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천국과 지옥

이태상

 

"정신(마음)이 제 집이고, 그 자체로서 지옥을 천국으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가 있다. The mind is its own place, and in itself Can make a Heaven of Hell, a Hell of Heaven."


― John Milton, Paradise Lost

2022년 6월 5일자 뉴욕타임스 일요판 평론 섹션 The New York Times Sunday Review 칼럼 '낙원에서의 문제 (말썽부림) Trouble in Paradise' 필자 모린 다우드Maureen Dowd는 "지난 세월을 두고 인스타그램 instagram에서 다른 사람들의 멋진 여행담을 읽거나 더할 수 없이 멋들어진 삶을 사는 것 같친구들을 방문할 때 부러움에 찬 선망의 시기 질투심이 생기면 나는 (위에 인용한) 존 밀턴 John Milton의 '실락원'에 나오는 이 말을 상기해 나 자신을 달랬다. Over the years, when I felt twinges of envy, gazing at other people’s glamorous travelogues on Instagram or visiting friends who seemed to have the perfect lives, I summoned these comforting lines:"고 칼럼 글을 시작한 후 최근 할리우드 스타 조니 뎁Johnny Depp이 전처 앰버 허드Amber Heard 와의 명예훼손 민사 재판에서 승소 평결을 받은 걸 언급하며 이렇게 칼럼 글을 맺고 있다. 

"그러나 추락은 신속했고 악행들이 뒤따랐다.  한때 찬란히 빛나던 커플이 인류와 마찬가지로 실락원 失樂園하고 말았다. 
But the Fall came quickly and bad actions followed.  The once-radiant couple was, as was mankind, Unparadised."

최근 (2021년 8월 23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코스미안의 우로역정' 우리 함께 반추, 심사숙고, '신곡' 아닌 '인곡,' 아니, 코스미안의 우곡  다 같이 불러 볼거나.

[이태상 칼럼] '코스미안의 우로역정宇路歷程'

영혼의 여로(죽음학)
 
정현채, 서울대 의대 내과학(소화기학) 교수는 10년 넘게 ‘죽음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는 위염이나 위궤양을 유발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연구의 권위자로 대한소화기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부모와 친척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죽음에 관한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수많은 과학적 연구성과를 접한 결과, “죽음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벽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이라는 걸 확신하게 됐다”고 한다.
 
그의 저서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비아북)에서 근사체험, 죽음 뒤의 세계 등을 발췌해 싣는다.
 
-죽은 다음 어떻게 되나 의문 갖고 15년 전 죽음 공부
 
육체는 분해돼 자연으로, 영혼은 다른 차원으로 건너가 임사체험 알고 있으면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크게 줄어든다. 나는 쉰 살 무렵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죽음과 관련이 있는 수백 권의 문헌과 의학 논문을 읽고 동영상 자료를 찾았다.
 
실증주의 교육을 받아 체화한 과학자로선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던 영적 체험들이 단순한 착각이나 환상이 아니라, 분명한 실재임을 역시 과학자의 입장에서 알게 됐다. 우리의 육체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되어 부패해 가더라도, 우리의 의식은 또렷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경이로움은 이후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죽음을 내포한 생명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돼 고난과 역경을 영적인 성장의 기회로 껴안게 되었고 주어진 삶을 더욱 충만하게 향유할 수 있게 됐다.
 
-임종 직전 신체 변화
 
임종이 가까워지면 신체에 몇 가지 증상이 나타난다. 체중감소·식욕감퇴·쇠약·부종 같은 신체적 증상과 더불어 정신 착란, 불안, 흥분 같은 정신적 증상이 같이 나타난다. 음식물을 삼키기 힘들어하거나 수면시간이 늘어나고 세상사에 대한 관심도 옅어진다.
 
임종이 좀 더 가까워지면 소변 배출량이 감소하고, 호흡 변화와 함께 가래 끓는 소리가 나며 혈액순환 장애로 인해 푸른 빛이나 자줏빛 반점이 나타난다. 이밖에 떨림, 발작, 근육경련, 정신착란 등의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임종이 임박한 환자가 이 같은 발작 증세를 보일 경우, 뇌 MRI같은 정밀검사를 하거나 간질을 억제하는 주사약을 투여하는 일이 종종 있다. 이는 적절치 못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병원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치료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 같은 조치를 취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 의료진은 살인죄로 고소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노쇠도 질병의 하나로 보고 치료하려는 경향이 있다. 질병은 어떤 이유로 우리의 신체가 고장이 난 상태이고 이를 고쳐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이 의료행위이다.
 
