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상황이 호전되면서 여름에도 산행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여름에는 무리한 산행으로 건강을 해칠 우려가 크기 때문에 신중하게 산행지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산행 방식을 조금 달리하면 한여름에도 더위를 피해 산행을 즐길 수 있다. 그늘이 많고 시원한 계곡 코스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여기에 하나 더하자면 폭포를 빼놓을 수 없다.
산속에서 만나는 장엄한 폭포는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물론 그 크기와 수량에 따라 느낌이 다르지만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세상 시름을 잊고 여름 산행의 진수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장수대를 출발하여 대승폭포를 둘러본 후 설악의 서북능선 서쪽 끝 안산 자락을 지나면서 설악의 내밀한 속살을 들여다보고 십이선녀탕 계곡으로 하산하기로 한다.
장수대 탐방지원센터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시릴 정도로 녹음이 짙은 숲길로 들어선다.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산 기운의 감촉에 일상의 갈증은 어느새 사라진다. 도시에서 묻혀온 탁한 기운은 발바닥 사이로 빠져나가고 대신 숲의 살갗이 내뿜는 생명력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생명의 근원인 물이 시작되는 곳, 숲은 그렇게 말없이 인간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있다. 그러나 설악산 일대 케이블카 공사 강행으로 사람들이 삶의 편의만을 추구하면서 숲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어 불안한 마음으로 숲길을 걷는다.
대승폭포로 오르는 산길은 짧지만 가파른 나무계단의 연속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듯한 계단과 산비탈에 지쳐갈 때 숲으로 가려졌던 전망이 터지면서 한국의 마터호른으로 불리는 가리봉과 주걱봉, 삼형제봉의 웅장한 산세가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눈 앞에 펼쳐진다.
장수대 탐방센터에서 약 40분 걸려 도착한 대승폭포는 88m의 물기둥이 낙하하여 장관을 이룬다. 대승폭포 앞 넓은 반석에는 조선 시대 명필 양사언이 쓴 구천은하(九天銀河)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폭포는 떨어지는 폭포수의 물보라와 이 물보라에 이어지는 무지개가 영롱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데, 오늘은 며칠 전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 덕분으로 ‘가장 높은 하늘에 흐르는 은하수’라는 시구에 걸맞게 우리나라 3대 폭포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장수대에서 대승령까지는 1시간 반 정도를 계속 숨을 헐떡거리면서 올라야 한다. 호젓한 숲길 아래 등산로 보호를 위해 대승령까지 깔아 놓은 돌길 때문에 피로도가 더 커진다. 녹음 사이로 찾아든 볕뉘가 따갑다. 여름의 거친 숨이 숲에 닿는다. 여름의 기운이 내 곁으로도 다가온다. 설악산은 지금 여름을 맞고 있다.
이윽고 대승령 삼거리 능선에 올라선다. 삼거리 왼쪽은 안산과 십이선녀탕 계곡, 오른쪽은 귀때기청봉을 거쳐 대청봉으로 가는 방향이다. 이곳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가 안산 방향으로 걸음을 계속한다.
대승령에서 완경사 등로를 따라 약 20분 정도 오르면 봉우리 정상에 도착한다. 대승령, 안산, 십이선녀탕으로 분기되는 이정표가 있는 안쪽 공터에는 많은 산객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식사를 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정표 안쪽에 있는 안산 방면 등산로는 2032년까지 안식년 기간이어서 입산이 통제되고 있다. 서북능선의 끝, 안산을 못가는 아쉬움을 달래고자 안산과 치마바위가 잘 조망되는 능선에잠시 오르기로 한다. 밀림 속 같은 등로를 벗어나 능선에 올라서면 드디어 파노라마의 조망이 터지기 시작한다. 좌로부터 대청봉(1,708m)과 공룡능선, 귀때기청봉(1,578m), 서북능선, 그리고 점봉산(1,424m)과 한계령, 다음으로는 서북능선 맞은 편에 평행되게 흐르는 산줄기 즉, 한계령에서 분기되어 흐르는 설악산 가리능선이 웅장한 산세를 드러낸다.
안산은 암봉(巖峰)으로 원통쪽에서 바라보면 산 모양이 말안장을 닮았다고 하여 길마산이라고도 한다. 설악산 중청봉에서부터 이어지는 18km 길이의 서북 능선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설악산에서 가장 내륙 쪽에 위치한 봉우리이며, 좌우로 옥녀탕 계곡과 십이선녀탕 계곡이 안산 봉우리를 협시하고 있다.
설악산에서 안산은 대청봉 못지않은 멋진 경관을 자랑한다. 남쪽으로 가리봉, 주걱봉, 삼형제봉 너머로 점봉산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황철봉, 상봉, 신선봉을 잇는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진부령, 그 너머 알프스 리조트가 가물가물하다.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감투봉, 귀때기청봉, 끝청, 중청을 지나 대청봉이 머리에 흰 구름을 인 채 위용을 뽐낸다. 이 능선의 각 봉우리에서 남북으로 흘러내린 능선마다 산꾼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릿지와 바윗길이 숨겨져 있고, 그 아래 계곡에는 옥처럼 맑은 물이 휘감아 흐른다. 이 길을 떳떳하게 걸을 수 있는 그때가 다시 올 것인지.
