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운전을 하다 신호위반 사고를 낸 노인에게 ‘중대 과실’을 적용해 이미 지급된 건강보험 급여를 환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은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고 치료받다 숨진 노인 A 씨의 유족이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부당이득금 환수를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유족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민건강보험이 가장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인 만큼, 중대한 과실을 이유로 보험급여를 제한할 땐 되도록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A씨는 지난 2020년 5월15일 새벽 5시34분께 승용차를 운전하던 중 적색신호를 위반하고 교차로 내에 진입, 반대편 차선에서 좌회전 신호에 따라 진입하던 피해자의 승용차와 부딪히는 사고를 일으킨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이 사고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이 사고가 신호위반 등 A씨의 중대한 과실 때문에 발생했다는 이유로 A씨에게 지급된 보험급여 5500여만원을 부당이득으로 환수하겠다고 고지했다.
A씨 측은 해당 처분에 불복해 공단에 이의신청을 냈으나,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교통사고 발생에 대해 A씨가 중대한 과실이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보험급여를 부당이득금으로 환수 고지한 처분에 하자가 없다"며 이를 기각했다.
A씨 측은 이에 불복해 이번 부당이득금 환수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A씨가 이 사건으로 무의식 상태에서 장기간 입원 치료를 받다 사망한 점에 비춰 볼 때, 보험급여 전부를 반환하도록 하는 것은 비례의 원칙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A씨 유족 측 주장을 받아들여 공단 측의 부당이득금 환수고지처분을 모두 취소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A씨가 교통사고 당시 고령인 데다 건강 상태 등이 좋지 않았던 만큼, 순간적인 집중력 저하나 판단 착오로 정지신호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봤다.
재판부는 "'중대한 과실'은 약간의 주의만 했다면 손쉽게 위법, 유해한 결과를 예견할 수 있는 경우임에도 만연히 이를 간과한 경우처럼 거의 고의에 가까운 현저한 주의를 결여한 상태를 말한다"며 "A씨가 과속을 했다거나 음주 상태로 운전을 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단지 신호를 위반했다는 사정만으로 A씨가 고의에 가까운 현저한 주의를 결여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