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분홍 연지 단장에 바쁜 정선 각시 두위봉

여계봉 선임기자

두리봉 겉이두야 두텁던 정이

풀잎에 이슬 겉이두 다 떨어지네.

 

정선아리랑 한 대목에 두위봉(두리봉)이 나온다. 두리봉처럼 두리뭉실하고 두텁던 정이 풀잎의 이슬처럼 다 떨어지고 말았다는 뜻이다

 

강원도 정선은 말 그대로 첩첩(疊疊)이 산이다. 해발 1,000m를 훌쩍 넘는 산들이 온통 지붕을 이루고 있다. 해발 1,466m라는 만만찮은 높이의 두위봉(斗圍峯)도 정선 땅을 받치는 지붕 중의 하나다. 산 모양새가 두툼하고 두리뭉실하여 주민들은 두리봉이라고도 부르는 산이다. 그래서  산 아래에는 두위봉 가는 길가에 있다고 하여 두리곡이라고 불리는 마을도 있다.

 

두위봉 정상 부근의 철쭉군락지. 연분홍색 연지로 입술 화장하느라 분주하다.


두위봉은 6월 초순이면 허리에는 푸르른 신록을 두르고, 정상 부근인 머리에는 연분홍 철쭉이 입술에 연분홍색 연지를 바르듯 봄 처녀처럼 화사하게 단장을 하기 시작한다. 맑은 날이면 투명한 햇살 아래 분홍 주단같이 철쭉이 펼쳐지고그 위로 희뿌연 안개가 덮이거나 구름이 흐르는 모습을 대하면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다

 

정상 주위의 철쭉군락지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1,400여 년된 주목으로 유명한 이곳은 매년 6월 초에 철쭉제가 성황리에 열렸으나 코로나 여파로 몇 해 동안 열리지 못하다가 올해 64일과 5, 이틀 동안 열려 많은 이들이 여기를 찾았다

 

두위봉 산행코스는 정선군 신동읍과 사북읍 및 남면 쪽으로 발달되어 있다. 두위봉 등반은 대략 4개 코스로 자미원, 단곡계곡, 도사곡, 자뭇골 등에서 오르는데 코스에 따라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에서 5시간까지 소요된다.  

 

오늘은 1코스 단곡계곡에서 출발하여 정상에 오른 후 2코스 도사곡계곡으로 하산(12km, 5시간)하기로 하고, 산오름을 시작한다.

 

두위봉 산행 지도(정선군청 제공)


콘크리트와 자갈길의 임도를 번갈아 밟고 오르다 보니 첫 번째 이정표가 나타난다. 여기서 임도를 버리고 숲길로 들어선다. 비로소 숲 그늘 속에서 더위를 잊은 산행이 시작된다. 산중에는 고요함과 거룩함이 있다. 특히 아침 나절의 산은 더욱 아름답고 신선하다. 들이마시는 공기에는 숲 향기와 밤새 내린 이슬의 기운이 배어 있다.

 

두위봉 북서쪽 단곡계곡을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은 석항천을 이루고,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계곡의 초여름 신록은 청초하기만 하다. 더도 덜도 말고 6월의 신록만 같아라.


두위봉 오르는 산길에는 벌써 여름 기운이 깃들어 있다.


잡목과 풀숲에 덮인 길이 어느새 또렷해진다. 비로소 길의 형체가 드러나자 처음의 미망(迷妄) 사라진다. 이제는 아무런 장애가 없는 길, 외줄기 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모든 것을 비우고 버려야 본지풍광(本地風光)이 숨김없이 나타나는 법. 저 길의 끝에 적정(寂定)과 안심, 무위(無爲)가 있으리라.

 

산행 들머리에서 30여 분 오르니 감로수 샘터에 다다른다. 물이 차고 맛도 기막히다. 가져간 생수는 모두 부어 버리고 감로수로 채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샘물과 같아서 퍼내어도 퍼내어도 다함이 없이 솟아나는 법. 작은 샘터에서 배우는 큰 가르침이다.

 

 

감로수 한 바가지로 욕심과 성냄으로 흐려진 두 눈도 씻는다.


숲속 세상은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노란색 산불괴주머니 군락지도 펼쳐지고, 어린강아지 불알같이 생긴 검종덩굴도 쑥스럽게 머리를 잎 사이에 깊이 묻고 숨어 보려 하고, 벌깨덩굴도 곳곳에 띈다.

 

산나물 밭을 지난다. 영월에서 산나물을 뜯으러 온 아낙들 보따리에서 당귀, 참나물, 곰취, 미역취 내음이 진동한다봄의 끝자락을 붙잡고 푸름을 더해 가는 숲속은 깊어만 가고 미처 꽃을 피우지 못한 철쭉들은 내일을 기약하고 있다. 저 꽃들마저 만발하면 이 숲은 얼마나 장관이겠는가. 자연을 가까이하고 자연을 느끼는 것, 산행의 묘미는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두위봉 철쭉비


산행 1시간 반 만에 두위봉 정상에 오른다. 사방이 탁 트인 정상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경치에 가슴이 후련해진다. 북쪽으로 마주 보고 있는 산이 가을 억새로 유명한 민둥산이다. 그 너머로 가리왕산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온다.


두위봉 정상(1,466m). 좁지만 전망이 뛰어나다.


