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문자 발명 이전부터 술을 빚어 마셨다. 그래서 시의 역사보다 술의 역사가 더 길다고 할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는 추수 감사제나 하늘에 기도를 올리는 제천의식인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등에서 음주가무를 즐겨왔다. 또한, 고대 디오니소스 축제 때 술을 빚어 마시고 춤을 췄다. 또한, 동양의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은 술을 즐겨 마셨다.
그 중에선 시선인 이백은 주선(酒仙)이고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는 주성(酒聖)이 되었는데 그들의 시편에서 술에 관한 내용이 많음에서 알 수 있다. 서양의 보들레르나 랭보, 말라르메, 아폴리네르 등도 술을 좋아했다. 이렇게 보면 동서양을 떠나 술은 시인들과 막역한 친구 사이가 아닌가 한다. 우리의 시단 또한 만만치가 않다. ‘논개’의 작가 변영로를 비롯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애주가 천상병 시인, 조지훈 시인 등 작품으로 많이 남기지 않았지만, 술의 꾼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애주가들이 술맛을 아는 사람과 한 잔의 술을 즐기는 것처럼 행복한 시간은 없다. 마시지 않는 사람이 어찌 그 맛과 멋을 알겠는가. 당나라 이태백이나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를 보면 시의 맛과 멋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이태백은 그의 악부시(樂府詩) <장진주(將進酒>에서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가 저녁에 흰 눈이 되었다(朝如靑絲暮成雪)”하면서 “모름지기 인생은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길지니(人生得意須盡歡)”라 하면서 세월의 덧없음을 읊조리며 속세의 근심과 걱정을 술로 씻어내고 있다.
흔히‘詩仙이라 일컫는 이백, 그는 방랑에서 방랑으로 끝내는 그의 생애는 단순한 방랑이 아닌 정신적 자유를 찾아 구만리 창천에 올라간 대붕의 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늘 적막과 우수를 절실하게 응시하면서 그것을 발판 삼아 도약하는 비상을 위해 술을 마셨다. 오죽했으면 술에 취해 강물에 속 비친 달을 잡으려다 죽었겠는가. 사실 여부를 떠나 취생몽사(醉生夢死)의 술꾼다운 술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송강 정철 또한 이에 영향을 받은 듯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꽃 꺾어 술잔 세면서 무진무진 먹세그려.”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문인들은 시와 서사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음주취락(飮酒醉樂)으로 해소하고 있다.
그리고 이백보다 11살 아래인 시의 주성(酒聖)인 두보는 항상 퇴근길에 曲江의 주막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셨는데 술값이 나날이 늘어나 빚투성이가 되었다. 이때 우리가 나이 칠십이 되면 古稀宴(고희연)을 하는데 ‘古稀’는 그가 지은 <曲江>이라는 시에서 유래 되었다. <주채심상행처유(酒債尋常行處有)하고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가는 곳마다 외상술값이 있지만, 인생 칠십 사는 사람은 예부터 드물다. 예전의 주막에는 다소 정겹기도 했던 ‘외상값 사절’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요즘은‘카드 OK’가 대신하고 있다. 또한, 칠십 나이의 인생은 드문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어쨌든 동서고금을 떠나 술이 한 인간,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호불호를 떠나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시인묵객의 예술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 이유는 뭘까?
시인은 천편일률적 시선과는 상극이기 때문에 술에 취한 후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아마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이 아닐까. 취하지 않은 때의 시선과 취한 후의 시선, 시인은 전과 후가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투시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시인의 관점이고 시선이다. 그리고 시인의 마음은 일상성 너머를 꿰뚫어 보고 재해석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취해서 바라보는 한 잔의 술잔 속에 새로운 관점과 시선이 담겨 있지 않을까.
뒤라스의 ‘술’과, 보들레르의 ‘취하라’, 이태백과 송강의 ‘장진주’ 등에서 술에 대한 글을 보니 시인 조지훈이 술꾼을 바둑에 비유해서 급수를 매긴‘18단계 주도유단(酒道有段)’ 이 떠오른다. 필자는 7단계의 ‘낙주가樂酒家’, 한마디로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단계, 그러면서 차망우물(此忘憂物)하고 때론, 술을 빌려 시를 짓기도 하는…
술은, 예찬론자가 있는가 하면 그에 反한 자도 있다. 그러나 술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기능, 특히 시인이나 예술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창조적 행위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정말 인내하기 힘든 고독과 고통을 달래주기도 하고 시인의 영감이 사막화되어갈 때 한 줄기 단비가 되어주기도 한다.
필자도 술을 마실 때, 특히 孤獨無友(고독무우)의 혼술일 때는 술잔 속에서 시심을 건지기도 하고, 영감이 떠 올라 술잔에 흥건히 고인 느낌을 받을 때가 있기도 하다. 이럴 때 바로 메모하는데 일종의 취여(醉餘)의 휴지(休止)같은 것이다,
친구여! 건배하고 싶은 불금의 밤이다.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마셔보세( 一杯一杯復一杯). 이미 취한 듯 몸이 비틀거린다. 내가 세상의 술을 내가 꼬셨으니 술값은 내고 가야지 않겠는가?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문학작품 공모전 금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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