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애환이 깃든 하늘길 ‘운탄고도’는 ‘치유의 길’

우리 국토의 가장 굵은 뼈대, 백두대간은 남쪽으로 나아가다 정선과 태백 접경인 매봉산(1,303m) 아래의 피재(避岾)에서 갈림길을 빚어내는데, 남동쪽으로 낙동정맥을 분기시키고 남서쪽으로 대간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정선과 태백 일대에 크기는 제주도보다 약간 작은 평균 해발 1,000m가 넘는 거대 고원을 만든다.


이 고원 지역은 40~50년 전에는 ‘약속의 땅’이었다. 석유 없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에너지인 석탄의 메카였다. 지하 막장에서 목숨을 건 작업이었지만 급료가 두둑해 한때 실의에 잠겼던 사람들이 삶의 희망을 기대하고 찾던 탄광촌이었다.


태백과 정선을 잇는 태백산(1,567m) 자락과 하이원이 있는 백운산(1,426m) 고원 일대에는 석탄을 운반하던 길이 많았다. 이름하여 ‘운탄고도(運炭古道)’다. 운탄고도는 정태영삼(정선·태백·영월·삼척) 4개 행정구역이 포함되어있는데, 운탄의 모습이 사라진 고원의 도로는 철마다 새로운 빛깔을 품는 ‘하늘길’로 단장되었다.



만항재와 새비재를 잇는 해발 1,000m가 넘는 운탄고도




하늘길을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은 곤돌라다. 하이원리조트에서 1,340m에 위치한 하이원 스키장 정상인 마운틴탑까지는 20여 분 정도 걸린다. 하지만 오늘은 하이원리조트에서 출발하여 하늘길을 지나서 백운산의 정상 마천봉을 오른 후 운탄고도를 걷기로 한다.


하이원 팰리스호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이정표를 따라 하늘길 등산로에 올라선다. 잠시 후 1,140m 고도의 하늘길 코스 시작점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하이원 CC를 지나고 야생화가 핀 초원을 거쳐 원시림으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등산로 주변에 서 있는 초목들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향기에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다.



동화 속 궁전 같은하이원 팰리스호텔은 과거 탄광의 사택이었다.


 


선선함이 감도는 나무숲으로 이루어진 하늘길 오솔길을 따른다. 하늘길은 17.1km의 둘레길과 6.2km의 고원숲길, 5km의 운탄고도, 6.2km의 무릉도원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1,100m가 넘는 고지에 하늘 아래 첫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함백산 만항재에서 시작하는 운탄고도와 마천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만나는 삼거리의 전망대에서 장산과 가메봉, 매봉산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고산준령의 풍경을 조망하고 삼거리에서 마천봉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정상으로 오르는 산길 좌우는 조릿대가 무성하다. 어차피 큰 나무들 틈바구니에서 위로 자라지 못할 바에야 낮게 자라기로 작정한 조릿대는 나름대로 키 큰 나무들과 타협점을 찾았다. 봄에 잎을 피우지 말 것. 그리고 늦게 성장할 것. 대숲에 이는 사스락 바람에 산객은 흥겹기 그지없다.



삼거리 전망대에 서면 가메봉과 매봉산의 산군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삼거리에서 백운산 정상인 마천봉을 오르는 등산로 주변에는 멧돼지가 땅을 파헤친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봄 가뭄이 심하다 보니 계곡의 물이 말라 멧돼지들이 여기저기 땅을 파헤친 자국들이다. 숲속에서 사람은 얼마나 취약한 생물종인가. 그래서인지 등산로 곳곳에 멧돼지 퇴치용 종이 설치되어 있는데 두들겨 보니 텅텅거리는 둔탁한 소리만 나서 가쁜 숨소리를 최대한 줄이면서 조심스럽게 산오름을 계속한다.



산길 곳곳에 있는 멧돼지 퇴치용 목종



백운산(白雲山)이란 이름의 산은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자리하고 있는 산으로 남한에서만 5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정선에서도 두 개의 백운산이 있는데 동강 백운산과 하이원 백운산이 그것이다. 전국의 백운산 중에서 오늘 오르는 정선 백운산의 마천봉이 가장 높다. 안온한 연둣빛 숲길을 편안하게 걷다 보면 어느새 정상인 마천봉에 도착한다. 마천봉(摩天峰)은 하늘을 어루만질 정도로 높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백운산 정상 마천봉(1426m). 전국에 있는 숱한 백운산 중 최고봉이다.



백운산은 정선의 사북, 고한과 영월의 상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백운산 주변에는 태백산과 함백산, 두위봉, 장산, 매봉산 등이 있어 높은 산군을 이룬다. 정상인 마천봉 주위는 잡목들이 많아 마운틴탑 방향으로만 트여 있고 나머지 부분은 시계가 좋지 않다.



정상의 데크에서 조망한 마운틴탑. 탑 뒤로 두위봉이 보인다.



