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 칼럼] 인명풀이 백제 동성왕 곤지(昆支)

최규성

[]이라는 우리말이 있다. ‘맏딸, 맏아들, 맏며느리등에서 보듯 첫째를 가리키는 말이 []이다. [/mot]은 첫째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가장 으뜸되는 것, 가장 뛰어난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의 음은 쉽게 넘나들었다. [/mot][/mor], [/mos]이 쉽게 부전(浮轉)되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자면, ‘맏아들, 맏딸, 맏며느리등에 쓰인 []말벌, 말매미, 말잠자리등에 쓰인 [], 그리고 장사꾼들이 최초로 하는 거래를 마수라 하는데, 장사꾼들이 많이 사용하는 [마수()]가 모두 같은 어원에서 분화되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한글이 있으니까 [/mot]이라 일컫는 말 정도야 그대로 이라고 적으면 되지만 입으로는 쉽게 소리낼 수 있는 이 []이란 말을 한글이 없었던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 글로 적기는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사람들은 []이라고 하는 우리말을 글로 적고자 할 때 어떻게 했을까? 차자표기(借字表記). 그렇다, 한자를 빌려서 적었다


모대(牟大) 모도(牟都) 말다(末多) 마제(摩帝


백제 24대 동성왕(東城王)의 이름은 모대(牟大), 모도(牟都), 말다(末多), 마제(摩帝)’ 등으로 표기가 되었다. 이들 표기는 전부 [ᄆᆞᆮ/mot]이라 하는 이름을 음차하여 적은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졸저 인명풀이 계백과 김유신에서 상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 다시 논하지는 않겠다


첫째 아들을 맏아들이라 하고 첫째 딸을 가리켜 맏딸이라고 하듯이 첫째 아이를 가리켜 우리는 맏이라고 일컫는다.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니까 바로 앞에서 열거한 동성왕의 이름 표기는 그 [/mot]을 연진발음한 형태를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저마다 다른 한자를 빌려서 적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은 그 음이 쉽게 넘나들었다. 즉 종성의 음이 부전(浮轉)되었다. ‘맏아들[/mot]말벌, 말잠자리[/mor]이 같은 어원에서 분화되었다는 말이다. 장사치들이 하루 중 첫거래를 가리켜 마수했다는 표현을 쓰는데, ‘마수의 응집발음 형태인 [] 역시 [/]과 같은 어원에서 분화된 말이다. [//...]이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닌 말이었고, 같은 어원에서 분화가 되었다는 얘기다


첫째를 일컫는 우리말 [ᄆᆞᆮ]을 연진발음하면 [ᄆᆞᄃᆞ]와 같은 형태가 된다. 그것을 모대(牟大)’, ‘모도(牟都)’라고 음차하여 적기도 했던 것이다. ‘말다(末多)’라는 표기 역시 마찬가지다. 말다(末多)[/]이 왔다갔다 부전(浮轉)되는 것을 한꺼번에 나타낸 표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맏이(마디)’마지처럼 발음한다. ‘마제(摩帝)’는 바로 그것을 음차한 표기이다. 동일한 인물인 동성왕의 이름이 모대(牟大), 모도(牟都), 말다(末多), 마제(摩帝)’ 등 저마다 다른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만약 [맏이]를 음차하지 않고 훈차하여 표기하면 어떻게 될까


순우리말 []에 해당하는 한자는 , , , , 등이 있다. [맏이(마지)]맹이(孟伊)’라고 차자하거나 백지(伯支)’, ‘윤지(允枝)’ ‘장이(長耳)’, ‘곤지(昆支)’ 같은 식으로 차자하여 적을 수 있다. 곤지(昆支)는 바로 그러한 이름이다. 다시 말해, 우리말로 [맏이]라 일컬었던 이름을 진의훈차하여 곤지(昆支)’라고 표기한 것이다. 기실 이든 이든, 아니면 이든, 한 글자만 써도 충분한데 를 덧붙인 것은 소리가 그렇게 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두기 위한 것으로, 필자는 이러한 글자를 두고 일잉자(溢剩字)라 칭한다


