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 칼럼] 지명풀이 다사진(多沙津)

최규성

 다사진(多沙津)이라는 지명의 출전 


일본서기에는 다사(多沙)’ 혹은 대사(帶沙)’라는 지명이 실려 있다. 다사(多沙)’ 혹은 대사(帶沙)’는 나루였으며, 백제와 일본 사이에 중요한 교역 통로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종래의 학자들은 섬진강 하류에 있는 한다사군(韓多沙郡, 현 경남 하동군)을 가리킨다고 말해왔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펴낸 한글역주본 일본서기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잡지에 河東郡. 本韓多沙郡岳陽縣. 本小多沙縣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 기록을 바탕으로 그렇게 비정한 것일 터이다하지만 필자는 이것이 잘못된 비정이라 생각한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다사(多沙)’ 혹은 대사(帶沙)’는 시모노세키(下關)시 바로 남쪽에 있는 키타큐슈(北九州)시의 모지(門司)”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옳다고 생각한다



본래 [ᄃᆞᄉᆞ/tosa] 정도로 일컬었던 지명을 多沙(다사)” 혹은 帶沙(대사)”라 차자하여 적었던 것이며, 임나 혹은 일본쪽에서는 土師(토사)”土佐(토좌)”라고도 쓰고, “門司(문사)”라고도 썼을 것이라 추측한다. 을 일본어로 ()”라 하므로 그렇게 차자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본래는 [tosa]라 일컫는 지명을 門司라고 차자하여 적었던 것인데, 후대의 일본인들이 훈독해야 할 글자를 잘못 음독하면서 門司모지(もじ)”라고 읽게 되었을 거라는 얘기다


그래서 多沙혹은 帶沙는 현재의 큐슈 북부에 있는 키타큐슈(北九州)모지(門司)”에 비정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지명을 언어적으로 분석해 봐도 그렇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다사(多沙)’ 혹은 대사(帶沙)’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교역 통로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었다. 그런데, 아래 지도에서 보다시피, 모지(門司)는 문외한이 그냥 지도상으로만 보아도 교역 통로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교역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



지명을 비정할 때에는 그에 연관된 지명들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다는 사실이야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줄 안다


반파(伴跛)와 기문(己汶


대사(帶沙) 혹은 다사(多沙)라는 지명이 나오는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그 주변에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국명이나 지명들이 여러 개 함께 실려있다. 우선 일본서기에서 대사(帶沙)’ 혹은 다사(多沙)’라는 지명이 나오는 부분을 발췌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계체기 711월조의 기록이다


겨울 11월 신해삭 을묘(5), 조정에 백제의 저미문귀 장군, 사라의 문득지(汶得至) 안라의 신이해(辛已奚) 및 분파위좌(奔巴委佐), 반파(伴跛)의 기전해(旣殿奚)와 죽문지(竹汶至) 등을 불러 칙명을 알리고, 기문(己汶)대사(帶沙)를 백제국에 주었다.  


반파(伴跛)와 기문(己汶)이란 이름이 보인다반파국(伴跛國)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다른 글에서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으니 길게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 본래 [/tarm]이라 일컫던 국명을 , 다마에 가깝게 발음하고 그것을 음차한 표기가 對馬(대마)’, 對馬를 일본어에서 [ᄃᆞᆷᄇᆞ]라 읽으면서 반파(伴跛; 도모바)’라 적기도 하고 但馬(단마)’ 또는 단파(丹波)’, ‘청령(蜻蛉: 돈보)’이라 적기도 했던 바, 반파국(伴跛國)은 대마도 일대를 중심으로 한때 세력을 떨쳤던 나라로 추정된다. 그 전성기에는 대마도 일대뿐만이 아니라 단마국(但馬國) 단파국(丹波國)이 있었던 현재의 교토(京都)시 인근 효고현 지역도 반파국의 영역에 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 국명의 유전자가 사실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반파국(伴跛國)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에 걸쳐 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임나(任那)가 전남 광양시와 큐슈 마츠우라(松浦)시에 걸쳐 존재하였고 가라(加羅)가 경남 김해시와 큐슈 가라츠(松浦), 그리고 일본열도 중부의 후쿠이현 쓰루가(頓賀) 지역에 걸쳐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듯이, 반파국(伴跛國)도 현재의 대마도와 효고현 단바(丹波)시에 걸쳐서 존재했을 수 있는 것이다. 





