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들의 합창 소리가 여느 때 보다 힘차다. 낙숫물 소리도 더 넓게 퍼져나간다. 늦은 밤 내리다가 가로등 빛에 들킨 비도 기분 좋게 흩날린다. 아스팔트에서 춤추던 빗물이 차의 전조등 앞에서 더 큰 춤사위를 이어간다. 시골길 시내버스 안에는 두어 명이 앉아 편안히 졸고 있다. 창밖의 감나무 잎에 내린 비가 미끄럼틀을 타며 즐거워하고, 물에서 겨우 목만 내밀고 있는 어린 벼도 노래한다. 창문을 열어놓고 글을 쓴다. 봄비다.
봄비는 춘삼월에만 내리는 것이 아니다. 또 봄비가 얇게 흩날리는 것만 아니다. 봄비는 기다림이다. 올해의 봄비는 유난히 늦게 왔다. 기다림이 봄비를 더욱 갈구(渴求)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듯 오늘 내리는 봄비는 계절을 붙잡고 있었다. 초여름 같던 기온은 사람들에게 7월을 떠올리게 하였지만 봄비가 내리지 않은 시간의 흐름은 내내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올봄은 유난히 가뭄이 심했다. 농부에게 봄 가뭄은 더욱 애를 태웠다. 지하수까지 말라버린 대지는 농부의 애타는 마음만큼이나 헉헉대고 있었다. 먼저 모내기를 한 곳은 물기만이라도 맡게 하려고 뛰어다녔고, 아직 하지 못한 곳은 이러다가 때를 놓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야말로 노심초사(勞心焦思)였다. ‘비가 부족하지만 곧 얼마만큼 내릴 것이다’는 일기예보를 믿다가 원망하고, 또 믿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결국은 하늘에 맡긴다.
그 비가 오늘 내렸다. 그것도 ‘조금’ 내릴 것이라는 예보에 ‘그게 어디냐’ 했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때늦은 봄비가 예상보다 훨씬 많이 내려 온 대지를 적셔주었다. 한 방울의 빗물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일찌감치 장화를 신고 뛰어다녔다. 어린 벼가 지쳐있는 논의 물꼬를 다듬고, 고추밭에는 비료를 조심스레 주고, 퇴비가 말라 있는 감나무 밑에도 비료를 뿌린다. 예초기로 죄 없는 잡초를 베어내며 흐린 하늘을 몇 번이나 올려다본다.
올 듯 말 듯 어지간하게 오기 싫은 듯 얇게 시작한 빗방울이 서서히 굵어졌다. 농부들의 발걸음이 빨라졌고 경운기며 비료를 실은 트럭들은 굉음을 울리며 더욱 바삐 움직인다. 양철 베란다에 부딪히는 빗소리와 낙숫물이 박자를 맞춰서 노래한다. 이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유기체(有機體)다. 긴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니 세상 모든 것이 춤을 춘다. 너도나도 춤을 춘다.
우리가 특정한 분야에 지식이 없어도 우연찮게라도 그것이 나에게로 오면 돈오돈수(頓悟頓修)에 이른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경기민요인 창부타령(倡夫打令)이나 회심곡(回心曲)에 보면 ‘하늘과 같이 높고 하해와 같이 깊은 사랑’을 ‘칠년대한 가뭄 날에 빗발같이도 반긴 사랑’이라고 했다. 곧 목숨과 사랑이 같은 것이고 그것은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만물에게 같은 무게로 작용하는 것이다.
기실 가뭄이 길어지면서 비를 기다리는, 자연의 섭리에 더욱 의지하고픈 염원을 하는 것은 사람들만이 아니다. 우리가 ‘미물(微物)’이라고 부르는 세상의 온갖 것들이 기다리고, 그 미물들의 기다림과 어울림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어 생명을 이어가게 한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사람이 어떤 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건 오직 마음으로 볼 때야.’라고 말하는 것 또한 가르침이고 유기체를 확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뒤늦게 온, 결국은 단비로 오고야 만 봄비가 세상 만물을 웃게 하고 있다. 낙숫물이 되어 모이고, 여유롭게 물꼬를 넘은 물은 시냇물로 같이 흐를 것이고 넓은 강을 지나 바다에 이르러서는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오를 것이다. 바다에도 가뭄이 있을까? 그리고 내년에 내리는 봄비는 어디에서 올라간 수증기가 변신해서 내릴까?
단비는 기다림 끝에 온다. 의례적으로 때가 되어 오는 것은 간절함이 없다. 떠난 님은 애달프지만 기다림 끝에 돌아오면 더 눈물겹다. 기다리되 조급하지 않게 단념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면 온다. 잡초를 귀찮아하면서도 미워하지 않는 것은 끈질긴 생명력이다.
개구리 합창 소리에 샘이 났는지 맹꽁이가 창틀에 붙어 ‘꽥꽥꽥’하고 제 목소리를 낸다. 그래 오늘은 실컷 소리치고 노래 불러라.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교육부, 행정안전부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제3회 코스미안상 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