정상 주변은 장군바위 등 기암과 희귀목인 아름드리 주목들이 철쭉들과  어울려 최고의 풍광을 만들어낸다. 철쭉은 키 큰 나무들 사이에서 연분홍으로 피지만, 두위봉 주변의 철쭉은 주변에 커다란 나무들이 없고, 군데군데 커다란 군락을 이루고 있어서 다른 곳의 철쭉보다 더 붉고 아름답다


두위봉 정상 부근의 철쭉군락지


장군봉에 서면 소백산과 태백산, 함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장대한 마루금을 볼 수 있다. 사방이 탁 트인 정상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경치에 가슴이 후련해진다. 능선 자락 가득히 펼쳐진 산상 정원과 산자락 저 멀리 보이는 연봉들은 모두 살아 숨 쉬고 있다.

 

두위봉 정상에서 바라본 산 들머리 단곡계곡


정상에서 도사곡 휴양림 방향으로 하산을 서두른다. 도사곡과 자뭇골로 나뉘는 이정표를 지나니 고사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죽은 나무가 어찌 저리도 당당하게 서 있을까? 구도의 길에서 좌탈입망(坐脫立亡)한 스님의 모습처럼 깊은 슬픔을 머금은 듯 행복하게 느껴진다.

 

헬기장 주변은 철쭉이 띄엄띄엄 군락을 이루고 있고, 평원에는 야생화가 지천이다. 사실 두위봉은 긴 능선과 넓은 품을 가졌다는 것 빼놓고는 이렇다 할 게 없는 산이다. 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무작정 길기만 한데다 우거진 숲으로 조망마저 신통치 못해 등산객들로부터 눈길을 받지 못하다가 1년 중 딱 한 번 눈길을 받을 때가 있으니, 그때가 6월 초순과 중순쯤이다. 남녘의 봄꽃 잔치가 철쭉을 끝으로 마감하면 두위봉 정상에는 비로소 환하게 산철쭉이 핀다.

 

푸른 숲, 푸른 산길을 홀로 걸어간다. 나무를 보며, 바위를 보며, 꽃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만물은 어디에 존재하든, 어찌 생겼든, 빛깔이 어떻든, 향기가 어떻든 간에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 아니한가. 하물며 사람이야 오직 하랴.

 

지나온 두위봉을 뒤돌아본다. 두위봉 정상을 지나면 평탄하고 부드러운 흙길이 푸른 나뭇가지 아래로 이어져 간다. 산 아래로 뻗어내린 지능선 사이로 정선군 신동이 보이고 사방팔방이 첩첩산중이다.

 

헬기장에서 돌아본 두위봉 정상


앞산 봉우리를 넘어 고개로 내려서면 도사곡으로 하산하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어서 운탄고도로 가는 화절령과 도사곡 휴양림으로 분기되는 삼거리 이정표가 나오고 여기서 휴양림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산 위에서 내려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주목들이 산비탈에 비스듬히 서서 한자리에 모여있다. 첫 번째가 1,200년 수령, 두 번째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 1,400, 세 번째가 수령 1,100년의 고목이다. 우직하고 무던한 두위봉의 무심한 품 안에서 1,000년이 넘는 시간을 버텨온 세 그루의 노거수들. 이들은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닌 불멸의 생바로 영생(永生)이 아닐까.


천연기념물 제433호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 1,400년의 주목 


다양한 나무들은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갖고 살아간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의 눈길이 덜 가는 외진 곳에 홀로 서 있는 나무다. 멀리서 볼 땐 다른 나무와 함께 숲을 이룬다. 가까이에서 보면 혼자서도 풍성하게 푸른 하늘과 더불어 산을 지킨다.

 

주목 군락지로부터 산 날머리 도사곡 휴양림까지 약 2.5km 하산길은 야속하기만 한 돌길이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물소리와 솔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뿐초여름의 신록과 어깨동무하고 산길을 내려온다. 화려하지 않고 담백한 신록에는 숲의 정령이 깃든 것 같다

 

도사곡 휴양림 주위는 초목들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향기가 진하다아래로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소리가 다가설수록 커진다마음에 묻어 있던 세진(世塵)들을 말끔하게 씻어 내는 청정수다. 이끼 낀 돌 사이를 흘러가고 있는 계곡물이 보석처럼 빛난다.

 

도사곡 휴양림 입구에 석탑 조형물이 하나 서 있다. 이곳 두위봉 자락 정선군의 사북, 함백 지역은 한때 석탄 생산지로 황금기를 누렸으나 지금은 예전의 영화가 퇴색되어 기념탑마저 초라해 보인다. 잊히는 것보다 서러운 일이 또 있을까.


도사곡 휴양림 입구의 탄전기념탑


두터운 정을 말하면서 왜 하필 두위봉을 비유로 들었을까. 그것은 두위봉에 올라보면 금방 안다. 두위봉은 무겁고 육중하다. 기기묘묘한 경치도 없고, 날렵하게 치솟은 암봉도 없다. 그저 크고 덤덤한 육산일 뿐이다.

 

누군가 산을 걸고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한다면 그 산은 기암괴석의 화려한 산보다는 마땅히 이처럼 둔하고 무거운 산이 적당하리라. 뜨거운 화려함이야 언젠가 풀잎의 이슬처럼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터. 모름지기 사랑도 덤덤하고 묵직해야 달궈진 아궁이처럼 슬슬 지펴지고 쉬 꺼지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


   


작성 2022.06.06 11:10 수정 2022.06.0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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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