서쪽 안산(1,430.4m)에서 중청(1,665m)까지 이어지는 서북능선은 설악산에서 최장의 능선이다. 이 능선은 인내심을 요하는 길고 험하지만, 산행 내내 북으로 용아릉과 공룡릉 등 설악산을 대표하는 주능선과 남으로 웅장하면서도 기운찬 가리봉, 주걱봉 능선과 장대하면서도 부드러운 점봉산을 바라보며 걷을 수 있어 여느 산에서 느낄 수 없는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서북능선 맞은 편에 나란히 흐르는 산줄기는 한계령에서 분기되어 흐르는 설악산 가리능선이다. 기치창검(旗幟槍劍)한 날카로운 암봉들이 권위를 지키는 근위병 모습으로 능선에 도열해 있다. 우뚝 솟은 가리봉 우측으로 운무를 헤쳐나온 주걱봉과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산그리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계령 방향을 바라보니 가리봉과 저 멀리 점봉산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두릅나무는 아직 파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데 여느 꽃이나 열매에 비할 데 없이 예쁜 모습이다. 근처에는 열매가 달린 음나무도 자라고 있다. 줄기둘레가 80㎝, 키는 30m쯤 되는 큰 그루도 많다.
오늘같이 날씨 좋은 날, 서북능선의 서쪽 끝에 서니 남녁 백두대간의 끝인 진부령까지 보인다. 어쩌면 끊어져 있기에 더 번다한지도 모른다. 더 흐르지 못한 길이 아쉬워 헛헛한 마음 달래느라고 말이다. 길은 이어져 있으나 더이상 갈 수 없는 그 고갯마루에서 더이상 흐르지 못하고 멈추어 서 있는 백두대간과 작별을 고하고 이제 십이선녀탕이 있는 남교리 방향으로 내려선다.
안산과 십이선녀탕 삼거리가 있는 봉우리에서 약 30분 정도 이끼가 낀 밀림 숲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십이선녀탕 계곡과 만나게 된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하여 늘 습기를 달고 있어 여간 미끄러운 것이 아니다. 물먹은 나무뿌리도 미끄럽고 축축한 이끼 옷을 두껍게 입은 바위는 천연의 미끄럼틀이나 다름없다.
십이선녀탕 계곡 등산로는 깊을수록 아름다운 내설악의 정수를 보여준다. 계곡은 내설악의 대승령에서 북서쪽으로 흘러내린 긴 코스로, 대승령과 안산에서 발원해 인제군 북면 남교리까지 약 8㎞ 이어진다. 계곡에 들어서자마자 협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능선을 누비며 흘린 땀을 훔친다.
십이선녀탕은 계곡의 12개 맑은 탕에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8개뿐이다. 이러한 데는 물이 많을 때와 적을 때에 따라 암반 위를 흐르는 계곡물의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9년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선정되기도 한 십이선녀탕은 녹음과 단풍으로 철철이 옷을 갈아입으며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함을 웅변한다. 특히 가을은 십이선녀탕 계곡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계절이다. 계곡 사이로 핀 단풍과 암벽이 옥빛의 계곡물과 조화를 이루며 내설악의 장관을 연출한다. 절경에 취해 이리저리 눈을 돌리다 보면 원근감을 잃고 현기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두문폭포를 시작으로 셀 수 없이 크고 작은 폭포들을 따라 내려가는 십이선녀탕 계곡의 비경에는 독탕을 시작으로 북탕과 무지개탕이 차례로 등장하고 옹탕, 음탕, 복숭아탕, 용탕, 막탕 등이 그 뒤를 잇는다.
복숭아탕은 십이선녀탕계곡 최고의 명소다. 폭포수로 인해 암벽이 파인 모습이 복숭아 모양을 하고 있다 해서 복숭아탕이라 불린다. 커다란 소와 와폭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복숭아탕은 눈과 얼음이 석회동굴의 종유석처럼 흘러내린 채 사뭇 괴기스러운 풍광을 자아내지만 그 위쪽 바위벼랑은 은구슬 발을 드리운 것처럼 곱고 아름답다.
작은 소와 폭포들이 이어지고 잣나무와 박달나무, 소나무 등 거목들이 우거져 절경을 이루는 십이선녀탕 계곡을 걷다 보면 어느새 산행 날머리 남교리 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한다. 식당 앞을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지만 차디찬 냉기로 제대로 된 탁족을 할 수 없다. 속세의 먼지를 옥류에 털어내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여름 더위가 시작되면 지친 일상을 쉬어가고 싶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이때 나만의 명당을 찾아가서 피할 수 없는 더위를 오히려 즐길 수 있는 곳, 폭포를 찾아 떠나는 여름 산행지로 추천한다.
여계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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