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모래 한 알에 온 우주가 다 있어라

이태상

 

2022년 5월 20일자 미주 뉴욕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 삶의 뜨락에서] 칼럼 '조그만 돌' 필자 이용해 수필가는 "우리의 삶에서 큰 것만 바라보고 작은 것을 지나칠 때가 많이 있"다며 "내 발 앞의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적고 있다. 

[삶의 뜨락에서] 조그마한 돌

이용해 수필가

사람들은 태산이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보다는 조그마한 돌에 걸려 넘어져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저의 친구 중에 아주 건강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같이 테니스를 치면 코트를 휙휙 날아다니는 것처럼 몸이 빠르고 기운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보고 “아니 인삼으로 깍두기를 담가 먹었나 어디서 그런 힘이 생기지”하고 놀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올해 초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서로 “아니 그렇게 건강하던 그가 어찌 된 것이지”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그가 작년에 넘어져 뇌에 출혈이 생기고는 내리막길을 가게 되고 몸이 빨리 나빠지면서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건강하던 친구가 자그마한 돌에 걸려 넘어져 세상을 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의 장인어른도 100세를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100세 생일을 며칠 앞둔 날 은행에서 나오다가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지셔서 뇌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에는 큰 사고 보다 작은 일로 잘못되는 일이 훨씬 많습니다. ‘킬리만자로의 눈’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해리도 하마나 사자의 습격으로 죽은 것이 아니고 아프리카 잡목의 가시나무에 다리가 찔리고 염증이 심해져서 세상을 떠납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주인공 파울 바이머도 그 심한 폭격이나 육탄전에도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때에 보초를 서러 나갔다가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납니다. 아주 작은 사고입니다. 그리고 며칠만 지나면 전쟁이 끝나 집으로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속담에 바늘구멍이 둑을 무너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사소한 일이 대사를 망치는 것입니다. 100년을 끌었다는 포에니아 전쟁에 카르타고 성은 견고했습니다. 성안의 군량은 10년을 먹을 것이 있다고 했고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돈 많은 귀족, 아스틸락스가 카르타고 시의 자세한 지도를 로마군에 팔아먹었을 때 난공불락의 카르타고 시는 함락되고 정말 지옥과 같은 참상이 벌어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경호대장인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실은 일개 연대 병력의 수준으로 경호했습니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수도경비사령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부의 작은 적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배신이 연대 병력의 경호를 허물어트리고 대통령은 무너졌습니다. BC 44년 3월 15일은 로마의 역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그 많은 전쟁에 이기고 로마의 영토를 넓혀주었던 대장군 줄리어스 시저가 암살을 당한 날입니다. 그 많은 전쟁에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던 시저는 그날 원로원에 나가지 말라는 부인의 청을 물리치고 원로원에 나갑니다. 그리고 카시오스 부르터스 일당의 칼에 맞아 쓰러지고 로마의 역사는 바뀝니다. 그저 그날 원로원에만 안 나갔어도, 자그마한 돌을 조심했어도 로마의 역사, 세계사는 변했을는지 모릅니다.  
 
‘대야망’이란 소설의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온갖 굴욕을 다 참으면서 일본을 통일하고 대장군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람의 초대에 가서 저녁을 먹고 식중독으로 대장군의 삶을 마감합니다. 크나큰 전투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큰 것만 바라보고 작은 것을 지나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작은 돌에 걸려 죽을 때가 많은데 그 작은 돌을 보지 않고 저 큰 산이 무너져 나를 덮치지 않을까 하고 염려를 하며 살아갑니다. 알프스산이 내 머리 위로 무너질 염려는 없습니다. 바로 내 발 앞의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자 이제, 지난해 2021430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우리 되씹어볼거나.

 

[이태상 칼럼] 가라앉지 않으려면 헤엄쳐라 Sink or Swim (5): 카오스Ode to the Chaos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갔을 때 같은 부대의 한 전우에게 매주 이대학보가 우송되었다. 이화여대 다니는 그의 여자 친구가 보내 주는 것이었다. 하루는 심심풀이로 이대학보 한 장을 전우로부터 얻어보니 <편지>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칼럼의 반은 교수가 또 다른 반은 학생이 쓴 짤막한 글이었다. 교수가 쓴 글의 요지는 자기도 젊었을 때는 낭만적인 편지를 쓰기도 받기도 했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사무적인 편지밖에는 주지도 받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여학생의 글은 도발적이었다. 우리가 평상시 대화를 통해서도 그렇지만 편지로는 더 많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아마도 인간의 약점을 미화시키려는 우리 모두의 본능적 노력일 것이라고 풀이하며 아울러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최소한 편지를 받아 읽는 순간만큼은 보낸 사람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그 글에 글쓴이의 인격과 개성이 나타나는 거라고 알고 있던 나는 이 글을 쓴 여학생이 솔직하고도 겸허한 마음과 성격의 소유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바로 이 여자다! 내가 꿈꾸던 구원久遠/救援의 여인상女人像, 나의 코스모스이렇게 외치면서 나는 이 여학생에게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코스모스가 빨리 꼭 받아볼 수 있도록 등기 속달 우편으로 편지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윤동주의 서시김소월의 초혼윌리엄 워즈워드의 내 가슴 뛰놀다 My Heart Leaps Up’ by William Wordsworth (1770-1850), 그리고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 (1757-1827)천진무구(天眞無垢)함의 조짐兆朕Auguries of Innocence’에서 인용한 시구詩句

