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 칼럼] 지명풀이 금현성(金峴城)과 우산성(牛山城)

최규성

금현성(金峴城)과 우산성(牛山城)삼국사기고구려본기, 백제본기, 신라본기에 모두 등장한다. 세 나라가 끊임없이 뺏고뺏기던 곳으로 치열한 각축전이 펼쳐졌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삼국이 뺏었다가 뺏기고 또 뺏었다가 뺏기고 한 성들이 몇 개 있는데 그 대표적인 성이 구양성(狗壤城)과 와산성(蛙山城)이고, 금현성(金峴城)과 우산성(牛山城) 역시 그와 비슷하다


먼저 이들 지명이 실려있는 해당기록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본기냐 백제본기냐 신라본기냐에 따라 제각기 다른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어 얼른 보면 동일한 사건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으나 찬찬히 살펴보면 동일한 사건을 중복 기술한 것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문자왕 5(496

7월에 군사를 파견하여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치니 신라병이 니하(泥河)에 나와 마주 치는지라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문자왕 6(497

8월에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쳐서 빼앗았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안원왕 10(540

9월에 백제가 우산성을 에워싸므로 왕이 정기(精騎) 5,000명을 보내어 쳐 쫓았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성왕 7(529)

10월에 고구려왕 흥안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변의 혈성(穴城)을 함락하였다.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하여 보기병 3만명을 거느리고 오곡원(五谷原)에서 거전케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자가 2,000여명이나 되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성왕 18(540)

9월에 왕이 장군 연회(燕會)에게 명하여 고구려의 우산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성왕 28(550)

정월에 왕이 장군 달사(達巳)를 보내어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취하였다.

3월에 고구려병이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양원왕 6(550)

정월에 백제가 침범해 와 도살성(道薩城)을 함락하였다.

3월에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공격하니, 신라 사람이 그 틈을 타서 두 성을 취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소지왕 18(496)

7월 고구려가 우산성(우산성)을 내공하므로 장군 실죽(實竹)이 이하(泥河)에 출격하여 여군(麗軍)을 깨뜨렸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소지왕 19(497)

8월에 고구려가 우산성(牛山城)을 공함(功陷)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 11(550)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쳐 빼앗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찬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군사를 내어 이를 쳐 두 성을 빼앗고 성을 증축하여 무사 1,000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성왕 31(553)

7월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변을 취하여 신주(新州)를 두었다.

10월에 왕녀(王女)가 신라로 시집갔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성왕 32(554)

7월에 왕이 신라를 침습하려 하여 친히 보기병 50명을 이끌고 바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 함께 싸우다가 난병(亂兵)에게 해를 입고 돌아갔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우리는 학교교육을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는 한반도를 셋으로 분점한 상태에서 중부지역 비옥한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였고 결국 신라가 한강유역을 확보함으로써 최강자의 위치에 올랐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최초의 한반도 전체 통일국가가 되었다고 배웠다. 그래서 삼국시대의 전투라는 말만 들으면 중부지방 어디쯤에서 싸웠을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필자 역시 그러하였다. 금현성(金峴城)과 우산성(牛山城)도 당연히 중부지방에 위치해 있을 거라 추측했고, 종래의 학자들이 주장해 온 대로 충북 어디쯤일 거라 믿었다. 필자가 주로 사용하는 텍스트는 을유문화사의 이병도 역주본 삼국사기19971010일 발행한 개정판 3쇄본인데 거기에는 금현성(金峴城)을 현 충북 전의면(全義面)에 비정하고 우산성(牛山城)은 위치미상이라 했으나 이하(泥河)를 강릉시 남천(南川)에 비정함으로써 은연중에 우산성이 강릉 인근에 있었을 거라고 암시하고 있다.


필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주로 싸웠을 거라는 종래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만 우리의 고대역사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단지 차자표기를 바탕으로 한 고대지명의 파악에 초점을 두고 있을 뿐이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 중부지역에서만 싸운 게 아니라 한반도 남해안 지역에서도 많이 싸웠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연구작업의 일환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원시지명어소 [/sur]의 이형인 [/sor]'하늘‘, 또는 하늘처럼 높은 것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에서 이미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어 여기서는 더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 하늘 높이 나는 새를 솔개(소리개)‘라 하는 바, 거기 쓰인 []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어로 높은 우주를 가리켜 소라(そら)‘라 하는데, 같은 어원에서 분화된 말이다.


모음혼교에 따라 [//////]은 쉽게 서로 부전(浮轉)되었으며 [//////...]도 쉽게 서로 넘나들었다. 이를 두고 필자는 종성자음의 부전(浮轉)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니까 하늘처럼 아주 높은 산이라는 뜻에서 [솔뫼/sor-moi]라 일컫는 지명이 있다면 그것을 [솥뫼/sot-moi]라 일컫는 사람도 있고 [솟뫼/sos-moi]라 일컫는 사람도 있었던 바, 한글이라는 표기수단이 없었던 옛날 우리 조상들은 한자를 빌려서 率山(솔산)’, ‘소을산(所乙山)’, ‘松山(송산)’, ‘鼎山(정산)’ 같은 식으로 표기했다는 말이다.