여기까지, ‘곤지(昆支)’는 우리말로 [맏이]라 일컬었던 이름을 진의훈차+음차한 표기라는 점에 대해 설명했다. 백제 24대 동성왕의 이러한 이름표기는 차자표기(借字表記) 연구에서 꼭 기억해 두어야 할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으니 눈여겨 보아두시기 바란다


이제 동성왕의 계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백과사전 등에서 설명하고 있는 계보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곤지(昆支)21대 개로왕의 둘째아들이자 22대 문주왕(文周王)의 동생이고, 곤지의 아들이 24대 동성왕이라는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등의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인데,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 계보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필자는 곤지(昆支)’동성왕은 동일한 이름을 가진 동일한 인물이라고 본다. 곤지와 동성왕은 부자관계가 아니라 동일한 인물인데 역사가들이 각기 다른 인물로 착각하여 기록을 해놓는 바람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인 것처럼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는 얘기다


물론 필자의 이러한 주장은 차자표기 분석을 바탕으로 한 인명풀이에 근거한 것일 뿐이어서 앞으로 좀더 면밀하고 종합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소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차자표기 연구와 인명풀이가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백제왕실의 올바른 계보를 밝혀내는 핵심열쇠가 될 것이며, 나아가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한일고대사의 뒤엉킨 실타래도 풀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곤지가 바로 동성왕과 동일인물이라고 하는 필자의 견해는 삼국사기기록에 의해 단칼에 부정되고 만다. 지금 이 글을 읽고있는 분들 중에도 곤지=동성왕이라는 필자의 견해를 황당한 헛소리라 여겨 곧바로 반박하고 싶은 분들이 많이 계실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백제본기에 곤지는 문주왕 3(서기 477)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477년에 죽은 사람이 어떻게 479년에 동성왕이 되어 즉위할 수 있단 말인가


4월에 왕제 곤지(昆支)를 배()하여 내신좌평을 삼고, 장자 삼근(三斤)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5월에 흑룡(黑龍)이 웅진(熊津)에 나타났다. 7월에 내신좌평 곤지(昆支)가 죽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문주왕 3년조 


필자는 위 삼국사기문주왕 3년조 기록 자체가 잘못되었을 거라고 본다. 곤지(昆支) 즉 모대(牟大)는 이 때에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으나 가까스로 살아났고, 결국은 479년에 동성왕으로 즉위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삼국사기일본서기를 편찬한 사람들이 곤지(昆支), 모대(牟大), 모도(牟都), 말다(末多), 마제(摩帝)’ 등이 동일인물의 이름을 표기한 것이란 사실을 모르다 보니 이 부분에서 계보가 심하게 헷갈렸고, 그래서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기록들을 양산하게 되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많은 연구자들이 삼국사기의 기록보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더 신뢰하는 편인데, 찬찬히 따져보면 일본서기의 기록은 더 혼란스럽고, 더 엉망진창이라 할 수 있다먼저 일본서기에서 곤지나 동성왕, 말다왕, 사마왕에 관해 언급한 기록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웅략천황 5(461) 4월조


여름 4월에 백제의 가수리군(加須利君){개로왕이다}은 지진원(池津媛)을 불태워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適稽女郞이다}, “과거에 여인을 바쳐 채녀로 삼았다. 그런데 이미 예의를 잃어서 우리나라의 이름을 실추시켰다. 앞으로는 여인을 바치지 말라.”고 의논하였다. 이에 그 아우 군군(軍君){곤지(昆支)이다}에게 너는 마땅히 일본으로 가서 천왕을 섬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군군(軍君)왕의 명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원컨대 왕의 부인을 내려주신다면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면서 나의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달이 되었다. 만일 가는 길에 출산하면, 바라건대 어디에 있든지 배 한 척에 실어 속히 본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작별하여 왜의 조정으로 갔다


6월 병술삭에 임신한 부인이 가수리군의 말처럼 축자의 각라도(各羅島)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도군(島君)이라 하였다. 이에 군군이 곧 배에 태워 도군(島君)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가 무령왕(武寧王)이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주도(主島)라 불렀다


가을 7월에 군군이 왕경에 들어왔다. 이윽고 다섯 아들을 두었다.{백제신찬신축년에 개로왕이 아우 곤지군(昆支君)을 대왜로 보내어 천왕(天王)을 모시게 하였다. 형왕(兄王)의 우호를 닦에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웅략기54월조 


