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열전 제7 눌최(訥催)전에 ‘노진성(奴珍城)’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먼저 해당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진평왕 건복(建福) 41년(서기 624년) 갑신(甲申) 10월에 백제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침공해 왔는데 군사를 나누어 속함(速含) 앵잠(櫻岑) 기잠(妓岑) 봉잠(烽岑) 기현(旗懸) 용책(冗柵) 등 6성을 포위공격하므로, 왕이 상주(上州) 하주(下州)와 귀당(貴幢) 법당(法幢) 서당(誓幢) 5군(五軍)을 명하여 구원하게 하였다. (그런데) 가서 본즉, 백제의 군진(軍陣)이 당당하여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으므로 서성대며 나아가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의견을 내기를, “대왕이 5군을 여러 장수에게 맡겼으니 나라의 존망이 이 한 싸움에 있다. 병가의 말에 ‘가한 것을 볼 때는 나아가고, 어려움을 알 때는 물러선다’고 하였다. 지금 강적이 앞에 있는데 좋은 모책을 하지 않고 바로 나갔다가 만에 하나라도 여의치 못한 일이 있다면 뉘우쳐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장좌(將佐)들이 모두 그러이 여겼지만, 이왕에 명을 받아 군사를 출동하였으니 그저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보다 앞서 나라에서 노진(奴珍) 등 6성을 쌓으려고 하면서도 미처 겨를이 없었는데, 마침내 거기에 성축(城築)을 마치고 돌아왔다.
내용을 좀더 보완하고 요약하여 설명하자면, 백제가 대군을 일으켜 신라의 여섯 개 성을 공격해 오자 신라의 군사들이 눌최를 돕기 위해 출정은 했지만 백제군의 기세에 눌려 감히 대적할 생각도 못하고 성을 지키고 있는 눌최를 도와주지도 못한 채 노진성만 쌓은 다음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미 속함(速含) 기잠(妓岑) 용책(冗柵) 3개의 성은 함락되거나 항복했고 눌최(訥催) 혼자 나머지 성들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지원군으로 출정한 신라군사들이 전투는 하지 않고 성만 쌓고 돌아갔다고 하는데 그 성의 이름이 노진성(奴珍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노진성(奴珍城)’은 어디에 있었던 성일까?
필자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이 ‘노진성(奴珍城)’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한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필자가 최초 아닐까 싶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서너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차자표기를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이면 ‘노진(奴珍)’은 ‘너른땅’을 뜻하는 [노돌]을 ‘음차+사음훈차’한 표기이며 ‘노량(鷺梁)’이라고도 차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떠올릴 것이다.
[노돌]은 원시지명어소 [놀/nor]과 [달/tor]이 합쳐진 이름인데 말 그대로 너른 땅을 뜻하는 지명이다. [노돌]은 [놀돌]의 앞말 종성이 약화된 형태이며, [노돌]을 연진발음하면 [노도루, 노도리] 같은 형태로 발현된다. 그러한 지명이 『일본서기』 신공기에 실려 있다. 중애천황 9년에 천황이 웅습(熊襲)을 공격하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사망하자 신공황후가 임신한 상태였음에도 남편의 뒤를 이어 전쟁을 계속하였는데, 우백웅취(羽白熊鷲; 하시로쿠마와시)라는 자가 웅거하고 있는 곳이 하지전촌(荷持田村; 노토리타노후레)이라고 되어 있다.
3월 임신삭에 황후는 길일을 골라 재궁에 들어가 스스로 신주(神主)가 되었다. 곧 무내숙니(武內宿禰)에게 명하여 금(琴)을 타게 하고 중신적진사주(中臣烏賊津使主)를 불러 심신자(審神者)로 삼았다. 그리고 많은 페백을 금의 머리와 꼬리 쪽에 두고 “지난날에 천황에게 가르침을 쥔 신은 어떤 신입니까? 바라건대 그 이름을 알려주십시오.”라고 청했다....(중략).... 그런 후에 길비신(吉備臣)의 조상 압별(鴨別; 가모노와케)을 보내 웅습국(熊襲國)을 치도록 하였다. 그러자 아직 협진(浹辰)도 지나지 않아 스스로 복속해왔다. 또 하지전촌(荷持田村; 노토리타노후레){荷持는 能登利라고 읽는다}에 우백웅취(羽白熊鷲: 하시로쿠마와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격이 강건하고 또한 몸에 날개가 있어서 높이 날 수 있었다. 그래서 황명을 따르지 않고 늘 인민을 약탈하고 유괴하였다.