[/]은 응집발음한 형태이고, 이를 연진발음하면 [소리/수리] [소르/수르] [소라/수라]와 같은 식으로 발현된다. 높은 산의 정상을 가리켜 소리봉, 수리봉이라 하는데 그 소리,수리가 바로 그러한 의미를 지닌 말이다. 사람의 머리꼭대기를 정수리라 하는데 정수리(+수리)’는 동일한 의미를 가진 한자 과 우리말 수리를 중첩하여 만든 합성어이다. 봉우리(+우리)나 담장(+) 무당(+) 같은 말도 그렇게 한자와 우리말을 중복하여 합친 말이다.


삼국사기잡지 제4솔이산현(率已山縣)’, ‘술이홀현(述尒忽縣)’, ‘수이홀(首尒忽)’ 같은 지명이 실려 있는데, 이들이 바로 그러한 지명이다


소산현(蘇山縣)은 본시 솔이산현(率尒山縣)인데경덕왕이 소산(蘇山)으로 개명지금은 청도군(淸道郡)에 합하였다.

봉성현(峯城縣)은 본시 고구려의 술이홀현(述尒忽縣)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

수성현(戍城縣)은 본시 고구려 수이홀(首尒忽)로 경덕왕이 개명하였으니 지금의 수안현(守安縣)이다.



[/sor]을 연진발음한 [소리(솔이)]를 사용한 지명인 것이다. 그런데 이 연진발음 과정에서 앞말 종성의 소리가 약화탈락하면 [소이/soi] 비슷한 형태로 발현된다. [솔뫼][소리뫼]가 아니라 [소이뫼/soi-moi]처럼 되는 것이다. [소이/soi]가 한국어에서 단음화 경향을 보이면 [/soi]처럼 된다. 차자표기는 내가 2천년 전의 기록자라 가정하고 내가 그 당시 사람이라면 어떻게 표기했을까를 상상해 보는 것이 가장 빨리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쇠뫼]라는 지명은 한자로 牛山(우산)’이라 차자하여 적거나 철산(鐵山)’이라 차자하여 적을 수 있다. 이때의 은 모두 사음훈차한 것이다. 또 다르게는 휴산(休山)이나 금현(金峴)이라 차자하여 적을 수도 있다. 다시말해, 앞의 인용문에 나오는 우산성(牛山城)과 금현성(金峴城)은 젼혀 별개의 지명이 아니고 쇠뫼혹은 쇠재”, “쇠고개라 일컬었던 같은 지명이며 그 의미는 높은 산’, ‘높은 재’, ‘높은 고개라는 얘기이다.


그러니까 인용문에 나오는 우산성(牛山城)과 금현성(金峴城)은 동일한 지명이고 동일한 곳을 가리킨다는 말인 것이다. 이러한 지명은 전국 곳곳에 산재한다.


그렇다면 인용문에 기록된 우산성(牛山城) 즉 금현성(金峴城)은 도대체 지금의 어디를 가리키는가?

필자는 현 경남 고성군 고성읍 우산리에 비정한다




국토리정보원에서 펴낸 한국지명유래집-경상편에는 경남 고성(固城)이 본래 소가야국(小加耶國)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아서 고자군(古自郡)을 설치하였는데, 경덕왕이 고성군(固城郡)으로 고쳤으며 고려시대에는 철성(鐵城)이라고도 했다고 되어 있다. ‘牛山, 金峴, 鐵城은 동일한 지명을 차자방식만 달리하여 표기한 것이다. 우산리의 동남쪽에는 송산리(松山里)가 있는데 松山역시 이들과 별 차이가 없는 지명이라 할 수 있다


이병도박사 역주본 삼국사기에는 금현성(金峴城)을 세종특별자치시의 전의면(全義面)에 비정하였는데, 왜 그렇게 비정했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으나 연관지명으로 나오는 도살성(道薩城)을 현 충남 천안(천안)에 잘못 비정한 탓이 아닐까 싶다. 필자가 보기에 이병도박사는 금현성(金峴城)과 도살성(道薩城) 둘 다 그 위치를 잘못 비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우산성(牛山城)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全義(전의)’[갖추오르]라 일컫는 지명을 사음훈차+사음훈차한 표기이며, 현 경기도 부천시 작동(鵲洞)의 우리말이름인 까치울과 똑같은 지명이다. 한자 갖추다[갖추]를 차자한 글자로 完山(완산)도 그러하다. ‘完州’, ‘全州’, ‘全義가 모두 사실상 똑같은 [갗골]이라는 지명을 차자한 표기인 것이다. [갗골]의 골은 초성 []음이 약화탈락하면서 []로 소리나고 그렇게 표기된 경우가 많다. 용비어천가주해편에는 가래올(楸洞)’, ‘모래오개(沙峴)’ 등과 같이 >로 변하거나 고개>오개로 변한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갗골]全州(전주)’完州(완주)’라고 차자하여 쓰기도 했고, ‘鵲洞(작동)’이라고도 썼는데 [/]로 초성 []음이 약화탈락하고 앞말의 종성이 연진발음되면서 [가츠옳, 까치울]과 같은 식으로 인식이 되면서 全義(전의) 혹은 鵲洞(작동)이라고 표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금현성(金峴城)’전의(全義)’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지명이라 해야 옳다. 다른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어적으로만 본다면 금현성(金峴城)을 전의(全義)에 비정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이병도박사의 역주본 삼국사기에는 도살성(道薩城)을 현재의 충북 천안시(天安市)에 비정하였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그 견해를 그대로 추종하는 편이지만, 필자는 이 역시 잘못된 비정이라 생각한다.