기문(己汶)은 현재의 이키섬(壹岐島)에 비정된다이키섬은 본래 넓은 곳을 뜻하는 [남그/normk]였고, 그것을 남거(男居)” 혹은 남거(南居)”라고 음차하여 적거나 목도(木島)”라고 사음훈차하여 적기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대마도와 이키섬은 고구려 신라 백제 가라 왜 일본 등 주변 국가들이 서로 뺏고 뺏기면서 그 지배주체가 자주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자체의 토착세력이 강해져서 오히려 주변국들을 위협할 정도로 강대한 국가였던 적도 잠깐잠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지배주체의 잦은 변화에 따라 그 지명도 심하게 오락가락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앞에서 말한 남거성(男居城)’ ‘남거한(南居韓)’ ‘목도(木島)’ 외에 남가라(南加羅)’ ‘일모(一牟)’ ‘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 ‘이사지모라(伊斯枳牟羅)’ 등도 동일한 이름을 차자만 다르게 한 표기라 생각된다


[/나므/남그]이란 한자로 차자했었는데 (mo)”라고 읽으면서 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 모사키모라)’라고 표기되기도 하고, ‘일모(一牟)’라 표기되기도 하고, 또 그 일모(一木)을 다시 후대의 일본인들이 ()”라고 훈독하면서 이키(いき)”가 되기도 하는 등, 지명에 그야말로 천변만화가 일어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키섬을 가리키는 그 수많은 표기 중에 己物(기물)’己汶(기문)’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자 에 해당하는 일본고유어는 키()이지만, 의 한자음은 모쿠(もく, moku)”이다. 의 한국한자음은 (mok)”이고 원래 중국한자음은 (mu)”이다. 일본어에서라면, [/ki][/mo] 중 하나만 사용해도 되는데 둘을 중첩하여 +라 하여 좀더 명확하게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어의 족발(+)’ ‘봉우리(+우리)’ ‘담장(+)’ ‘무당(+)’, ‘정수리(+수리)’ 등과 같은 형태의 고유어와 한자어가 중복 합성된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키무]라 하는 이름을 奇物(기물)” 혹은 己汶(기문)”이라고도 차자하여 적은 것으로 보인다. ‘기물(奇物)’이란 표기는 악성 우륵의 가야금 12곡에 나오는 제목 중 하나이며, ‘기문(己汶)’이란 표기는 앞에서 인용한 일본서기계체기 711월조에 보이는 지명이다


여기까지 중간정리를 하자면, ‘반파(伴跛)’는 대마도를 말하고 기문(己汶)’은 이키섬을 가리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계체천황이 백제에게 주었다고 한 일본서기기록 속의 기문(己汶)’대사(帶沙)’는 이키섬(壹岐島)과 모지(門司)를 가리킨다는 얘기인 것이다


대사(帶沙)’라는 지명은 일본서기계체기 83월조에도 나온다. 계체기 83월조에는 대사(帶沙)’ 대사강(帶沙江)’과 함께 또다른 지명이 여러 개 실려있다. 일본서기계체기 83월조에서 94월조까지의 기록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3월 반파(伴跛)가 자탄(子呑)과 대사(帶沙)에 성을 쌓고, 만해(萬奚)와 연합하여 봉수와 저각(邸閣)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하였다. 또 이열비(爾列比)와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고 마차해(麻且奚) 추봉(推封)과 연합하여 군사와 병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였다. 남녀를 포로로 삼고 마을을 노략질하니, 습격을 받은 곳은 살아남은 자가 드물었다. 포악하고 사치스러우며 사람을 괴롭히고 마구 학살하니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9년 봄 2, 갑술삭 정축, 백제 사자 문귀(文貴)장군 등이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이에 칙을 내려 물부련(物部連)을 돌아가는 사신에 딸려 보냈다.{백제본기에서는 物部至至連이라고 하였다.} 


같은 달, 사도도(沙都島)에 이르러 반파의 사람들이 원한을 품고 강한 힘에 의지하여 잔혹한 짓을 일삼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물부련은 수군 500명을 이끌고 바로 대사강(帶沙江)으로 나아갔다. 문귀장군은 신라를 거쳐 백제로 들어갔다