그러나 노쇠는 고장이 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기계가 수명을 거의 다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음식물을 삼키는 기능이 저하된 고령자에게 어떻게 해서든 음식을 먹이려고 하다 보면, 흡인성 폐렴이 유발돼 오히려 환자를 고통에 빠뜨릴 수 있다. 눈 딱 감고 먹이지 않는 용기도 필요하다. 고령의 노인은 먹지 않아서 죽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이 다해서 다시 말하면 죽을 때가 임박했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스콧 니어링은 100세가 돼 세상을 떠날 때가 되자, 주위 사람들에게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나 또 다른 깨어남이므로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이유에서 화장한 후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채 떠났다.
 
‘죽음학’의 선각자로 일컬어지는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엘리자 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인간의 육체는 영원불멸한 자아를 둘러싼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로스 박사의 이런 주장은 오랜 임상 경험의 결과였다. 수많은 환자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관찰한 삶의 종말 체험과 근사체험을 통해 이끌어낸 결론이었다.
 
삶의 종말체험은 죽음과 관련해 일어나는 중요한 영적 현상이다. 근사체험과 공통되는 부분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다른 개념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떤 환영을 보는 현상을 말한다. 대체로 먼저 떠난 가족이나 친지 또는 친구가 임종하는 사람을 마중 나온다. 이는 임종하는 사람과 가족 모두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마지막 선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근사체험은 죽음 직전에 경험하는 사후 세계로서 자신이 죽었다는 인식을 갖고 체외이탈을 경험하고 터널을 통과하거나 밝은 빛과 교신하며 천상의 풍경을 관찰한다. 세상을 떠난 가족, 친지와 만나고 자신의 생을 회고하는 공통점을 보인다. 근사체험은 갑작스런 사고로 심장과 호흡이 멎은 죽음의 상태에서 체험을 하는 것이다.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죽음을 경험하는 동안 평화로운 마음으로 천장에서 아래의 모든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근사체험에 대한 다양한 측면에서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죽음은 꽉 막힌 벽이 아니라 열린 문이며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을 뜻하는 것”이다.
 
-죽은 뒤 어떻게 되나.
 
스웨덴의 스베덴보리, 그리스의 다스칼로스, 덴마크의 마르티누스 등 신비가들에 따르면, 인간은 육신이 죽은 후 소멸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파동의 에너지체로 존재하게 된다. 영혼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파동으로서만 존재하는데 비슷한 파동을 지닌 영혼들은 서로 모이게 된다. 즉 영혼의 유유상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육신을 벗어나 비물질계로 옮겨 갔다고 해서 갑자기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지상에서 성취한 영적인 발달 정도에 따라 각자의 영혼이 끌리게 되는 여러 수준의 차원이 있다. 영계에는 비슷한 진동수를 가진 영혼들의 공동체가 수없이 존재하며 이들과 계속 유대를 갖고 집단을 이뤄 존재하게 된다.
 
진동수와 같은 의미를 갖는 도덕적 특이 중력이라는 용어도 관심을 끈다. 사후의 영이 처음 도달하는 장소는 이 중력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지상에서 사는 동안의 선함 정도나 결핍 등으로 형성되며, 에너지장이나 기운으로 나타난다. 영적인 발전 단계에 따라 어두운색부터 휘황찬란한 광채까지 다양하다.
 
도덕적 특이 중력에 따라 감당할 수 있는 빛의 양이 제각기 다르므로 위장도 불가능하다. 그것을 속이고 더 높은 궤도로 올라가면 그것의 빛을 감당하지 못한다. 낮은 도덕적 특이 중력을 지닌 사람들은 일단 낮은 수준으로 몰리지만 발달한 영들의 도움으로 더 높은 수준으로 점차 진화해간다.
 
죽어서 육신을 벗어난 신참 영혼은 사후 1차 영역에 머물게 되는데 고독감· 무력감· 결핍감· 고통· 환멸 같은 감정을 느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이때 마음을 열고 간절히 기원하면 수호영혼의 도움을 받아 지상에서 사는 동안 오염되었던 삶을 정화하게 되고, 손상된 영혼을 치유하고 보고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원래 맑고 순수했던 영혼을 회복하고 나면 영혼이 주파수가 높아져 완전히 다른 상위 영역으로 진입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말기 암 진단을 받았거나 임종이 임박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불안해 하지 말라고 다독이고 격려하고 싶다. 근사체험이나 삶의 종말체험을 알고 있으면 죽음에 대해 막연히 품고 있던 불안과 공포가 크게 줄어든다.
 
나 역시 2018년 1월 초 암 진단을 받았다. 인간이 질병 하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널리 알려진 "보왕삼매론"에는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는 구절이 나온다. 질병을 통해 건강의 소중함을 알자.
 