[/sar]은 원시지명어소 [/sur]이 여러 가지로 부전되는 형태 중의 하나로 넓은 산비탈을 가리키는 말인데 서식지, 마을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신라의 다른 이름인 사로(斯盧)’는 이 [/sar]을 연진발음한 형태이다. [/sar]앞에 또다른 원시지명어소 [/tar]의 이형인 [/dot]을 덧붙인 지명이 [돝살]이고 [돝살]큰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다. [돝살]道薩(도살)”이라고 음차하여 표기한 것이다. 만약 [돝살]을 사음훈차하여 표기한다면 어떻게 될까? () 혹은 ()라는 한자를 이용할 것이다. 돼지(pig)의 고어가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인용문에 나오는 도살성(道薩城)이 현재의 경남 통영시 도산면(道山面) 저산리(猪山里)를 가리킨다고 해야 옳다고 본다.


[돝살]을 음차하면 道善(도선)’이나 道山(도산)’이라 쓸 수 있고, 앞말을 사음훈차하면 猪山(저산)’이나 豚山(돈산)’이라 쓸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지도에서 보듯 도살성(道薩城)은 우산성(牛山城) 또는 금현성(金峴城)이라 표기되었던 경남 고성과도 가까운 위치에 있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많은 전투를 벌였던 고성-통영-거제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다



문제는 과연 고구려가 한강 이북에서 남쪽으로 백제를 밀고 내려오지 않고 바다로 빙 돌아서 남해안 섬들을 공격했겠느냐 하는 것이다여태까지 우리가 배워온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공격로이다. 필자 역시 처음에는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결과였기에 좀체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격전을 펼쳤던 곳은 현재의 경남 고성-통영-거제 일대였고, 고구려가 현재의 경남 고성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백제 성왕이 전사한 구천(狗川)이 통영시 견내량(見乃梁)이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이럴 수가?”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서기 391년 신묘년에 광개토왕의 고구려 군대가 백잔(百殘) 임나(任那) 가라(加羅)를 정벌한 이후로 왜가 조공을 해왔다는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이 삼국사기백제본기 진사왕 8년조와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즉위년조에 동시 기록되어 있는 석현성(石峴城) 10여개의 성과 관미성(關彌城) 공함(攻陷) 기록과 교차검증이 되며, 관미성(關彌城)은 현 대마도, 석현성(石峴城)은 현 여수 돌산도에 비정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보면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다.


삼국의 격전지(남해안의 성들)


임나(任那)’[맏놀]을 차자한 표기이고 말로국(末盧國)’과 동일한 국명을 차자방식만 달리하여 적은 것이며 현 큐슈 북단의 마츠우라(松浦)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임나는 곧 가야를 가리키며 한반도 남부지역에 존재했던 고대국가라고만 알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는 현재의 고성-통영-거제 일대에서 수많은 격전을 치렀음이 분명해 보인다


고구려는 백제가 일본열도의 세력과 연합하지 못하게 연결고리를 차단해야 하였고, 그래서 남해안 일대와 큐슈 북부해안을 정벌한 것이요, 백제는 일본열도 세력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홀로 고구려에 맞서다가 신라까지 고구려와 연합하게 되자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현재의 남해안 일대 섬들 일부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고 하면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여겨 외면해 버리기 쉬운데, 그래서는 안된다.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한반도를 셋으로 분점한 채 한반도 중부지역에서만 싸웠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고가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배워온 교육의 틀 안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종래의 학자들이 주장해온 견해를 함부로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옳은지 그른지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맹종해선 안 된다.


지명을 제대로 파악하고 보면 역사도 똑바로 보이는 법이다.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것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명연구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차자표기 연구의 중요성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고대사의 올바른 파악을 위해서는 지명의 연구가 중요하고, 고대의 지명 연구를 위해서는 차자표기에 대한 공부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의 역사를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점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burkurtar@naver.com

작성 2022.05.27 10:37 수정 2022.05.2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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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