 

모래 한 알에서 세계를,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볼 수 있도록

한 손에 무한無限

한 순간瞬間에 영원永遠

잡으리라.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이 같은 시구詩句들을 나무판에 정성껏 새겨 보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베토벤 교향곡 전집,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Winterreise’, 모차르트의 요술피리Magic Flute’, 흑인 영가 黑人靈歌 Negro Spirituals 선집選集 등 레코드판은 물론 포터블 전축까지 선물로 보냈다.

 

시간은 흘렀지만, 답장은 없었다. 상심하고 있던 어느 날 드디어 답장이 왔다. 육 개월 만이었다. 여학생의 집 주소가 겉봉에 적혀 있었다. 고대하던 주말에 부대에서 외출을 나온 나는 가슴 설레며 상상으로만 그리던 코스모스의 집을 찾아갔다.

 

나의 코스모스 소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숨이 막혔다. 첫 상봉의 그 황홀함이란 정말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소녀의 아버님께서는 주옥같은 시를 쓰시던 저명한 문인이셨는데 6.25 한국동란 때 납북拉北되셨고 유명한 소설가 어머님과 여동생과 교외에 있는 그림 같은 집에 살고 있었다.

 

소녀는 흥분해 있었다. 그동안 내 편지를 받으면서 나를 모델로 쓴 단편소설 푸른 제복의 사나이를 유한양행에서 발행하던 월간 잡지 <가정생활> 신춘문예 공모에 응모했는데 입선했다는 통지를 방금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녀는 덧붙여 말했다.

 

받게 될 상금으로 지성 월간지 <사상계> [그 후로 이 잡지에 나는 기고도 했었고 부완혁 대표로부터 무보수 게릴라 편집장을 맡아 달라는 청을 받고 그 당시 근무하던 회사 일로 일본 출장을 다녀온 다음 일을 시작하기로 했었는데 내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대학 후배 김지하 씨의 담시譚詩 오적五賊필화筆禍 사건으로 사상계는 폐간되고 말았음]를 정기 구독 신청해 부대로 보내 드릴게요.”

 

그 며칠 후, 나는 소녀에게 줄 파카 만년필 세트를 갖고 시상식장에 찾아갔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수상자 본인이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상장과 상금을 대신 받아 소녀의 집으로 가 어머님께 전달했다.

 

세 번째로 소녀의 집을 방문했던 날, 초여름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뜰에 있는 앵두나무에서 소녀는 앵두 두 알을 따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소녀는 자신이 한 행동이 어떤 일을 저지른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소녀가 건넨 앵두 두 알이 소녀의 순결한 동정童貞의 상징으로 여겼었는지 앵두 두 알을 받아 쥔 내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소녀가 들고나온 우산을 같이 쓰고 우리는 서로 가쁘고 뜨거운 숨을 나누면서 버스 타는 곳까지 배웅을 받고 그다음 주말에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코스모스와 헤어져 나는 용산에서 부대로 돌아가는 마지막 미군 버스에 올랐다. 내 가슴 주머니에는 코스모스가 전해준 앵두 두 알이 있었다. 버스는 술에 취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한국군 카투사들로 초만원이었다. 미군 병사는 단 한 명만이 눈에 띄었다.

 

저 양키 혼자 있잖아. 기분도 좋지 않은데 패 버릴까?”

, 재수 없는 놈들.”

그래그래. 양키놈들은 죄다 재수가 없어. 지네 나라로 꺼져버리라고 해.”

 

한국군 카투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얌전히 앉아 있는 미군 병사를 향해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국군 카투사들은 어느 정도 영어를 할 줄 알지만 한국말로만 욕을 해대고 있었다.

 

그만 들 합시다. 비겁하지 않소.”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한국말로만 미군 병사를 향해 욕지거리하던 카투사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소리 질렀다.

 

, 비겁하다고? 다시 한번 말해 봐.”

우리 모두 카투사잖소. 한국말로만 미군 병사에게 욕하는 것은 비겁하단 말이요.”

 

이렇게 내가 대답하자 누군가가 또 외쳤다.

 

거기, 운전사, 차 세워.”

