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동심송童心頌

이태상

 

2022년 6월 16일자 미주 뉴욕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삶의 뜨락에서] 칼럼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필자 이춘희 시인은 "자연을 거스르며 자연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떠한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묻고 있다.

[삶의 뜨락에서]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1925~1979)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읽었다. 소설의 원제목은‘Education of Little Tree’이고 저자 포리스트 카터의 자전적 소설이다. 배경은 1930년대 대공황 무렵. 주인공 작은 나무는 다섯살 때 부모를 잃고 체로키족 혈통을 이어받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산속에서 살게 된다. ‘작은 나무는 사냥과 농사일, 위스키 제조 등 할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생활에 꼭 필요한 것만을 자연에서 얻는 인디언식 생활방식을 점차 터득해 나간다.

주인공인 저자, 그의 인디언 이름은 ‘작은 나무’다. 그는 이른 새벽 할아버지와 함께 산꼭대기를 오른다. …산꼭대기에는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반짝이는 빛들이 하늘 위로 솟구쳤고, 얼음에 덮인 나뭇가지들은 물결처럼 내려가면서 밤의 그림자들을 천천히 벗겨가고 있었다…. “산이 깨어나고 있어.” 할아버지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은 읽는 내내 울창한 숲과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산 한가운데 서 있는 착각이 들게 했다.
 
할아버지는 산에 가서 매가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것을 보고 자연의 이치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 꿀벌인 티비들만 자기들이 쓸 것보다 더 많은 꿀을 저장해두지. 그러니 곰한테도 뺏기고 너구리한테도 뺏기고 우리 체로키한테 뺏기기도 하지. 그놈들은 언제나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쌓아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똑같아. 사람들은 그러고도 또 남의 걸 빼앗아오고 싶어 하지. 그러니 전쟁이 일어나고….”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자연의 이치란 누구나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이 봄을 낳을 때는 마치 산모가 이불을 쥐어뜯듯 온 산을 발기발기 찢어놓곤 한다. 어린이답지 않게 당차고 성숙한 모습에 웃음이 나면서도 무한한 감동을 안겨준다. ‘작은 나무’는 개울가에 앉아서 거미가 거미줄을 한 가닥씩 쳐 나가는 광경을 관찰하기도 하고 봄철이 되면 민들레꽃들을 따서 샐러드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대 자연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작은 나무’ 의 모습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없이 자랐던 나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결과적으로 밖에서 자랐다. 사계절 내내 집 주변 마당과 들판에서 시간을 보냈었고 친구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새빨갛게 매달린 옆집 석류나무에서 몰래 석류를 훔치기도 하고, 한여름 포도나무에 기어올라 입술이 시퍼렇도록 포도를 따 먹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야생나무처럼 들판을 뛰어다니던 나의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영혼이 가장 따뜻했던 날들이었다. 유년기, 그것은 누구에게나 낙원이다. “더는 어린이가 아니라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라고 한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과거를 모르면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다며 체로키족의 지난 일들을 알려준다.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고, 육신보다는 영혼의 마음을 키워야 하며 서로의 영혼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가르치는 인디언의 삶을 통해 환경, 인종, 교육문제 등을 생각해본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작은 나무’의 순수한 모습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행간 들어 있는 인디언의 시각에서 바라본 문명인에 대한 해학, 할아버지와 작은 나무의 만담 그리고 만남과 이별이 들어있는 이책은 풍부한 감성으로 우리의 메마른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자연을 거스르며 자연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떠한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자라나는 손자 손녀들의 미래를 생각해 본다.

이춘희 / 시인


자, 이제, 지난해 2021년 2월 25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을 재음미해볼거나.


[이태상 칼럼] 코스미안은 모두 시인(詩人)이자 철인(哲人)이다


언제나

당신은 당신이었고,

나는 나였었지;

우리 때가 오기 전엔

우린 둘이었었지.

나는 당신의 것이었어

나도 모르게,

그리고 당신 또한

언제나 나의 것이었지.


ALWAYS


You were you,

and I was I;

we were two

before our time.

I was yours

before I knew,

and you have always

been mine too.

-Lord Byron(George Gordon Byron1788-1824)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지금은 바람이 좀 불지만 하늘이 맑고 푸릅니다.


