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스물하나>, 청춘들이 상실감을 느끼는 이유

새드엔딩 논란으로 보는 대한민국 청춘의 현주소

 tvN 제공

[미디어유스 / 김화정 기자] 장안의 화제였던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종영한 지도 벌써 오래 전이다. 여느 때처럼 드라마는 시간의 뒤편으로 함께 밀려나고 수많은 드라마가 새로 시작했다. 그치만 <스물다섯 스물하나>만이 가졌던 ‘쌍방 구원서사’와 청춘들의 성장 스토리가 주었던 그때의 뜨거움은 다시 일어나지 않고 있다. 다섯 청춘들이 우리로 하여금 불러일으켰던 뜨거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왜 그토록 그들에게 열광하고 이별에 분노했을까. 드라마가 결말로 치달을수록 시청자들은 떠나지 말라는 아쉬움보다는 “드라마를 왜 이렇게밖에 못쓰냐”는 쓴소리를 내뱉었다. 오죽하면 트위터에서는 “권도은(작가) 절필하라”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드라마를 누구보다 사랑하던 애청자들이 이렇게까지 분노하고 제작진에게 등을 돌리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이유를 드라마와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청춘들의 모습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차근차근 짚어보는 논란 포인트 세 가지]

가장 논란이 되었던 건 그동안 드라마가 구축한 서사를 훼손하고 캐릭터가 일관성을 잃었다는 점이다. 시청자들이 의문을 품었던 지점은 나희도(김태리 役)가 어린 시절 백이진(남주혁 役)과 태양고 친구들과 함께 다녀왔던 수학여행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평생 펜싱을 하며 제대로 된 수학여행을 한 번 가보지 못했고, 본인 스스로가 “이 순간이 영원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무리 몇십 년이 흘렀다고 하나 19살의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시청자에게는 일종의 배신일 수밖에 없다. 그 추억을 같이 공유하던 시청자들에게 별안간 사실 그건 다 지난 옛날 일 중 하나고 별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말을 위한 빌드업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부분은 아직도 왜 이렇게 설정할 수밖에 없었는지 해소되지 않았다.


일명 ‘캐붕’이라고 하는 캐릭터의 설정 붕괴, 즉 캐릭터의 성격과 서사에 일관성을 잃는 전개도 한몫했다. 드라마에서는 나희도와 백이진의 결정적인 이별 장치로 ‘911테러’ 소재를 활용했다. 이진은 기자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생과 사의 최전선에 뛰어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본인을 잃어가고 무력감을 느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넌 나를 몇 번이고 일으킨 사람이야”라고 말할 정도로 의지했던 희도의 응원에 화를 내는 모습을 시청자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기자이기 때문에’ 모든 현장에 급하게 취재를 나가느라 희도와의 약속을 번번이 지키지 못하던 모습에 “세상 모든 취재는 백이진 혼자 다 하냐”는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 누구보다 희도를 소중히 생각하던, 희도 일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던 백이진의 캐릭터가 이별이라는 결말로 이어지기 위해 일관성을 잃어버린 순간이었다.


‘911테러’라는 비극적 사건을 개인의 이별 원인으로 가벼이 사용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거셌다. 특히 희도가 911테러의 참상을 전하는 이진의 리포트를 오직 애인의 소식을 접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으로 연출하며 윤리 문제에 부딪혔다. 뉴스를 보며 “오늘은 목소리만 나온다”고 아쉬워하던 장면과 “네가 보고 있어서 리포팅할 때 옷을 더 신경 써서 입게 된다”는 대사는 누군가에게는 아직 고통스러울 기억을 단순히 연애관계를 위한 소재로 폄하한 것은 신중하지 못했다. 일부 시청자들은 “외국 드라마에서 남녀가 헤어지기 위해 세월호 사건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며 사안의 심각성을 지적하였다.


드라마가 방영되던 동안 꾸준히 제기되어왔던 성인과 미성년자의 연애 감정 관계에 대한 논란도 문제였다. 이진이 희도에 대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명명함으로써 드라마는 첫화부터 제기되었던 논란에 불을 지폈고, 비난을 면치 못했다. 전파를 타는 대중문화는 법을 준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 통념에 부합해야 하며 윤리성을 준수할 책임이 있다. 15세 관람가이자 전국민적인 화제성을 가졌던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시청층이 전 연령이라고 봐도 무방했던 만큼 드라마에 몰입한 청소년들에게 그릇된 가치관이나 환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과정에서 제작진들의 세심하지 못했던 연출과 설정이 아쉽다. 


[새드엔딩은 여운이 아니라 허무를 남긴다]

수많은 애청자를 거느렸던 작품이 결말에 대해 아쉬워하는 것을 넘어서 거센 분노를 일으킨 것은 의외의 일이다. 그 원인의 중심에는 드라마의 주된 시청 동기 중 하나인 대리만족 욕구가 있다. 과거의 행복했던 시절을 그저 하나의 좋았던 추억으로 묻어두는 이야기에 청춘들은 공감하지 못했고, 이에서 비롯된 이별의 허무함이 반감으로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드라마가 결국 허구임을 안다. 그런데도 가상의 이야기에 열광하고 해피엔딩을 바라는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감정을 드라마라는 장치를 통해서라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특히 이진과 희도같은 서로를 구원하는 드라마틱한 관계는 길어진 팬데믹으로 위로가 필요한 이 시절에 더 커다란 감동이었다.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으니 드라마에서만큼은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던 염원을 이별이라는 결말이 무참히 짓밟은 것이다. 드라마에서조차 현실의 쓴맛을 느껴야 한다면, 시청자들은 굳이 시간을 내고 감정을 소모해 드라마에 몰입할 당위성을 잃는다.


게다가 매번 이 드라마를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올리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소비하던 핵심 시청자는 20대와 30대였다. 40대 이상의 시청자들은 시절 인연을 한 번쯤은 겪어본, 그렇기 때문에 이 결말을 아쉽지만,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연륜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2030은 다르다. 아직 청춘들은 뜨겁고, 여전히 운명적인 사랑과 행복한 결말을 꿈꾼다. 그들에게 시절 인연은 그저 허무함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그렇게 사랑해놓고 결국 헤어질 거면, 허무하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식이다. 같은 시기 방영되었던 <사내 연애>가 재벌 3세 남자 주인공과 평범한 여주인공의 연애라는 진부한 클리셰를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갈등을 한 회 안에 풀어주는 깔끔한 ‘사이다’식 전개로 칭찬받으며 성황리에 종영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최근 시청 트렌드가 어떠한 방향으로 바뀌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 시청자들은 TV를 통해 본인들이 현실 세계에서 해소하지 못한 욕구를 만족할 수 있다는 효용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물론 모든 시청자가 이 결말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드라마는 비록 인연은 영원하지 못했지만, 그때의 응원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순간들을 극복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끝없는 경기침체와 저성장 고용불안,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에서 서로를 지탱하는 힘을 잃지 말자는 희망을 주인공들의 구원 서사를 통해 전하고자 했을 것이다. 제작진은 아마도 이 결말이 이렇게까지 대중에게 상실감을 안겨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는 또 다른, 각종 위기와 불안을 몸소 겪고 있는 포스트코로나의 시대다. 드라마에서까지 슬픈 감정을 겪고 싶어하지 않는다. 시청자는 드라마에 몰입하며 현실에서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받고자 한다. 미디어는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누군가에게는 즐거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고통을 안겨줄 여지가 있지는 않은지 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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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2.05.27 12:29 수정 2022.05.27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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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