웅략천황 21(477) 3월조

21년 봄 3월에 백제가 고구려에게 멸망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汶洲王)에게 주어 그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왔다. 이 때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이 비록 무리들은 이미 죽거나 창고 아래(倉下)에 보여 근심하였는데도 오로지 천황에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세웠다.”고 말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母弟이다. 일본의 舊記에 이르기를, “구마나리를 말다왕에게 주었다고 하였으나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 下哆呼唎縣別邑이다.} -웅략기213월조 


웅략천황 23(479) 4월조

23년 여름 4월에 백제 문근왕이 죽었다. 천왕은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이 어린데도 총명하므로 내리로 불러 친히 머리와 얼굴을 어루만지며 은근하게 훈계하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이에 병기를 주고 축자국의 군사 500인을 함께 보내어 나라까지 호송하게 하였다. 이가 동성왕이 되었다. -웅략기234월조 


무열천황 4(502) 4월조 


여름 4월에 사람의 머리털을 뽑고,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게 하였다. 그리고 나무의 밑동을 베어 쓰러뜨려 올라가 있는 사람이 떨어져 죽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이 해에 백제의 말다왕(末多王)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악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드디어 제거하고, 도왕(島王; 사마키시)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고 한다.(백제신찬에서 말하길,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악한 짓을 하였다. 그리하여 국인이 함께 제거하였다. 이후 무령왕이 섰다. 휘는 사마왕(斯麻王)이라 한다. 그는 곤지왕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모형(異母兄)이다. 곤지가 왜로 향할 때, 축자도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섬에서 돌려보냈고, 왕경에 이르기 전에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지었다. 지금도 각라(各羅; 가카라)의 바다에는 주도(主島; 니리무세마)가 있다. 왕이 탄생한 섬이다. 그래서 백제인은 주도(主島) 이름 붙였다. 지금 생각하니 도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왕(末多王)은 곤지왕(昆支王)의 아들이다. 이를 이모형(異母兄)이라 함은 분명하지 않다. - 무열기44월조 


삼국사기일본서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곤지(昆支)가 누구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삼국사기는 곤지가 22대 문주왕의 동생이라고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21대 개로왕의 동생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25대 무령왕(武寧王)을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으나 일본서기는 개로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개로왕이 동생 곤지를 일본에 파견하면서 임신중인 왕비를 함께 딸려 보냈고 일본으로 파견되어 가는 도중 각라도에 이르러 개로왕비가 출산을 했는데, 그때 태어난 아이가 도군(島君)으로 훗날 25대 사마왕(=무령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곤지는 일본으로 들어가 아들 다섯을 낳았고, 그 중 둘째아들이 말다왕으로 백제 25대 동성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무열천황기 4년조를 보면 사마왕이 말다왕의 이모형(異母兄)이라고 한 기록이 존재했었던 모양이다. 찬찬히 따져보면 말다(末多)는 곤지(昆支)의 아들이고 사마(斯麻)는 개로(蓋鹵)의 아들인데 이들이 어떻게 배다른 형제일 수 있느냐는 식의 논평을 맨끝에다 덧붙여 놓았다. 기록대로 따져보면 말다와 사마는 사촌형제간이고 배다른 형제는 아닌데 기록에는 이모형(異母兄)으로 되어 있어 편찬자들이 보기에는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논평을 덧붙여 놓았을 것이다


위에 인용한 무열천황기 44월조의 논평만 잘 읽어 보아도 일본서기편찬자들이 편린으로 전해오는 고대의 기록과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얼마나 헷갈렸을지,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많은 연구자들이 일본서기에는 허위날조가 가득하며 사료가치가 전무한 책이라고 폄하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류도 많고 엉터리내용도 많지만 당시 기록자들로서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로서는 그렇게 기록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곤지(昆支)의 계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자료는 1971년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誌石)에 새겨져 있는 명문(銘文)이다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誌石)의 명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령왕 지석의 판독문과 해석.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 五月 丙戌朔 七日 壬辰 崩. 到乙巳年 八月 癸酉朔 十二日 甲申, 安厝登冠大墓. 立志如左.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인 계묘년 5월 병술삭 7일 임진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계유삭 12일 갑신일에 등관에 있는 대묘에 안장하였다. 묘지는 이와 같이 기록한다. ”. (*: 서기 523년 계묘년 57일 사망)

무령왕비 지석의 판독문과 해석.