여름 4, 물부련이 대사강에서 머문 지 6일 되었을 때 반파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에 옷을 빼앗기고 가진 것을 약탈당하고 막사는 모두 불탔다. 물부련 등은 두려워 도망가서 간신히 목숨을 건져 문모라(汶慕羅){문모라는 섬이다}에 머물렀다


시모노세키(下關)와 키타큐슈(北九州) 사이에는 해협이 있지 강이 있는 건 아니잖은가? 하고 반박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는데, 필자는 당시 사람들이 그 좁은 해협을 강()이라 착각하기도 했고, 그래서 대사강(帶沙江)’이라고도 기록한 게 아닐까 추측한다


위 인용문에는 이미 앞에서 한번 본 바 있는 반파(伴跛)’가 나오고 자탄(子呑)’, ‘이열비(伊列比)’, ‘마수비(麻須比)’, ‘사도도(沙都島)’, ‘문모라(汶慕羅)’ 같은 지명이 함께 실려있다이들 지명을 전부 다 파악하기는 어렵고, 이 중에서 자탄(子呑)’, ‘사도도(沙都島)’. ‘문모라(汶慕羅)’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자탄(子呑)과 대사(帶沙


먼저 자탄(子呑)’이 어디인지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자탄(子呑)[+]을 차자한 표기로 추측된다. [/] 음이 유사하여 서로 넘나들었기 때문에 [곶넒/곧넒]은 쉽게 부전(浮轉)되었을 것이다. 일본어로 ()’라 하고, 노무(のむ)’라 한다. 그러니까 [코노무, 코노미]라 하는 이름을 당시 사람들이 子呑이라는 한자로 차자하였을 거라는 말이다. 둘 다 사음훈차한 표기이다


지금도 그와 같은 언어의 유전자를 사용한 지명이 있으니, 큐슈의 후쿠오카(福岡)현 키타큐슈(北九州)시 고쿠라키타(小倉北)구에 있는 허비정(許斐町; 코노미마치)”이 그것이다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자탄(子呑)과 대사(帶沙)는 가까운 곳에 있다. 그리고 둘 다 교역통로의 요지에 위치해 있다. 대마도를 거점으로 흥기한 반파국(伴跛國)이 이곳을 탈취해 성을 쌓고 일본과 신라에 맞섰다고 한 일본서기의 기술 내용에 정확히 합치되는 곳이다


사도도(沙都島) 문모라(汶慕羅


다음으로 사도도(沙都島)’란 지명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도도(沙都島)’는 일본의 야마구치(山口)현 하기()시 북쪽에 있는 히시마(肥島)’에 비정된다


필자의 책 여기가 임나다p 쓴 바와 같이, 옛날 사람들은 [삹마/sartzma]라 일컬었던 동일한 지명을 薩摩(살마)” “鹿兒(녹아)” “肥前(비전)”과 같은 식으로 차자방식을 달리하여 저마다 다르게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肥前는 한국어에서 살찔 비자다. [살ㅉ]라는 말을 라는 한자로 사음훈차하고, ‘맞은 편, 마주보다에 쓰이는 []이라는 말을 이라는 한자로 차자한 것이다. 다시 말해, ‘肥前[삹마/sartzma]를 적은 것으로 차자방식만 달리한 것일 뿐 鹿兒薩摩와 같은 이름을 표기한 것이며 동일한 국가를 가리킨다는 말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고 하니, [삹마]肥前이라 차자한 사례를 참고해 보건대, [사츠시마] 역시 沙都島(사도도)”肥島(비도)”라고 차자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말이다


그러한 지명이 있는가?

있다.

어디에?