 

영문도 모르는 운전기사가 차를 세우자 한국군 카투사 대여섯 명이 나를 버스에서 끌어내렸다. 차 밖으로 끌려 나온 나는 한국군 카투사들로부터 가타부타 말도 없이 몰매를 맞기 시작했다. 주먹이 날아와 얼굴에 박히고, 발길질이 난무했다. 고스란히 나는 뭇매를 맞았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미군 병실이었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온몸에는 멍이 들어있었으며, 붕대까지 칭칭 감고 있었다. 수많은 주먹질과 발길질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분하다는 생각보다 나는 한국군 카투사들이 가엾다는 생각이 앞섰다. 한국군 카투사들이 평소에 미군 병사들로부터 갖은 천대와 모욕을 당하고 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분풀이 화풀이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19612월 자원하여 군에 입대한 나는 논산에서 훈련을 받고 대구 근처 영천이란 곳에 있든 부관학교를 거쳐 수도사단 비행 참모부에 배속되었다. 바다에 몸을 던진 후유증으로 척추수술을 받고 코르셋을 한 몸으로 입대한 까닭에 나는 논산훈련소에서도 또 부관학교에 가서도 심한 훈련은 받지 않았다. 그런 탓인지 나는 교관과 훈련병들로부터 해인사 주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군과 한국군 정찰기와 헬리콥터가 많이 이착륙하는 비행장에 근무하면서 나는 미군과 한국군 장교들 사이의 통역을 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미8군 사령관의 눈에 띄어 나는 주한미군에 소속된 한국군인 카투사로 전속되었다. 내가 복무하게 된 곳은 경기도 부천군에 있던 미화학창과 547공병단이었다. 이 부대에 미군 외에 수백 명의 카투사, 그리고 한국 민간인들이 고용돼 있었다.

 

한국군에서 파견된 한국군 소령 이하 간부 장교와 상사, 중사, 하사, 병장들 통솔하에 카투사들은 부대의 모든 궂은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식당 식기를 닦거나 청소하는 일부터 풀 깎고 길 닦으며 짐 부리고 나르는 온갖 잡일들을 노예나 머슴같이 하고있었다.

 

슬리키 보이즈Slicky Boys’라고 좀도둑이라는 손가락질까지 받아가면서그래도 한국군보다 비교도 안 되게 보급물자가 풍부했고, 생활시설이 좋고 편해서인지 카투사로 입대하지 못해 갖은 을 대가면서 야단들이었다. 나도 처음엔 일반 한국군 카투사들처럼 몹시 분개했다. 미군 병사들의 너무도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멸시를 눈뜨고 볼수 없었고, 모멸적인 언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이것이 다 약소민족의 설움이라면 설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모에 대해 정식으로 떳떳하게 항의하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도둑질 등 나쁜 짓을 많이 하다 보니 미군도 할 말은 있는 셈이었다. 우리 자신의 처신을 사납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는 카투사 전우들에게 공개서한을 돌렸다.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나 한국인 군인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인간답게 행동하고 살아야 사람대접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미군에게 우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훌륭한 군인사절이 되어보자고 했다.

 

그러자 나는 부정부패와 모든 악습을 조장하고 지령하는 한국군 장교와 병장들까지 카투사 상급자들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나를 신임하는 미군 사령관에게 간청해서라도 한국군으로 돌아가라는 경고장을 몇 차례 받았다. 그렇다고 내가 혼비백산 魂飛魄散 달아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네 목숨 아깝거든 당장 그렇게 하라.”

 

어느 날 저녁, 한 일당이 나를 불러 냈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사회에서 좀 놀았다는 깡패 출신들과 태권도, 유도 유단자들로 구성된 하수인 일당이 나를 부대 뒤 야산으로 끌고 갔다. 호랑이한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옛말을 잊지 않아서였는지 언제나 큰일을 당하면 나는 정신을 더욱 바짝 차리곤 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운동회 날이었다. 청군, 홍군으로 갈라 뛰는 릴레이 경주에서 팀의 마지막 주자로 뛰게 된 나는 바로 전에 있었던 축구시합에서 유리조각에 발을 베어 한 발을 붕대로 감은 채 평소보다 더 빨리 뛰어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피로 물든 붕대가 뛰는 동안 풀어져 승리의 테이프로 휘날리는 가운데 우레와 같은박수를 받으며

 

초등학교 때부터 기계체조로, 중학교에서는 유도, 대학에서는 태권도로 단련했다지만 나보다 체구도 크고 몽둥이와 칼까지 든 일당과 내가 맞수가 될 수는 없는 형세였다. 하긴 유단자들과 자주 대결하면서도 나는 급수나 단수를 따지 않았었다. 초단수超段數 를 고집해 단수를 초월해보겠다는 고집이기도 했다. 세상살이에 서도 정직 이상의 책략이 없다든가, 무기교無技巧가 최상의 기교라 하지 않든가.

 

십여 명에게 둘러싸여서도 나는 그들을 강자가 아닌 똘마니나 약골들로 볼 수 있었다. 싸울 때는 어떤 싸움에서든 주먹이나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거나 말 한마디 입 밖에 내뱉기도 전에 이미 승부가 결정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서로 마주 보는 눈싸움에시 기가 먼저 죽는 쪽이 진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몸집은 작아도 담기膽氣가 더 있었는지 나는 일당을 일시에 제압했다.