丙午年 十一月 百濟國王 太妃 壽終, 居喪在酉地. 己酉年 二月 癸未朔 十二日 甲午, 改塟還大墓. 立志如左”.

병오년 11월 백제국왕의 太妃가 돌아가시니 酉地(서쪽)에서 居喪하였다. 기유년 2월 계미삭 12일 갑오일에 고쳐 장사지내어 大墓에 돌아가도록 했다. 묘지는 이와 같이 기록한다”. (*: 서기 526년 병오년 11월 사망)



삼국사기일본서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논쟁거리가 되어왔던 백제 25대 무령왕(=사마왕)의 생몰연대가 밝혀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무령왕은 일본으로 가는 도중 각라도에서 태어났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좀더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무령왕이 사망한 것이 523년 계묘년 57일이고 사망당시 62세였다면 출생연도는 서기 462년이 되어야 할 텐데 일본서기웅략기에 461년 신축년 6월 병술삭으로 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본서기내용이 순 엉터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서기의 내용을 더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듯한데 그렇다고 해도 모든 사실이 명명백백 밝혀진 것은 아니므로 덮어놓고 맹신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일본서기편찬자들이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사건을 동일한 사건으로 착각하여 하나로 합쳐서 기술하는 바람에 위와 같은 기록디 나오게 됐을 거라고 추측한다. 아니, 일본서기편찬자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록자들이나 구술전승자들이 잘못하여 다른 사건과 혼동하여 후대로 전해준 탓일 수도 있다고 본다


가장 기본이 되는 사건은 두 개다하나는 백제 개로왕이 아우 곤지(昆支)를 일본에 보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야국 구형왕의 둘째아들 중애천황(=가수리군)이 자신의 동생인 군군(郡君)과 왕비 신공황후를 일본에 보낸 것이라고 추측한다. 전혀 다른 인물이 전혀 다른 사람을 일본에 파견한 것인데 그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전승과정에서 한데 뒤섞여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라고 추측한다


일본서기가 범하고 있는 크나큰 오류는 가수리군(加須利君)’을 백제 개로왕(蓋鹵王)’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누차 강조했듯이 가수리군(加須利君)’[가슬/kasur]이라 일컫는 이름을 음차한 표기로 중애(仲哀)천황을 가리킨다. 다르게 적으면 가실왕(嘉悉王)’이다. “가수리(加須利)=중애(仲哀)=가실(嘉悉)”이 동일한 이름을 차자한 표기이며 이들이 동일한 인물이다. 백제 개로왕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가수리군을 개로왕이라고 설명해 놓은 일본서기의 엉터리 주석 때문에 후대의 역사가들이 지금까지 미로 속을 헤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슬/kasur]이란 이름을 가수리군(加須利君), 중애천황(仲哀天皇), 가실왕(嘉悉王)” 등으로 차자하여 적었고 [/mot]이라는 이름을 모대(牟大), 모도(牟都), 말다(末多), 마제(摩帝), 곤지(昆支)” 등으로 차자하여 적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차자표기에 대해 무지하다 보니 진실에 한 발짝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는 것이다


모름지기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진실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진실을 똑바로 보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그는 더 이상 역사연구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가수리군을 개로왕이라고 한 엉터리 주석에 현혹되지 말아야 하며, 곤지(昆支)와 동성왕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고 한 역사서의 기록이 잘못된 것임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오로지 차자표기를 바탕으로 한 이름파악에 근거하여 추론했을 뿐이라 종합적인 결론을 내릴 만한 위치에 있지 않지만 다른 연구자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동성왕의 계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이것이 동성왕의 정확한 계보라고 믿으며, 이에 관한 종합적인 검토는 앞으로 관련 분야의 연구자들이 해주실 것이라 기대한다.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burkurtar@naver.com

 

작성 2022.06.25 11:49 수정 2022.06.2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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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