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라근자(木羅斤資)는 『일본서기』에 실려있는 백제장군의 이름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한국의 문헌에는 실려있지 않으며 『일본서기』에만 실려있다. 이 ‘목라근자(木羅斤資)’라는 인물에 대해 그동안 어떻게 설명해 왔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려있는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목라근자(木羅斤資)
생몰년 미상. 백제시대의 장군
비자벌(比自伐: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 남가라(南加羅: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 탁국(啄國: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안라(安羅: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 다라(多羅: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 탁순(卓淳: 지금의 대구), 가라(加羅: 지금의 경상남도 고령) 등의 가야지역과 신라를 공격 혹은 회유하여 선린관계를 맺는 한편, 백제의 동·남부 강역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의 여자를 맞아들여 구이신왕에서 문주왕의 시기에 활약한 목만치(木滿致)를 낳았다고 한다. 그에 관한 기록은 ≪일본서기 日本書紀≫ 진구황후조(神功皇后條)에 나타나는데, 이 시기의 ≪일본서기≫의 내용에는 의문점이 많아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목라근자에 대한 이러한 전승은 백제 근초고왕대의 영토확장 과정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필자의 견해는 위 백과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와는 전혀 다르다. 필자는 ‘목라근자(木羅斤資)’가 백제 13대 근초고왕(346~375) 때의 인물이 아니라 서기 500년대 중반의 인물이라고 본다. 즉, 백제 성왕이 통치하던 시절, 큐슈 지역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라고 본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여러 차례 논했듯이 신공황후(神功皇后) 역시 일본무존(=구형왕)의 둘째아들인 중애천황(=가수리군=가실왕)의 왕비로 서기 500년대 중반에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본다. 이에 관하여는 졸저 『임나의 인명』을 참고하시기 바라고, 여기서는 상세히 다루지 않기로 하겠다.
종래의 학자들 중에는 『일본서기』의 연도가 120년 정도 과거로 끌어올려졌다고 하는 2주갑인상설을 신봉하는 분들이 많았으나, 필자는 그 2주갑인상설 자체가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 생각하며, 『일본서기』에 나오는 연도들을 모두 120년 뒤로 끌어내리면 맞아떨어진다는 견해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목라근자(木羅斤資)’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신공기의 연도를 120년 정도 끌어내린 서기 369년 전후가 옳을 거라 믿고 거기에다 억지로 꿰맞추려고 하다 보니까 역사적 사실까지 왜곡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일본의 역사학자들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목라근자(木羅斤資)’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차자표기(借字表記)이다. 차자표기 중에서도 ‘임나(任那)’라는 국명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는 [ᄆᆞᇀᄅᆞ]라 일컬었던 나라의 이름을 한자로 ‘任那’라 차자하여 적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任那’는 아주 넓은 곳을 가리키는 원시어소 [말+놀]로 이루어진 [맏놀/mot-nor]이란 말을 ‘사음훈차+음차’한 표기이고, 다르게는 ‘萬盧(만로)’나 ‘末盧(말로)’라고 음차하여 표기할 수도 있으며, 또 다르게는 ‘前羅(전라)’, ‘梅豆羅(매두라)’, ‘邁羅(매라)’, ‘鷹遊(응유)’, ‘鷹準(응준)’이라고도 쓸 수 있고, ‘目頰(목협; 메즈라)’, ‘木羅(목라)’, ‘木出(목출)’, ‘木生(목생)’, ‘物(물; 모노)’, ‘毛野(모야; 모노)’ 등으로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다른 글들에서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다.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임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임나국(任那國)이 한반도 남부의 가야연맹을 가리킨다는 잘못된 상식에서 벗어나, 임나국은 전남 광양시에 있었던 고대국가 ‘만로국(萬盧國)’이나 큐슈 북단의 현 마츠우라(松浦)시에 있었던 고대국가 ‘말로국(末盧國)’과 사실상 동일한 국명이라 할 수 있으며 한반도 남부와 큐슈 북부에 걸쳐 있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부터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얘기다.
차자표기의 관점에서 보면 ‘목라근자(木羅斤資)’는 풀이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이름이다.
먼저, ‘목라(木羅)’는 ‘목출(木出)’ 등과 같이 [몯라/mot-nor]이라는 국명을 나타내고 있는 표기로 보인다. 목라근자가 임나국 출신이거나 임나지역(=큐슈 북단의 마츠우라시 일대)에서 주로 활동한 인물이라는 걸 ‘목라(木羅)’라는 말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근자(斤資)’의 資가 무엇을 표기한 것인지 알아내기가 무척 어려운데, 필자는 [갈/kar]을 사음훈차한 표기로 본다.
순전히 필자의 억측에 지나지 않지만, 필자는 光(=light)에 해당하는 한국고유어는 ‘빛’이고, 色(=corlor)에 해당하는 한국고유어는 ‘갈(깔)’이었을 거라고 본다. ‘깔맞춤’에 쓰이는 그 ‘깔’이다. ‘빛’과 ‘갈’을 합쳐서 현대한국어 ‘빛깔’이란 말이 나왔고, 일본어 ‘히카리(ひかり)’는 바로 이 한국어 ‘빛깔’과 동일한 어원에서 분화된 말이라 생각한다. [갈(깔)]은 색깔과 자질, 맵시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 [갈(깔)]을 한자로 資라는 글자로 차자하여 적은 것이라 본다. 다시 말해, 맏노(=임나) 출신의 [근갈/kun-kar]이라는 인물의 이름을 ‘木羅斤資(목라근자)’라고 차자하여 적었다는 말이다.
