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정말 ‘운명(運命)’이라는 게 있을까? 있다고 믿는다면 바꿀 수도 피할 수도 있을까? 아님, 없을까? 만약에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결국, 그 어떤 노력과 인간의 의지도 소용없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게 필연적으로 주어진 운명이 있을까? 우린 어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꼬이게 되면 운이 안 좋아서, 나빠서, 운명의 장난이야 등으로 흔히들 말한다.
그냥 쓰는 일상적인 표현들이지만 알게 모르게 이러한 말은 결정론적 운명론자들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사후적 해석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 어떤 도움도 보탬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떤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게 중요할 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운명과는 무관하게 안 좋을 때도 물론 있기는 하다.
우린 평상시에도 ‘주어진 운명’, ‘던져진 운명’ 등으로 얘기를 한다. 사실 인간이 태어날 때 누구의 집안이나 어떤 장소 등을 선택받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被投(던져진)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뭔가 잘못되었다면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다. 그것은 나의 부모와 가족, 사회와 국가, 더 나아가 세계는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명’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 그 결과 절망과 좌절을 느끼기도 한다. 어쩜, 이게 우리의 일반적인 삶인지 모른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그 어디를 향해서‘던져진 존재’라고 했다. 그것은 곧 자발적이지 않고 선택해 태어날 수 없다는 의미다. 이처럼 낯선 곳에 던져진 우리는 왜 던져졌는지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늘의 명을 받아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이처럼 운명학에서는 대체로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운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충분히 개척할 수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운명이 주어진 것이어서 비록 바꿀 수 없을지라도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 주어진 운명 속에서 충분히 내적 자아는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아닐까. 운이 나쁘다고, 운이 없다고 탓하지도 이유를 대지도 말자. 운명은 그 운명 안에서 우리가 고쳐나갈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많고 많이 있다.
공자가 명(命)을 들먹이면서도 한편으로 인간 의지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나, 비록 관점은 좀 다르지만, 니체가 얘기한 운명애運命愛 즉, 아모르 파티(Amor Fati) 역시 운명을 받아들이되 수동적이 아닌 적극적인 능동적 대처를 주장한 이유는 운명을 아름답게 가꾸어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공자나 니체나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맹자는 "시고지명자 불립호암장지하 是故知命者 不立乎巖墻之下(명을 아는 자는 위험한 바위 밑이나 담장 아래에 서 있지 않다)"고 했다. 이 말은 명을 아는 자는 운행하는 세상의 이치를 알기에 미리 위험을 알아 피할 길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의 자유의지에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에서는“마음의 혼란에서 병이 생기고, 마음의 안정으로 병이 스스로 치유 된다”라고 했다. 한마디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인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의미와 같은 맥락이 아닌가 한다. ‘운명’, 주어졌던, 던져졌던, 그것에 굳이 얽매이지 말고, 함몰되지 말자. 생각하고 맘먹기에 달린 것 아닌가.
우린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한 뒤에야 먹피같이 짙은 정이 가슴속에서 뭉클하고, 흐르디 흐린 시냇물은 증발해서 다시금 새벽녘 풀잎에 맺힌 해울이 되지 않은가. 이처럼 세상 천지간에는 희비가 변주곡으로 연주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살아가면서 ‘운명’과 ‘숙명’을 들먹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우린 조건을 달리하면 운명을 극복할 수 있고 미래를 바꿀 수 있다. 부처는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무고피무(此無故披無) 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인연생기(因緣生起)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들은 인연으로 맺어졌기 때문에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인간의 삶은 우수사려(憂愁思慮)의 길을 걷는다. 그 삶의 길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운명이다. 대문호 괴테는 죽음을 앞에 두고 “커튼을 걷어치워라, 저 하늘 좀 보자!”라고 했다. 성공과 실패, 헤어짐과 만남 등, 희비의 쌍곡선이 펼쳐지는 인생이 아름답지 않은가. 이러한 인생의 무대 위에 그 어떤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는 말인가.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받아들이자. 그러나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자유의지로 더 나은 비리도로 승화시키자. 정말 정해진 운명이 있을까? 없을까? 이러한 물음을 떠나 나의 인생, 나의 삶에 대한 물음에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타파해 나가자. 그 어떤 운명이든 상황이든 탓을 하지는 말자.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문학작품 공모전 금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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