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지(旺池)는 왕성할 왕(旺), 못 지(池) 자를 쓴다. 우리 어릴 적에는 태조 이성계가 남해 금산에서 왕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하고 왕지마을을 지나갔다. 그 이후 ‘왕이 지나간 마을’이라고 해서 ‘왕지’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런데 설천면지를 보니 태조 이성계가 왕지마을을 지나면서 보니 마을 앞 바다가 호수같이 보이고 마을에서 광채가 났다고 전한다. 이성계가 왕지마을 옆 수원늘에서 배를 타고 건너 개성으로 갔다고 하니 왕이 지나갔다는 말은 영 엉뚱한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우리 남해 마을이 222개에서 지족1리와 지족2리가 합하면서 221마을이 되었다. 그동안 남해의 자연 예찬 역사 이야기를 했다면 이제부터는 그 마을에서 태어나 세상을 이롭게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언급해 볼 생각이다.
왕지마을에는 일제강점기 3·1운동 때 왕지마을에서 나고 자란 윤주순 선생이 있다. 윤주순 선생은 남해 선비들과 남해 문항마을에서 만세운동을 주선했다고 전해진다. 만세운동 이후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옥고를 치르고 난 이후 집으로 와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선생은 나라 없는 설움에 24살 어린 나이에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고 하니 남해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한 번쯤 그분의 삶을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은 듯하다. 왕지마을이 생기고 그곳에 살았던 분들이 모두 나름의 삶의 가치를 가지고 생을 살다 가셨겠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개인의 안위 보다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에게 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움을 떨쳐내고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서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가 없어 그저 바라만 보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왕지마을을 빛낸 윤주순 선생의 독립운동은 그래서 마을의 역사가 되고 후세의 본이 된 것이다.
왕지마을에 이런 사람의 역사도 있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성공하여 벚꽃 묘목을 남해에 기증하여 봄이면 남해에 벚꽃이 지천으로 핀다. 역사 이야기, 벚꽃 이야기에 더하여 왕지마을에는 중학교 동창생 윤석근이란 친구가 있다. 중앙선관위 1급 공무원으로 있다.
1급 공무원인 동창생 윤석근은 학교 다닐 때 소통을 한 적은 별로 없었는데 남해신문에서 기고하는 내 글을 보고 지인들과 남해를 찾아오면서 남해투어를 부탁하여 같이 다녀 본 적이 있다. 참 반듯하여 선관위와 딱 어울리는 친구라는 생각을 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지나간 마을에서 독립운동을 한 윤주순 선생과 벚꽃나무를 기증한 분과 일 잘하는 일급공무원 윤석근과 양재문 선생, 윤주석 선생, 윤희산 선생 등 남해를 빛낸 분들이 있다.
누구나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면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 가문의 역사가 되고 마을의 역사가 되고 지역의 역사가 되는 법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남해 왕지마을의 역사는 오늘도 이렇게 누누이 이어져 가고 있다.
[서재심]
시인
남해군문화관광해설사
코스미안뉴스 객원기자
서재심 alsgml-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