 

한바탕 해치우고 나는 부대로 돌아와 한국군 카투사 전원에게 투표로 신임을 물었다. 만일 대다수가 내가 하는 일이 못마땅해 불신임 투표를 한다면 내가 자진해서 떠나겠노라고 했다. 그랬더니 절대다수가 떠나지 말고 혁신적인 과업을 계속 추진 완수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군으로 귀대 발령이 난 일당 중에서 나를 찾아와 사정하는 하사관들은 미군 사령관에게 청원하여 발령을 취소시켜 부대에 남도록 했고, 파견대장을 포함한 장교들만 추방되었다.

 

 

그 후로 부대에서는 떠나버린 카투사 파견대장 후임으로 다른 한국군 장교가 부임해오는 것을 거절하고, 나를 일등병에서 2계급 특진시켜 책임 하사관NCOIC Non-Commissioned Officr In Charge으로 임명하여, 파견대장 업무를 수행토록 했다. 우리 자체 내부 수술을 마치고 카투사의 기강을 바로잡은 후 이번에는 미군을 상대로 나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카투사의 권익을 위해 한 번은 오만방자傲慢放恣한 미군을 깨우쳐 보려고 모든 주한미군 장사병들에게 영문으로 공개서한을 띄웠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다. -소 냉전체제 하에 남한을 미국의 최전방 보루로서 확보하기 위한 것이지 구세주나 산타클로스처럼 자선慈善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돕는다는 미명 하에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화 하거나 예속시키자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한국인의 단점과 결점을 찾아 흉보면서 한국인의 자존심을 짓밟아 반미감정을 불러일으키자는 것은 그 더욱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인격보다 제 부모나 나라의 힘을 과시하고, 뽐내고 허세를 부리는 것 같이 유치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정말로 큰 사람은 작고 미천한 소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자신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법이다. 어떤 선물이든 선물 그 자체 보다 그 선물을 주는 방식이 그 사람의 인격을 더 잘 나타낸다. 예수의 말처럼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동물이 아니란 사실을 잊지 말자.’

 

반발을 예상했으나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나는 카투사의 사기를 높이고, 미군과 우의를 다지며 친목을 도모해 군에 공헌한 바가 크다면서 미군 사령관으로부터 감사표창장을 받았다. 어쨌거나 나는 한국군 카투사들의 집단 몰매를 맞고 병원에 누워 있어도 그리 서럽거나 괴롭지 않았다. 그날 밤, 코스모스로부터 받은 너무너무 감미로운 앵두 두 알을 내 가슴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억만금보다 더 값진 보배를 얻은 사람이 한두 푼 잃고 손해 본들 대수는 아니었다.

 

하늘 저편에서 황혼이 시작되고 있었다. 구겨진 습자지 위에 펼쳐지는 얇디얇은 한 장의 황혼이었다. 그렇게 쉽게 황혼은 내 앞에 다가왔다.

 

나는 소녀로부터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절교장 絶交狀을 받았다. 그것도 소녀의 어머님께 나는 대학에서 종교 철학을 공부했고 남동생은 고등학교만 나오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는 말을 한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도대체 대학에서 뭘 배우는가. 만일 교만과 자만심만 길러주고 허영과 사치심만 키워주는 곳이 대학이라면 그런 인간 기생충을 대량생산하는 공장 같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내 동생을 미쁘게 여길 뿐이라고 나 자신을 달래야만 했다. 그러한 대학에 갈 것을 그 아무에게도 권장하지 않을 것이며 내 결혼 상대로 대학 출신을 원치 않겠노라 나는 굳은 결심까지 했다. 사실, 소녀의 어머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고 많은 과목 중에 종교철학이라니의학, 법학, 경제학 같은 실용성 있는 학문을 하지 않고 뭘 하겠다는 것이었을까. 신학 神學이라도 했다면 해방 후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많이 생긴 성직자聖職者 목사牧師라도 된다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부를 했다는 사람이 곱게 키운 딸자식 데려다 밥조차 제대로 못 먹일 것 같았을 테니까.

 

자네, 어느 대학 출신인가?”

 

처음에 소녀를 집으로 방문했을 때 소녀의 어머님께서 물으셨다.

 

, 서울 문리대 출신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느 대학 출신이냐고 물으시니 그렇게 대답했기에 정치과나 영문과 정도 다닌 줄로 생각하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족 상황을 묻자 누이 한 사람이 외국 유학중이라기에 집안이 좋은 줄 알았는데 남동생이 대학에도 안 갔다니 기가 막히셨으리라. 딸의 장래를 걱정하시는 마음에서 당장 나와 절교토록 종용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갔다.

 

같으면 언제고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싫다 하면 선뜻 물러났었는데 이번만은 자의自意가 아니고 타의他意에서인 것만 같아 나는 계속 편지와 전화로 애원하고 간청했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한다 해도 자식의 운명을 부모가 대신 결정하고 자식의 인생을 부모가 대신 살아줄 수 없지 않겠는가. 제 삶은 스스로 개척해 제 맘 내키는 대로 용기와 신념을 갖고 살아보자고 호소했다.