앞에서 말했듯이 야마구치(山口)현 하기()시 북쪽에 있는 히시마(肥島)이다. 히시마(肥島)가 바로 사도도(沙都島)인 것이다



다음으로, ‘문모라(汶慕羅)’가 어디인지 추찰해 보기로 하겠다역시 결론부터 말하면, ‘문모라(汶慕羅)’는 시모노세키 서쪽에 있는 섬 육련도(六連島; 무츠레시마)’에 비정된다한자 은 일본어로 무츠(むつ·むっつ)라 하고, 은 츠레루(つれる)라 한다. 그래서 현재 일본인들은 육련도(六連島)무츠레시마(むつれしま)”라고 한다. 이 지명은 본래 원시지명어소 [/mor]이 중첩된 형태의 [맏말]이란 이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으뜸가는 마을이란 의미를 지닌 지명 [뭍모라]였을 것이며, 그것을 당시의 임나인들이 [문모라]처럼 발음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모라]라 일컫는 말을 음차하여 汶慕羅라는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뭍모라[]을 진의훈차하여 적으면 한자 으로 쓸 수 있다. 한자 의 한국발음은 같다. 그래서 혼동이 발생했을 수 있다. 본래 임나인들은 [뭍모라]陸連島라 차자하여 적었던 것인데, 후대의 일본인들에게 전승되는 중에 六連島라고 변형된 표기가 등장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의 와기자(訛記字)인 셈이다. 한국어에서는 이 헷갈릴 가능성이 낮은 편이지만 일본에서는 음독할 경우나 훈독할 경우 모두 헷갈릴 가능성이 높다. ‘문모라(汶慕羅)’를 현재의 육련도(六連島:무츠레)”에 비정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추론을 바탕으로 도출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서기계체기 83월조에서 94월조 사이에 나오는 문모라(汶慕羅)’는 시모노세키(下關) 서쪽에 있는 육련도(六連島; 무츠레)’라는 섬을 가리킨다는 얘기다





이들의 위치는 일본서기에 기술된 내용과 잘 합치된다. 물부련(物部連) 일행이 사도도(沙都島)에 이르러 반파국의 난동과 만행에 관한 소문을 들었고, 대사강(帶沙江)에 들어갔다가 자탄(子呑)과 대사(帶沙)에 성을 쌓아놓고 지나는 배들을 공격 약탈하기 위해 기다리던 반파국 군사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간신히 도망쳐 머물렀던 섬이 문모라(汶慕羅)’라고 했든데, 그 이동경로가 눈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반파(伴跛)와 기문(己汶), 자탄(子呑)과 대사(帶沙), 사도도(沙都島)와 문모라(汶慕羅), 거의 모든 지명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들어맞는 것이다. 지명을 비정할 때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 임나(任那)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덮어놓고 한반도 남부에서만 찾으려고 하다 보니, 섬진강 하류에다 갖다붙여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엉터리 비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임나(任那)는 큐슈 북부 말로국(末盧國)이 있던 곳, 현재의 마츠우라(松浦)시를 가리키며, 반파(伴跛)는 일본인들이 [토모바(ともば)]라 일컫는 지명을 차자한 표기로 대마도(對馬島)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고 보아야 대사(帶沙)’라는 지명도 제대로 눈에 들어올 것이고, 그곳이 현재 어디쯤인지도 똑바로 알게 될 것이다. 기본적인 추론 자체가 잘못된 상태에서 백날 유물 유적을 발굴해 본들 엉터리 해석으로 꿰맞추려 들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엉터리로 해석한 그 유물을 증거라고 내세우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데에 앞장서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다사(多沙)’ 혹은 대사(帶沙)’는 큐슈 북부 키타큐슈(北九州)시의 모지(門司)’에 비정하는 것이 옳으며, 이는 계체기 등에 나오는 다른 연관 지명들과도 잘 합치되는 곳이라는 게 이 글의 결론이다


일본서기계체기 23(서기 529) 3월조에 나오는 다사진(多沙津)’이나 신공기 505월조에 나오는 다사성(多沙城)도 마찬가지다현재의 키타큐슈(北九州)시 모지(門司)구에는 모지항(門司港)과 모지성터(門司城迹)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다사진(多沙津)과 다사성(多沙城)의 유적이라 생각된다. 물론 현재의 모지항보다는 구모지(舊門司)500년대의 다사진(多沙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할 것이며, 다사성(多沙城) 혹은 대사성(帶沙城)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증축되거나 개보수되기도 했겠지만 그 흔적은 현재의 모지성적(門司城迹)에 그대로 남아있다 할 것이다. ‘다사(多沙)’ 혹은 대사(帶沙)’가 섬진강 하구의 한다사(韓多沙, 현 경남 하동)’를 가리킨다는 잘못된 지명비정을 그대로 신뢰하여 엉뚱한 연구에 시간과 열정을 허비해 오신 분들은 이제부터라도 방향을 올바르게 잡고 제대로 된 연구를 해주시기 바란다.

 

 

다사성(多沙城)으로 추정되는 큐슈의 모지성터(門司城迹)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burkurtar@naver.com

 

작성 2022.05.06 10:23 수정 2022.05.06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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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