며칠 전에 보내주신 바이런 시인의 케임브리지 시험답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저는 아직까지 그 답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그저 알쏭달쏭하네요.


하지만 기적의 의미는 한번 생각하게 됐어요기적이란 간절했을 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되었고 물론 그것의 내용과 크기가 각자 구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요.


기적이 현실에서 일어났을 때의 그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며저절로 하늘을 향해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잘 알진 못하지만 어떤 우주의 섭리가 날 바라보고 있고 돕고 있다는 생각을 기적을 통해서 하게 되지요선생님을 만난 것도 저에게는 기적이라 여겨집니다.


선생님의 금붕어란 동시를 처음 읽었을 때 애틋하고 애절한 그 아이의 마음이 저의 마음이란 것을 느끼며 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우주는 그렇게 한마음으로 연결맺어지게 되나 봅니다.


바이런의 'she walks in beauty'라는 시를 고등학교 때 한 번 읽어 본 것 외엔 별로 아는 것이 없네요그래서 그에 관해 조금 알아보았는데 두루 공통된 부분은 그의 자유로운 연애관인 것 같아요남녀 가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사랑의 대상을 만나고 불태우는 그의 정열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네요.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솔직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사람으로 느껴졌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에 매우 충실했던 것 같아 그렇게 많은 시가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그래서 시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봅니다.


00드림


이상과 같은 이메일 편지를 받고 나는 이렇게 답장을 쓴다. 00님 편지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 동감이지만 그래서 시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봅니다.”에는 나는 좀 다른 생각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모든 코스미안은 하나도 예외 없이 다 시인(詩人)이자 철인(哲人)으로 태어나지만 자라면서 타락한 어른들의 잘못된 세뇌교육(洗腦敎育)으로 속물(俗物)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1972년 초 직장 때문에 영국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해 살면서 영국 사람들이 사람을 여러 가지로 지칭하는 것이 아주 이상했다차 타고 다니는 사람은 모터리스트(motorist), 자전거 타는 사람은 사이클리스트(cyclist), 걸어 다니는 사람은 퍼데스트리안(pedestrian)이라 지칭하는 정도는 쉽게 이해할 수 있어도 대화가(對話家 conversationalist)라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너는 장차 커서 뭣이 되고 싶으냐’ 물으시면 나는 사람이 될래요라고 대답했었다대통령이다중통령이다소통령이다라는 정치인회장사장하는 사업가대장중장소장 장군이다라는 군인가수배우스타다라는 연예인미술가다 화가다 음악가다라는 예술인대설가중설가소설가수필가시인이라는 작가등등 부지기수의 상품 라벨 같은 딱지가 이상하고 어색하게 들렸다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직업은 우리가 우리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편의상 수시로 바뀔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일 뿐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나는 본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시인이란 타이틀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사람이 면 누구나 언제라도 숨 쉬듯 ()’를 쓰고 그 어떤 명작’ ‘걸작’ 이상의 생생한 이라는 작품을 순간순간 쓰는 것일 덴데 그 무슨 쥐뿔 나게그야말로 하루 24시간 이슬 먹고 구름 똥 싸는’ ‘만 쓰는 사람인 듯마치 문화적인 특권층 귀족인 양행세한단 말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먹지도 싸지도 않고 도()만 닦는답시고 마치 사람 이상의 ()’이라도 된 듯이 성자(聖者)다 위인(偉人)이다 아니면 성직자(聖職者신부(神父목사(牧師스님 중()이다 하면서 그 누구도 절대로 확실히 알 수 없는 미지(未知)의 초월자(超越者)의 중보인(中保人대변자(代辯者)로 행세하는소위 일컬어 종교인(宗敎人)’들을 무조건 숭상(崇尙숭배(崇拜)할 수가 없었다.


모름지기 그래서 세상에는 스스로 자신을 무신론자(無神論者 atheist)’니 성상파괴주의자(聖像破壞主義者 iconoclast)’니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 libertarian)’니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agnostic)’이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다시 말하자면 세상에 절대적인 성()과 속()이 따로 없고()과 악()이 따로 없으며 옳고 그름이 따로 없이 너와 내가 하나이고 안과 밖이 같으며 사랑 이상의 예술도종교도진리도철학도 없다는 것이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작성 2022.06.18 10:17 수정 2022.06.1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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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