 주장하는 게 이따윈데 뭘 맡겨도 또 말아 먹겠군” 하고 실망과 조소를 금치 못한다. 분명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조차도 모른다.
일례로 바뀌는 정권마다 상위층으로 다가갈수록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는 더욱 심해진다. 자기 라인을 만드느라 나라를 좀먹는 사이코들만 끌어모아 우글거린다. 국민과 국가 위에 그들이 앉아있다. 스스로 운이 좋아서 세금을 받아가며 취미생활을 하러 온 듯이 으스대며 허세 부리는 것만 물려받았다. 이는 마치 붕어빵 틀에서 매판마다 닮은 붕어를 찍어내듯이 대물림을 한다.
서양에서는 지금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하여 소위 지식층이나 사회의 지도자급이 제일 먼저 무장을 하고 앞장을 서지 않는가. 지도층의 지위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그들은 내가 국가로부터 입은 은혜를 갚을 때가 왔다고 말한다. 이런 걸 지켜보노라면 우리네 상위층의 작태는 참담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다.
어찌하여 그토록 철학이 없는지 실로 한심하다. 그러니 그들의 행위를 밥 먹듯 보고 있는 뭇사람들도 점점 세뇌되어 원조투쟁만 일삼는다. 인심은 고갈되고 미풍양속은 설 자리가 없다. 한시바삐 우리도 자기가 맡은 종목에 장인정신을 가지고 저마다 타고난 기질을 갈고 닦으면 틀림없이 명장이 되어 영원한 신뢰를 받을 것이며 부귀는 저절로 뒤따를 것이다.
이십 세기 후반이 되자 그간 왜곡되어온 이데올로기의 장벽들이 무너지고 세상은 정상화 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어떤 역사라도 정반합의 규칙을 피할 수 없었다. 마치 강이 마르면 바닥의 다양한 암초들이 드러나듯이 숨겨진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바로 아랍의 봄을 야기한 이슬람 민족의 갈등과 내분 속에 강한 민족주의자들의 부각이 전 세계를 우파성향으로 몰아갔고 또 다른 파괴와 공포를 불러왔다.
왜 똘레랑스인가? 계몽주의의 산물인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의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십일 세기를 맞이하자 프랑스의 리딩엣지들이 또 다른 세계의 질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지구촌의 아침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이되는 현상이 빠르게 목격되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이 시대에 이러한 풍조가 입에 오르내리는 걸 보고선 우리나라도 멀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드디어 우리문화의 해외 진출이라는 한류와 권력과 재산만 있으면 몰려나갔던 사람들의 역이민이 일어났다. 그리고 코리언드림을 이루려는 다문화의 국내유입은 피할 수 없는 세계화 소용돌이의 일부로 정착되어갔다.
그러나 모든 급작스런 변화가 그러하듯이 주변을 봐도 도처에 이런 상반된 문화의 견해차를 극복하지 못한 불협화음들을 보게 된다. 코리언드림을 가지고 온 외국인을 학대하는 파렴치한들을 목격하지 않는가. 이러한 자기중심의 이기주의와 추한 모습은 따돌림을 당한 한 집단이나 개인 관계에서도 비일비재하다. 특히 애완동물이나 화초 등과 같은 생명체까지도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양심으로 싫어지거나 병들고 시들면 가차 없이 버린다. 자기 자신이 병들어 있는 걸 모른 채 무차별 취급을 해댄다. 하지만 이런 병든 행위의 결과는 결국 자신에게로 되돌아와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보복을 당한다.
간판과 배경 등 외관이 전부가 아니듯 남들이 자기를 선택해주는 세상이다. 반듯하고 획일적인 벽돌담보다는 크고 작은 모양을 잘 엮어놓은 제주의 현무암 돌담이 왜 더 견고한지를 이해하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다른 인격체의 개성과 견해를 타산지석으로 삼는 이타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바로 작은 똘레랑스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안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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