 

아무리 호소해 보아도 소용없자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듯이 소녀보다 네 살 아래인 여고생이던 동생에게 매달려 보았다. 응원과 도움을 청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데 사람의 마음을 못 움직이랴 싶었다.

 

이번에도 인연因緣이 닿지 않았는지 오페라 영창 가사처럼 ! 그대였던가별은 빛나건만, 아무리 애쓰나 내 수고 헛될 뿐그대의 찬 손을 잡아 녹여 줄 수 없었다. 어머님의 절대적인 영향과 간섭에서 못 벗어나는 것 같아 절망한 끝에 나는 포주抱主와도 같은 구세대舊世代를 고발告發하노라는 시를 한 편 써서 세 모녀 앞으로 우송했다.

 

제대하는 날 제대복 차림으로 나는 소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벨을 누르자 마침 집에 있던 소녀가 내다보더니 문빗장을 질러 굳게 문을 닫아걸었다. 나는 미친듯 담을 뛰어넘었다. 홍길동이나 로빈후드처럼 성안에 갇힌 코스모스 공주를 구출하겠다고 대낮에 남의 집 담을 넘긴 했어도 다시 신사답게현관문을 점잖게 노크했다. 그러는 사이 소녀는 맨발로 부엌문으로 빠져나가 이웃에 사는 이모를 불러 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모가 아니고 이웃집 아주머니였다.

 

나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소녀의 어머님께서 시장에서 장사하는 장사꾼처럼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 아니란 사실이었다. 문인이자 사회적인 지도자급 저명인사께서 어떻게 이같이 젊은이들의 순수한 사랑의 싹을 잔인하게 잘라버리는 것일까. 소꿉장난같이 시작하는 아름다운 삶의 잔칫상을 이토록 무지막지하게 엎어버릴 수 있을까? 나는 절망했고, 그 깊이는 더해갔지만, 답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어디선가 구겨진 습자지 위에 펼쳐지는 얇디얇은 한 장의 미명微明이 밝아오고 있었는가 보다.

 

꿈꾸듯 펜팔로 만났다가 단꿈에서 깨어나듯 꿈속의 소녀를 잊지 못해 몽유병자夢遊病者처럼 방황하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서울 시청 앞에서 뜻밖에도 소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어느새 소녀의 모습도 여대생도 아닌 어엿한 처녀의 아름다운 자태로 변해 있었 다. 나는 그녀의 뒤를 밟았다. 그녀는 영자신문 코리아 헤럴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수위로부터 그녀가 조사부에 근무한다는 말을 들었다.

 

제대 후 나는 한국외국어대학에 다니면서 모친의 함자 덕순德順와 나의 자작自作 아호雅號 해심海心를 따서 덕해서관德海書館 Duk-Hae Book Gallery’이라는 서점書店을 경영하고 있었다.

 

하루는 코리아헤럴드의 경쟁지인 또 다른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의 ‘Thoughts of The Times’ 칼럼에 한국 남자와 결혼해 코리안의 아내라는 책을 쓴 아그네스 데이비스 김이란 미국 여자가 남녀관계 및 인간관계에 대해 쓴 글을 읽고 독후감으로 나 자신의 펜팔 로맨스 이야기를 써 보냈더니 이 글이 그 다음날 같은 칼럼에 실렸다.

 

이 글이 실린 신문 한 장 갖고 코리아 헤럴드로 그녀를 찾아가 만일 나와 절교한 것이 자신의 뜻이 아니었었다면 우리 다시 좀 사귀어 보자고 했다. 생각해보고 답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아무리 기다려 봐도 깜깜무소식이었다. 때마침 코리아헤럴드 주최로 영어웅변대회가 있었다. 전에 내가 서울대 학생으로 영어웅변대회와 경제학술토론대회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한국외국어대 학생으로 출전하여, 행여나 그녀가 들어주길 바라는 일념에서 포주와도 같은 구세대를 고발한다는 사자후獅子吼로 울부짖었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때 또 마침 코리아헤럴드의 기자 모집에 나는 응시, 수석으로 합격해, 다니던 한국외국어대학을 중퇴하고 코리아헤럴드 기자가 되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누군가가 만나자고 날 찾아 왔다. 그는 내가 입사하기 얼마 전까지 코리아 헤럴드 기자로 있다가 새로 창간된 중앙일보로 간 사람이었다.

 

두 분이 예전에 펜팔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주한 사내가 말을 꺼냈다.

 

우리 두 사람은 결혼할 사이입니다. 정식으로 부탁 드립니다. XX 씨를 그만 단념해주십시오.”

 

오기傲氣가 발동한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녀가 노예라도 된다면 우리 두 남자가 목숨 걸고 결투해서 승자가 차지하면 되겠지만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 그녀의 선택에 달린 게 아니겠습니까?”

 

미스김의 의사를 듣고 싶으시다면 제가 따로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사내는 정중히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알아보겠습니다.”