윗글은 지인으로부터 받은 글이다. 나는 이글을 다시 친구에게 보냈다. 이 글을 전달받은 친구 김 모 씨가 오늘 아침 이런 회신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태상 형님
 
주신 글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저는 평소 죽음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일은 끝을 맺는 일입니다. 끝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끝은 소중하며 가장 아름답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은 아름다운 끝을 만드는 예술입니다. 형님 제멋대로의 생각입니다. 그냥 웃어주십시오. 형님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바로 또 이런 회신을 카톡으로 보냈다.
 
김형께서 살아오신 순간순간 너무도 멋지고 아름다운 예술이지요. 그 끝맺음은 그 더욱 멋지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진심으로 깊은 경의의 높은 찬사를 드립니다.
 
우제愚弟 태상이가
 
이 글을 전달받은 또 한 친구는 이런 글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공감하냐? 주파수니 뭐니 이야기해쌌는데 이것 역시 어디서 오는지 설명이 없거든. 우주공간에는 짧고 긴 여러 수만 가지의 주파수가 나돌아다니지만, what, why, how 등등을 알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허사인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다 죽으면 '그만' 아니겠나. 살아 있는 인간들의 끝없는 환상…. 그저 그렇기를 바라는 허무한 환상.”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1927-2014)가 생전에 한 말이 떠오른다.
 
“인생은 네가 산 삶이 아니고 그 삶을 어떻게 네가 기억하는가이다. Life is not what one lived but how one remembers it.”
 
나도 아직 죽어보지 않아서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앞에 인용한 글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죽음을 경험하는 동안 평화로운 마음으로 천장에서 아래의 모든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말엔 나도 수긍이 간다. 전에 내가 영국에 살면서 매주 각지로 출장을 다닐 때 경험한 일이다. 밤에 호텔에서 잠들기 직전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내가 천장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나 자신을 내려다본 적이 있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걱정할 것은 우리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숨 쉬고 살아있는 동안 진짜로 사는 일이다. 다시 말해 네가 누구이고 무엇인가라는 외적 정의에 맞도록 만들어진 껍데기로부터 네 속 알맹이 핵심, 네 진짜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죽음과 죽는 일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이 분야의 한 개척자인 징신병학자이며 '죽음과 죽는 일에 대하여 The Death and Dying’와 ‘죽음과 죽는 일에 어떻게 대처할까 Living with Death and Dying’ 그리고 ‘사후의 삶에 대하여 On Life after Death’라는 책들의 저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Elizabeth Kubler-Ross(1926-2004)는 우리에게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떻게 죽을 준비를 하고 있는가?'
 
죽음에 관한 연구 조사로 세계적인 명성이 있는 이 전문가는 삶의 유한성有限性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성숙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간 실존의 의미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줄 열쇠인 까닭이고 또 죽음이 인간의 성장과 발달 곧 삶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임을 깨닫고 인식함으로써 우리 각자가 자기 삶의 참뜻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까마득한 조상 원시인들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죽음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으리라. 서력 기원전 3천 년에 세워진 피라미드에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는 글을 보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내세를 굳게 믿었었던 것 같다.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모든 사치와 허영 그리고 쾌락까지도 계속 즐길 수 있을 것이리라고.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를 보면 인간은 신들을 섬기기 위해 그의 짧은 인생을 살고 시간이 다 되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죽음을 무서워했던 것 같다.
 
카나안의 신화에는 주인공 아카트가 젊어서 살해되자 그의 콧구멍에서 숨이 떠나듯 그의 생명이 그의 몸에서 떠난다. 생명과 숨이 같은 것으로 숨이 그치면 죽음이 오고 죽음이 올 때 숨이 그친다고 그들은 생각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내세에 신의 상벌이 있을 것으로 보고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 신화에선 개개인에게 선택의 책임을 지운다. 긍정적으로 순결한 선善과 부정적이고 불결한 악惡, 이 둘 가운데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한 인간의 행동이 그가 죽은 뒤까지 그를 따라가기 때문에 그가 신의 상벌賞罰을 피할 길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 신화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 그의 영혼은 이 물질세계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잇는 다리를 건너, 의인義人은 아름다운 기쁨의 나라로, 악인은 고통의 나라로 간다. 그렇지만 시간이 다 가도록 고통을 받고 깨끗해지면 악인들의 영혼도 의인들이 사는 복된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조로아스터교에서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내세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한다.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살든가 그렇지 못하면 내세에 고통을 받아 죗값을 치르고 나서 구원받도록.
 
유태 히브리 사상에서는 사람이 육신과 영혼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처럼 히브리 사람들은 우리가 구약성서 ‘욥기’에서 볼 수 있듯이 사후死後의 세계가 즐거운 곳이 아니고 돌아올 수 없는 나라요, 어두운 암흑의 장소로 본다.
 
