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 교수의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는 한번쯤 꼭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에는 다른 도시개발 관련 서적에서 볼 수 없는 ‘도시개발’과 ‘도시재생’에 관한 특별한 생각이 보인다. 도시개발에 관한 깊은 통찰과 차분한 생각을 전하면서도 인간 삶에 기초한 도시개발 이론을 펼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인문정신이 충만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도시설계가로서 그가 갖고 있는 관점은 대다수 도시설계가의 그것과 대비된다. 대부분 도시공학적 측면을 우선시하면서 도시설계와 도시운영을 거론한다. 하지만 정교수가 도시를 바라보는 시각은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도시이고, 그 유기체는 인간의 문화와 역사를 품은 삶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의 관점에는 도시와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도시설계가로서의 자질과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책에 나온 내용 한 가지를 살펴보자. 서울이란 말의 어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여러 어원 중에 정 교수가 꼽는 서울의 어원은 여러 울(타리)중에서 우뚝 솟아 빼어난 곳을 뜻하는 ‘솟울’이다. 그래서 으뜸가는 도시로서의 서울은 이름처럼 빼어난 도시이며 탁월한 도시이다. 그는 서울의 으뜸가는 매력 세 가지로서 자연, 역사, (서울이 담고 있는) 독특하고 우아한 마음을 꼽는다.
먼저 자연적으로 서울은 백악산(북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으로 이어진 내사산(內四山)이 중심부를 둘러싸고 있으며, 삼각산(북한산), 아차산, 관악선, 덕양산으로 이어지는 외사산(外四山)이 외곽을 두르고 있다. 또 폭이 넓은 한강과 여러 지천이 서울 곳곳을 가로질러 흐른다. 또한 여러 언덕이 발달해있어 평평한 여느 도시와는 지형이 다르다.
두 번째 매력인 역사는 사실 조선왕조 600년을 거슬러 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왕조의 수도 이전에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한성백제의 수도로서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과 방이동 백제고분은 서울의 유구한 역사를 보여준다. 그래서 서울에는 시간이 쌓이고 익어온 그윽한 매력이 곳곳에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세 번째 매력에 대해 정교수는 도시전문가로서의 예리한 관점을 보여준다. 서울을 설계한 독특하고 우아한 마음은 서울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평지에 성을 쌓은 북경과 달리 서울은 내사산의 능선과 언덕을 따라 성곽을 쌓았다. 중국의 수도 북경이 남북을 관통하는 중축선을 따라 내성과 외성을 두른 것과 달리 서울 성곽은 구불구불 흘러가는 형상을 띤다.
북경은 남북을 곧게 꿰뚫는 중심축과 네모난 형태를 강조하지만, 서울은 흥인지문(동대문)과 돈의문(서대문)을 연결하는 주로(主路)인 종로가 서대문 가까이 가서는 조금 아래로 휘어진다. 또한 광화문과 종로를 연결하는 세종로와 돈화문과 종로를 잇는 돈화문로 같은 주작대로도 종로와 직각을 이루지 않고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정교수는 이 점에 주목하는데, “도시는 네모꼴로 구획되고, 길은 곧게 뚫려야한다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하고 여유로운 디자인 철학이 바로 서울을 만든 독특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서울은 자연 그대로의 지세를 살리면서 아름다운 도시를 만든 것이니, 우리 선조들은 이전부터 이미 자연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도시 설계를 실행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후손들은 서울의 풍광과 역사 외에도 도시를 설계한 조상들의 지혜와 마음을 생각하면서 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한 가지 더 눈여겨 살펴볼 것은, 도시문제를 해결하는 그의 해법 중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공유공간’을 일구고 사람들의 ‘관계망’을 되살려야 한다, 라는 점이다. “살면서 접하게 되는 여러 다양한 욕구를 시장에서 제각각 해결하기보다 마을의 관계망을 통해 충족하고, 삶의 터전을 개인공간에서 공유 공간으로 조금씩 옮겨가는 것, 여기에 도시문제와 마을문제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있다”라는 그의 관점에 나는 퍽이나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래알 시민, 벌집 속 주민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마을공동체 안에서 마을주민으로 살아가자는 그의 외침이 내겐 큰 울림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굽이진 한강을 바라보며 자연풍광이 멋스러웠을 옛 정취를 그려보는 그의 마음이 책 곳곳에 나타나있다. 오늘날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이상하고 기형적인 낯선 빌딩들, 이기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한 차갑고 탐욕스런 거대한 건물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익을 생각하는 차원에서) 경관관리가 필요하다는 그의 견해를 접하면서 아쉽고, 부끄럽고, 염치없는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한강을 또는 북한산, 남산 등 도심의 산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지속가능한 삶에 영향을 주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 아닐까. 경관을 가리는 것은 길게 보면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저해하는 것이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비롯해 여러 경관을 해치는 것은 소수의 즐거움(내지는 사업자의 이득)을 위해 다수의 미적 권리를 해치는 일이다. 그러니 ‘입면적 제한치’를 적용하면, 입면적제한(높이x폭)을 통해 고층광폭형 건물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다, 라는 그의 이론은 매우 설득력 있다.
인문적 관점에서 본다면, 자연은 지금 이 시대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후손의 것이기도 하다. 또 자연이 선사하는 풍광과 혜택은 소수의 것이 아니라 다수가 누려야 할 공익이다. 그런 점에서 소수가 즐겁고 행복할 입지조건을 갖춘 건물이 아니라, 다수가 눈과 마음을 통해 제한 없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행복이 지속가능한 삶을 가능케 하는 요건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언제까지 사익이 공익을 해치도록 놔두어야 하는가. 만인의 즐거움이 손상되지 않도록, 입면적과 차폐도를 적극 활용해서 더 이상 경관을 크게 해치는 도시개발이 없게 하면 좋은 시정을 펼치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