정상에서 마운틴탑으로 내려서는 숲속에는 매끈하고 군더더기 없는 하얀 자작나무가 미소만 머금은 채 산객을 반겨준다. 마천봉에서 30분 정도 걸려 곤도라 종착지인 마운틴탑에 도착한다. 겨울이면 많은 스키어들로 붐볐을 이곳은 오늘은 인적이 한산한 편이다. 전망대에는 45분마다 360도 회전한다는 레스토랑이 있다. 이곳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산행의 열기를 잠시 식힌다.



마운틴탑의 회전 전망대. 1바퀴 도는데 45분 걸린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바로 앞에서 봄이면 철쭉으로 유명한 두위봉이 ‘나물 캐러 오라’고 손짓하고, 마운틴탑과 이어지는 곤도라 중간 경유지 밸리탑도 보인다. 시선을 조금 멀리 보내니 가메봉(1,206m), 매봉산(1,279m), 단풍산(1,215m)의 산그리메가 한눈에 들어오고 영월 덕동계곡이 내려다보이면서 그 너머로 아련하게 소백산이 고개를 내민다.



마운틴탑에서 바라본 밸리탑과 백운산 마천봉



하늘길 코스는 총 10여 개로, 15분짜리에서 3시간짜리까지 있다. 하이원 뒷산 둘레길이 가장 긴데, ‘운탄고도’를 품고 있는 이 코스는 10km가 넘지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많은 트래커들이 즐겨 찾는 코스다. 1962년 닦은 이 길은 원래 석탄을 실은 트럭이 해발 1,100m가 넘는 산길을 따라 함백역까지 운반하기 위한 용도였다.


마운틴탑 옆으로 난 숲길로 계속 가면 넓은 신작로가 나오는데 이 길이 해발 1,330m 만항재에서 오는 운탄고도다. 그래서 ‘운탄고도 1330’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월군 화절령 일원과 정선 하이원리조트 인근에 있었던 1,177개의 갱도 주변의 해발 700~1300m에 부분적으로 개설돼 있던 운탄고도는 석탄을 나르던 길이지만 ‘구름이 양탄자처럼 펼쳐져 있는 고원의 길(雲坦高道)’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이 길은 두위봉 자락의 화절령을 지나 영화 ‘엽기적인 그녀’ 촬영지인 타임캡슐공원이 있는 새비재까지 이어진다.


원시림에 덮인 운탄고도는 ‘치유의 길’이기도 하다.



근처에 있는 도롱이 연못은 탄광 갱도가 무너지면서 생긴 산정호수다. 남편들을 탄광으로 보낸 광부의 아내들은 이 연못에서 도롱뇽을 보며 막장 조업하던 남편들의 무사귀가를 기원했다. 도롱뇽이 살아 있으면 광부들도 살아 있다고 믿었다. 매일 기도, 걱정, 안도, 반가움이 교차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연못가 초원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만 지천으로 피어있다.



광부 아내들의 절절한 기원이 녹아있는 도롱이 연못



아롱이 연못과 도롱이 연못을 지나 운탄고도를 따라 걷다가 화절령 삼거리에서 하이원리조트 방향으로 길을 잡고 걷는다. 하이원리조트와 연결되는 하늘길로 다시 들어선 것이다.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백운산과 두위봉 양쪽 산자락의 능선들이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는 산객을 꼭 껴안아 주며 수고했노라 위로해 준다.

 

해발 1,330m 고원 지대를 따라 천혜의 자연이 수놓은 아름다운 원시 숲길과 백두대간의 웅장한 절경 등으로 천혜의 힐링 코스로 평가받고 있는 총연장 173㎞ 규모의 ‘운탄고도 1330’은 ‘광부의 삶을 돌아보며 걷는 길’ 등 각기 다른 주제를 지닌 15~28㎞ 가량의 9개 구간으로 나뉘는데, 올 7월께 전 구간 개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길의 곳곳에는 영월 청령포, 정선 함백산 만항재, 태백 황지연못과 매봉산, 삼척 미인폭포와 삼척항 등 관광 명소도 산재해 있어 트레킹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운영되면 많은 관광객이 찾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운탄고도 인근에 있는 매봉산 바람의 언덕



생전에 산을 즐겨 찾았던 의병장 곽재우의 스승인 남명 조식 선생은 ‘산을 간다는 것은 풍경을 눈으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또렷한 의식으로 풍경을 해석하기도 하고, 때로는 몽롱한 상태에서 생각을 반전시키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의 운동 행위’라고 했다.


산행 전날, 모처럼 정선 카지노에서 들린 기자와 친구들이 그곳에서 입은 도회적 자산손실의 감정을 운탄고도를 걸으며 산촌의 느리고 여유로운 정서로 치유 받은 행복한 날이기도 했다.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 



작성 2022.05.31 13:52 수정 2022.05.3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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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