 

곧바로 나는 그녀를 찾아가 답을 요구했다.

 

포주와도 같은 구세대를 고발하신다고 하셨죠? 저의 어머니를 포주라 했으니 저를 창녀 취급을 한 셈이지요. 이토록 저희 모녀를 심하게 모욕한 남자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겠어요.”

 

더할 수 없이 부정적인 대답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그동안의 무례에 대해 깊이 사과를 드립니다. 부디 행복하시기를 빌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만 기억해 주시면 좋겠군요. 이슬이 스러지면 흔적조차 없지만 이슬이었을 동안 이슬이었다는 걸.”

 

, 그게 무슨 말이지요?”

 

나는 대답 대신 미소 짓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인용한 이 말은 서울대 피천득 교수의 시 이슬을 좀 원용(援用)한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1883-1931)예언자의 뜰The Garden of the Prophet’(1933)의 시구詩句를 되뇌었다.

 

이슬방울에 비치는 햇빛

저 태양만 못 하지 않듯

가슴 속에 메아리치는

숨소리 삶 못지 않으리.

이슬방울 햇빛 비춰줌은

이슬이 햇빛인 때문이고

우리 모두 숨 쉬는 것은

우리가 숨인 까닭이리.

날이 저물고 밤이 되어

어둠이 주위로 깔리면

속으로 이렇게 말하리.

이 어둠 밝아 올 새날

한밤의 진통 겪더라도

저 언덕바지 계곡처럼

우리도 새벽을 낳으리.

밤에 지는 백합꽃 속에

몸 굴려 모으는 이슬이

우주 대자연의 품속에서

혼과 넋을 찾아 모으는

우리 자신과 다름없으리.

천년에 한 번 나는 겨우

이슬방울 일 뿐이라며

이슬이 크게 한숨짓거든

그에게 이렇게 물어보리.

영원무궁한 세월의 빛이

지금 네게서 빛나고 있는

이 기적같은 신비로움을

너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그러면서 나는 혼잣말로 읊조렸다.

 

있을 이 이슬 맺혀

이슬이던가

삶과 사랑의 이슬이리

아니,

기쁨과 슬픔의 저슬이리

이승의 이슬이

저승의 저슬로

숨넘어가는

 

Was the grass wet with early morning dew

to pay your dues of life and love?

Were they dewdrops of life-giving and love-making,

or rather teardrops of joy and sorrow?

Was that for breathing in this magic world to the full,

 

and breathing it out to the last,

before transforming back

into the mystical essence of the cosmos?

 

그 후로 나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코리아타임스로 직장을 옮겼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콜롬비아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ia Marquez (1927-2014)의 작품 콜레라 시대의 사랑 Love in the Time of Cholera 1985)’필연이었다. It was inevitable.”란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남미 카리브해연안에 있는 한 나라를 무대로 19세기 후반에 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세 사람의 삶과 이들의 얽힌 운명을 다룬 이야기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필연 같게 보이지 않는다. 그냥 하나의 짝사랑 이야기로밖에는. 그런데 이 짝사랑은 50년 만에, 정확히 말하자면 509개월 4일이 지난 후에야 드디어 이루어진다.

 

이것이 풀로렌티노 아리자가 페르미나 다자에게 다시 한번 그의 사랑을 고백할 때까지 그가 기다린 세월이다. 그는 그의 두 번째 사랑고백을 여자의 남편 장례식장에서 한다. 이 소설의 제목이 암시하듯 작가는 이 작품에서 사랑에 대해, 여러 다른 모습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 젊은 풋사랑, 결혼한 부부의 사랑, 낭만적인 사랑, 콜레라 증상이 있는 열병 같은 사랑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품 속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겹쳐져 놀라웠다. 정말 알 수가 없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데미안Demian(1919)’에서 한 말을 떠올리 면서

 

사람은 누구에게나 오직 한 가지 천직과 사명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고, 이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단호하게 자신 속에서 자신의 삶으로 살아버리는 것이다. 이 운명 아니 숙명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그 어떤 무엇을 절대적으로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아쉬워하다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것을 찾아 얻게 될 때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인 것으로 다름 아닌 자신의 절절한 소망과 꿈이 갖다 주는 것이다.”

 

As Frau Eva says in Hermann’s Hesse’s Demian:

 

“You must not give way to desires which you don’t believe inYou should, however, either be capable of renouncing these desires or feel wholly justified in having them. Once you are able to make your request in such a way that you will be quite certain of its fulfillment, then the fulfillment will come.”