구약성서에는 죽음을 보는 세 가지 다른 관점이 있다. 하나는 가나안 신화에서 나온 것으로 저승이란 뜻의 히브리어로 쉬올 Sheol이란 곳의 통치자는 그의 사자死者의 나라 백성들이 될 후보자들을 찾고 있다. 둘째는 히브리 문화에서 비롯한 것으로 산 사람은 죽은 사람과의 접촉을 일절 피한다. 셋째는 페르시아에서 유래하여 구약시대 말기에 유태인 사회에 전파된 것으로 내세에 있을 상벌신화이다.
 
신약성서의 세 가지 주제는 죽음, 부활, 그리고 영생으로 로마 법정에서 단죄받고 처형된 예수의 비극을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신화화해서 그가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것으로 풀이, 그 승리를 기독교 신자들도 같이 나눌 것으로 생각한다.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믿기를, 기독교 신자의 영혼은 곧바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또 일부 예를 들어 가톨릭교 신자들은 어떤 영혼들은 연옥煉獄이란 곳에서 먼저 깨끗해진 다음에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리고 또 일부는 죽은 자들은 모두 최후의 부활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고 한다.
 
어떻든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미신자나 이교도들은 영원한 벌을 받기 위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저주(?)하면서 이와 같이 배타적排他的이고 이기적利己的이며 편파적 偏頗的인 신화神話의 교리敎理를 무시한 신神의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있을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조차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무신론자無神論者라고 주장할 만큼 유치幼稚하고 오만방자傲慢放恣하거나, 유신론자有神論者라 할 만치 단순하고 맹목적 盲目的인 맹신자盲信者가 아닌 나는 나 스스로를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일반의미론一般意味論 [General Semantics launched in 1933 by Polish American originator Alfred Korzybski(1879-1950) with the publication of ‘Science and Sanity: An Introduction to Non-Aris totelian Systems and General Semantics]에서 강조하듯이 “아무도 아무것에 대해 전부 다 알지 못한다. Nobody knows everything about anything.” (다시 말해) In other words: “We cannot imagine, think, say, understand, know all about anything or anyone – including ourselves.” 나도 그렇게 알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 까닭에서다.
 
그렇지만 단 한 가지 분명하고 확실하다고 내가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이 있다. 틀림없이 꼭 그러리라고 말이다. 하느님이 계신다면 또 참으로 하느님다운 하느님이라면, 그분은 하늘님이다. 그 하늘님은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며 그렇다고 중성中性이나 무성無性도 아닐 것이다.
 
질투심 시기심에 불타 편파적으로 그 어느 한 특정 종種이나 그 어느 한 특정 선민 選民 민족이나 개인 또는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만을 편들고 편애하는 그따위로 속악俗樂하고 소갈머리 좁거나 없는 분이 절대 절대로, 결코 결단코 아닐 것이란 것이다.
 
정말 신神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또 진정 신이 신다운 신이라면, 그리고 참으로 내세가 있고 그리고 천당과 지옥이 있다 할 것 같으면, 예수나 석가모니를 찾아 부르면서 ‘알랑방귀’ 뀌는 아부 아첨꾼들 그리고 진짜로 도움이 필요한 헐벗고 굶주린 이웃은 못 본 체하면서 천당클럽 회비 내듯 아니면 부정부패 축재하는 부패 한 관리에게 뇌물 바치듯 교회나 절에는 아낌없이 많은 연봇돈과 시줏돈을 바치는 뇌물꾼들과 천당계꾼들부터 몽땅 지옥에 보내리라. 그리고 부질없이 신의 자선적慈善的인 구원을 바라지도 않으면서 제 운명은 어떤 것이든 달게 받아 신나게 열심히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만 천당에 들게 하리라. 우리 생각 좀 해보자.
 
천당과 지옥이
따로 있나
누구를 미워할 때
지옥이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천당이지
천당과 지옥이
어디 있나
호의와 선의
베푸는 마음이
천당이고
악독하고 고약한
몹쓸 마음이
지옥이지
천당과 지옥이
언제인가
잘 사는 오늘이
천당이고
잘못 사는 이 순간이
지옥이지
오늘 잘사는 사람이
내일 또한 잘살 수 있듯이
이 세상 삶을
잘사는 사람이
내세에서도
잘살리라.
오늘 뿌리는 대로
내일 거두게 될 테니까
제 마음 속에
아름다움 있는 자만이
바깥세상 아름다움을
볼 수 있듯이
진주 같은 마음을
가진 자만이
진주를 진주로
알아볼 수 있으리라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낙천주의자만이
내세의 천국도
누리게 되리라
그러니
오늘 이 순간을
즐겁게 사는 것이
천당이고
마지못해 사는 것이
지옥임에
틀림없으렷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으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작성 2022.06.11 10:43 수정 2022.06.1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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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