인용문에셔 보듯 하지전촌(荷持田村)이란 지명에 ‘荷持此云能登利(하지차운능등리)’라는 주석을 덧붙여 놓았다. ‘荷持(하지)’는 ‘能登利(노토리, のとり)’라 읽는다고 설명해 놓은 것이다.
사실 이 주석은 잘못된 것이다. ‘荷持’를 일본어에서 음독하든 훈독하든 “노토리(のとり)”라고 읽지는 않는다. 『일본서기』에는 이처럼 잘못된 주석이 가끔 눈에 띄는데, 대표적인 오류로는 ‘가수리군(加須利君)’을 백제 21대 개로왕(蓋鹵王)이라고 설명해 놓은 웅략기 5년 4월조의 기록을 들 수 있다. 가수리군(加須利君)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가실왕(嘉悉王), 그리고 중애천황(仲哀天皇)과 동일인이며, 백제 개로왕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가수리군은 개로왕을 말한다’라고 주석을 달아놓았으니 후대인들로서는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도 바르게 파악하기 어려워지고 연구도 올바른 방향으로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荷持此云能登利’라는 일곱 글자로 된 주석은 그 내용이 엉터리이긴 하지만 필자는 이 주석을 통해 여러 가지 다른 영감을 받은 바 있으므로 주석내용에 대해 비난하거나 원망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비록 잘못된 주석이긴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주석을 꼼꼼히 달아준 『일본서기』 편찬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하지전촌(荷持田村)’이 가라왕 하지(荷知)의 타무로(たむろ, 屯)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라 생각한다. 다시말해 ‘荷持’는 본래 [가모치(かもち)]라 일컫는 이름을 차자하여 적은 것이며,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가라왕 중에서 재8대 질지왕(銍知王)과 동일한 이름인데 차자만 다르게 한 표기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 “인명풀이 가라왕 하지(荷知)”에서 상술한 바 있으니 그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러니까 ‘하지전촌(荷持田村)’은 ‘가모치의 성’이라는 뜻이고 그렇게 읽어야 하며 “노토리(能登利)”라고 읽을 지명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러한 주석을 덧붙여 놓았을까?
많은 한국인들이 이러한 의문에 부딪히면 좋지 않은 쪽으로 해석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일부러 왜곡한 것이라고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 사실 그대로를 보기 위해서는 민족감정이나 반일정서로부터 벗어나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그렇게 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해 버리는 것은 역사적 진실 파악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荷持田村’을 일본어에서 읽는다면 “가모치노타무라(かもちのたむら)”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만 일컫지 않고 “노토리타노후레(のとりたのふれ)”나 그와 비슷하게 일컫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가 실제 이름은 ‘숭레문(崇禮門)’인데 그냥 예사롭게 “남대문(남대문)”이라고도 하듯이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후대의 편찬자들이 그러한 주석을 붙여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주석 덕분에 우리는 ‘하지전촌(荷持田村)’이 어디에 있었는지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바로 큐슈 후쿠오카현의 아사쿠라(朝倉)시에 있는 추월야조(秋月野鳥)이다. 野鳥가 일본어로 노토리(のとり)이다. 현 추월중학교(秋月中學校) 바로 옆에 추월성터(秋月城迹)가 남아있는데, 바로 그곳이 가라왕 하지의 성채인 하지전촌(荷持田村)이었고, 서기 624년 눌최(訥催)를 구원하러 갔던 신라의 군사들이 백제군에 맞서 싸우지는 못한 채 성만 쌓고 돌아왔다는 그 노진성(奴珍城)으로 추측된다는 말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자비왕조에 보면 위치 미상의 성(城) 이름이 많이 실려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현 큐슈지역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졸저 『임나의 지명』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 자비왕 17년(서기 474년)조에 ‘광석성(廣石城)’이란 성이 나오는데, ‘광석(廣石)’이 [너르돌]을 차자한 표기이니, ‘노진(奴珍)’, ‘야조(野鳥; 노토리)’와 일맥상통하는 지명이라 할 수 있다. 이 광석성(廣石城)은 노진성(奴珍城)을 가리키며 현 큐슈 아사쿠라(朝倉)시 추월야조(秋月野鳥)에 있는 추월성(秋月城)에 비정된다 할 것이다.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burkurta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