 

한창 젊은 날 한국에서 펜팔로 처음 만났던 아기씨를 25년 만에 나는 뉴욕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급기야는 정말 기적같이 극적으로 우리 두 사람은 맺어졌다. 그러나 사반세기 전 첫 번째 만남과 헤어짐이 다시 반복되는 그 옛날의 재판(再版)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여동생과 함께 어머님의 뒤를 이어 유명한 소설가가 되어있었다. 특히 두 자매는 소설 날개를 쓴 유명 작가의 문학상을 수상했고, 그 옛날 펜팔 시대푸른 제복의 사나이로 등장했던 내가 이 여인의 글재주 덕에 꽃을 든 남자’(, 하권, 세계사 발행)로 탈바꿈하여 재등장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으니. 이 여인이 쓴 장편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인 한고만과 안성수, 그리고 이원오 세 인물은 고스란히 나를 투영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으니까.

 

뿐만 아니라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이지만 우리가 재혼한 바로 다음 날 서울에 사는 (당시 어린 아들까지 있는 유부녀) 동생과 전화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듣고 나는 깜짝 놀라 내 귀를 의심했었다.

 

“oo, 태상이가 x을 아주 썩 잘해. 너도 한번 해봐그리고 그러자고 내게 제의까지 해오는데 내가 너무 소심해서였는지 아니면 용기가 부족했었는지 그 제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아직까지도 두고두고 그 제의만으로도 깊이깊이 감사할 뿐이다. 자기보다 네 살 아래 여동생을 너무 극진히 사랑해서였는지, 아니면 기존 사회도덕이나 윤리나 인습 같은 통념을 초월한, 너무도 앞서가는 자유인Free Spirit이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새삼 도 악 도 없다. 네 생각일 따름이다. There is nothing either good or bad, but thinking makes it so.”이란 세익스피어의 말이 떠올랐다.

 

함부로 쏘아댄 화살이 훗날 다른 사람의 가슴에 박혀 있는 정황을 목격한 나는 헛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 다른 뒷모습의 사랑만 남기고 삶의 둥지를 떠나 예술의 하늘로 날아가 버린 파랑새의 행복을 빌어줄 뿐이었다. 우리 두 사람 다 재혼해 10개월 같이 살다가 예술을 위한 삶이냐 삶을 위한 예술이냐는 실존적 가치관의 차이로 다시 헤어지면서 나는 청마 유치환의 고백처럼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그 후로 8년 전 2013년에 타계하셨다는 부고를 신문을 통해 접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어려서부터 그토록 소위 구세대舊世代에 반기反旗를 들었던 내가 어느 틈에 80대 중반 구구세대舊舊世代가 되어서도 옛날의 반골 기질反骨/叛骨氣質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인지 몇 마디 좀 더 해보리라.

 

사람은 몸과 마음이 같이 놀아야지 따로 놀면 죽도 밥도 안 된다고 나는 믿어 왔다. 제가 좋아하는 것이면 어떤 공부나 일이든 힘 드는 줄 모르고, 하면서 즐겁고 능률도 올라 최선의 결과를 얻게 되지 않던가. 세상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열중할 때처럼 행복한 순간이 없지 않겠는가.

 

본인이 원치 않는데도 자식에게 어떤 학문, 어떤 직업, 어떤 배우자를 강요하는 부모들이야말로 자식을 사랑하고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 자식을 해치고 망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의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과잉보호하고, 특히 아들들을 끼고돌아 생병신을 만들어 온 것 같다. 자식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몰라도 일단 세상에 태어난 다음에는 한시 바삐 육체적인 탯줄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정신적인 탯줄까지 끊어주고, 자식들로 하여금 하루속히 엄마 품과 둥지를 떠나 나는 법을 배워 자신의 삶을 제힘으로 스스로 개척토록 격려할 일이지, 그렇지 않고 좀 심하게 말해서 엄마 뱃속에 자식을 다시 집어넣으려 들면 자식이 숨통 막혀 질식하지 않겠는가.

 

내가 영국에 가 살면서 크게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 영국 엄마들은 길을 가다가 어린 자식이 넘어져도 잡아 일으켜 주지 않고 어린애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보고 한국 엄마들의 무지 몽매無知蒙昧함을 통탄했다.

 

나는 몇 년 전 뉴욕에 사는 어떤 한국 엄마가 대학 다니는 두 아들 이 학교 서류에 제때 제 자리에 제 이름 사인조차 못 할까 봐 사인Sign도 대신하고 저희들이 포르노 성인 비디오 빌리기 얼굴 뜨거워할까 봐 자신이 대신 빌려다 주는 정신병자 같은 경우를 본 적이 있다.

 

사람은 앞을 보고 살라고 눈이 얼굴에 달렸지, 뒤통수에 달려 있지 않은데 동양의 유교사상 때문인지 우리는 앞을 보고 달리는 대신 조상이다, 부모다, 효도다, 뒤만 보고 살아왔으니 발전은커녕 퇴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연의 이치가 물은 아래로 흐르게 마련인데 거꾸로 흘러 오르기를 기대하고 강요하며 허례허식에 사로잡혀 왔으니 이 얼마나 한심찬란한 일인지 모르겠다. 제발 부모자식 사이에 채권자 채무자 같은 억지 그만 좀 부릴 일이다. 부모 자신 이 좋아서 재미보다 낳은 자식, 키우는 낙으로 키웠으면 그만이지, 어쩌자고 자식더러 뒤만 돌아보고 뒷걸음질하라는지, 이러한 부모들이야말로 고려장감이 아닌가.

 

남자의 사랑을 받아 주는 것이 여자가 남자에게 제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다 주는 더 큰 선물이 되듯이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받아 주는 것으로 셈이 끝난다고 나는 본다. 여기서 내가 논리의 비약도 서슴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욕으로 쓰는 말이 실은 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도 못할 놈, 못할 년 해야 저주가 되지 세상에서 제일 좋고 즐거운 일 하라는데 그것이 축복이지 어째서 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불가사의不可思議하게도 이것은 우리말뿐이 아니라 일본어나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나의 반어법反語法이라고 볼 수밖에.

 

그러니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어버이다운 어버이라면 자식 보고 제 좋은 일하라고 축복해 줄 일이지, 하고 싶은 일 말려서도 안 되지만 하기 싫은 일 시켜서도 안 될 일이다. 하기 좋은 일만 하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인데 어쩌자고 하기 싫은 일로 인생을 낭비하고 허비하란 말인가. 모든 부모님들이 꼭 좀 기억하고 한시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하는 것이있다. 다름 아니고 어린이들에게는 어른들이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천부적 본능적 자질 資質과 자발성自發性 지향성志向性의 자생력自生力과 자구력 自救力이 있기 때문에 앞서가는 애들 보고 동으로 가라 서西로 가라 할 일이 아니란 것이다.

 

칼릴 지브란도 그의 예언자The Prophet(1923)’에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지 않은가.

 

당신의 애들이라 하지만

당신의 애들이 아니리오.

언제나 스스로를 그리는

오로지 삶의 자식이리니.

당신을 거쳐서 왔다지만

당신에게서 생겨난 것도

당신의 소유도 아니리오.

 

애들에게 사랑은 주어도

생각을 줄 수 없음이란

그들 생각 아주 다르고

그들의 몸은 집에 있어도

그들의 마음과 영혼은

집 밖의 집 우주에 있으며,

내일이란 집에 살고 있어

당신이 생시에는 물론

꿈속에서도 방문할 수 없는

곳인 까닭이리오.

당신이 애들처럼 되려고 하되

애들을 당신처럼 만들려고

하지 말 일이요.

삶이란 뒤로 가지도

어제에 머물지도 않으리.

당신이 활이라고 한다면

애들은 당신의 화살이니

그 어떤 과녁 겨냥하고

힘껏 활시위 당겨질 때

당신 구부러짐 기뻐하리.

 

(우주의) 궁수弓手

빨리 멀리 날으는 화살

사랑하는 동시에

(안정적으로) 화살 튕겨주는

활시위도 사랑하시리.

 

Your children are not your children.

They are the sons and daughters of

Life’s longing for itself.

They come through you

but not from you,

And though they are with you

yet they belong not to you.

 

You may give them your love

but not your thoughts,

For they have their own thoughts.

You may house their bodies

but not their souls,

For their souls dwell in the house

of tomorrow, which you cannot visit,

not even in your dreams.

You may strive to be like them,

but seek not to make them like you.

For life goes not backward

nor tarries with yesterday.

 

You are the bows from which

your children as living arrows are sent forth.

The archer sees the mark upon the path

of the infinite, and He bends you with His might

that His arrows may go swift and far.

Let your bending in the archer’s hand

be gladness;

For even as He loves the arrows that flies,

so He loves also the bow that is stable.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린 모두 우주의 활과 화살로 태어난 코스미안들이니까. Because we all are Cosmians born as cosmic arrows and bows.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나쁜 것도 더러운 것도 거짓된 것도 무서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맑고 깨끗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만남의 기쁨과 헤어짐의 슬픔을,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뛰어넘는 사랑을 나누게 된다는 것을. 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의 존재 가치와 존재이유를 깨닫게 해준다는 것을.

 

같은 이슬이라도 매미가 먹으면 노래가 되고, 벌이 먹으면 꿀이 되지만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지만 뱀이 가지고 있는 독조차 어딘가 쓸모가 있을 텐데, 어른들에게는 아이의 눈이 없다는 게 문제다.

 

나는 떠나간 코스모스가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정녕 우리의 만남과 헤어짐이

그 어느 누구의 뜻과 섭리에서인지

알 길 없지만

너와 내가 마주쳤다 떨어짐도

저 별들의 반짝임처럼

우리 눈 한 번 깜박임이 아닐까.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 따라

눈 비 바람 불어 오가는 것이

그 어떤 까닭인지 알 수 없지만

저 풀잎에 맺히는 밤이슬과 서리

아침 햇볕에 녹아 스러지듯

우리 숨 한 번 맺혔다 지는 게 아닐까.

 

너와 내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정녕코 모르는 일이라 하더라도

우린 모두 삶과 사랑의 이슬방울로

코스모스바다로 흘러드는 것이리.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작성 2022.05.21 11:18 수정 2022.05.2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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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