[근갈/kun-kar]이라는 이름은 백제 21대 ‘근개루왕(近蓋婁王)’과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며, 그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하겠다. 대신에 같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이라는 인명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기로 한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毛野’는 일본어로 [모노(もの)]라 일컫는 말을 차자한 표기로 보인다. 그리고 ‘近江’은 현재 일본어에서 “오우미(おうみ)”라고 읽히고 있지만, 후대인들이 잘못 읽고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본래는 [근가라(=근가와)]라 일컫는 말을 近川 혹은 近江이라 적었을 것이라 본다. 江에 해당하는 한국고유어는 [가람]이다. ‘고을’을 가리켜 [가람]이라고도 하며, 제주 방언에서는 [카름]이라고 한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중간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임나어에서는 [갈/가라]가 그와 유사한 형태로 발현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바, 그 [갈] 혹은 [가라]를 江이란 한자로 사음훈차하여 적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kun-kara]를 ‘近江’이라 차자하고 [mo-no]를 ‘毛野’라 차자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목라근자(木羅斤資)’와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은 이름의 앞뒤 순서만 바뀌었을 뿐, 사실상 동일한 이름을 표기한 것이고 이들은 동일인물로 추측된다는 얘기다. 물론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은 낮다. 왜냐하면 목라근자(木羅斤資)는 신공황후 때의 인물이고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은 계체천황 때의 인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 신공황후는 서기 200년대에 재위했던 인물이고 계체천황은 서기 500년대에 재위했던 인물로 되어있어, 두 사람 사이에는 무려 300년이나 간격이 있다. 『일본서기』의 연도에 따르면 그러하다. 그러나 그 연도가 엉터리라면 달라진다. 다른 글에서 누차 말했듯이 신공황후는 실제로 500년대의 실존인물로 추정되는 바, 계체천황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일 수 있고, 목라근자(木羅斤資) 역시 500년대에 활동했던 인물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49년 봄 3월에 황전별(荒田別;아라타와케), 녹아별(鹿我別;카가와케)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구저(久氐) 등과 함께 군사를 정돈하여 바다를 건너가 탁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때 누군가가 “군사의 수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사백개로(沙白蓋盧)를 보내 군사를 증원해 달라고 요청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곧 목라근자(木羅斤資), 사사노궤(沙沙奴跪)[이 두 사람의 성(姓)은 알 수 없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에게 명령하여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그 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南蠻)의 침미(忱彌) 다례(多禮)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그리고 『일본서기』 계체기 21년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21년 봄 여른 6월 임신삭 갑오(3일),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 오후미노케나노오미)이 무리 6만을 거느리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남가라와 탁기탄을 다시 일으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이때 축자(筑紫; 츠쿠시)의 국조(國造) 반정(磐井; 이하위)이 은밀히 반역을 도모한 지 수년이 지났다. 그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항상 틈을 보고 있었다. 신라가 이를 알고 몰래 뇌물을 반정에게 보내어 모야신의 군사를 막아주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만정은 화국(火國; 히노쿠니)과 풍국(豊國: 토요노쿠니)의 두 지역을 점거하고,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밖으로는 해로를 막아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국의 연공을 바치는 배를 끌어들이고, 안으로는 임나에 파견하는 모야신의 군사를 차단하고 함부로 큰소리치기를, “지금 사신은 전에는 나의 동료로서 몸을 서로 부비고 한 그릇에 밥을 나누어 먹었는데, 어찌 갑가지 사신이 되었다고 나로 하여금 그 앞에 엎드리게 하는가.”라고 하고 싸움을 일으켜 따르지 않으며, 교만하고 기세등등하였다. 이에 모야신은 방해를 받아 중도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천황은 대반련금촌(大伴連金村; 오호토모노무라지카나무라)과 물부대련추록화(物部大連麤鹿火)와 허세대신남인(許勢大臣男人) 등에게 조를 내려, “축자의 반정이 반란을 일으켜 서쪽의 변방을 점거하고 있으니, 누가 가히 장군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대반대련 등이 입을 모아 “정직하고 용감하며 병법에 통달한 바가 지금 추록화(麤鹿火)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천황이 “좋다.”고 하였다
- 『일본서기』 계체기 21년조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에 나오는 국명과 지명에 대해서는 졸저 『임나의 인명』에서 상술하였고, 인명에 대해서는 『임나의 인명』에서 상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기로 한다. 신공기 49년조에 나오는 ‘백제’는 한반도백제가 아니라 구마모토 남쪽의 야츠시로시(八代市)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큐슈백제(백제 담로의 하나)를 가리키며, 그 통치자는 성왕(聖王)이 아니라 오타라(意多郞=경행천황)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외 필자가 추정하는 7국 등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비자발(比自拔): 히사하라(久原)→사가현(佐賀縣) 이마리시(伊萬里市) 야마시로초(山代町) 구바라(久原)
남가라(南加羅): 남거성(男居城), 남거한(南居韓), 목도(木島)→이키섬(壹岐島)
탁국(啄國): 탁(啄)→다쿠(多久)→사가현(佐賀縣) 다쿠(多久)시
안라(安羅): 아나토(穴門, 穴戶)→야마구치현(山口縣) 나가토시(長門市)
다라(多羅): 다량(多良)→사가현(佐賀縣) 후지츠군(藤津郡) 다라초(太良町)
탁순(卓淳): 다카숫(高雄; 다카오)→후쿠오카현(福岡縣) 다자이후시(太宰府市)
가라(加羅): 가라츠(加羅都)→사가현(佐賀縣) 가라츠시(唐津市)
고해진(古奚津): 가고시마현(鹿兒島縣) 이치키쿠시키노시(串木野市)
침미(忱彌): 가고시마현(鹿兒島縣) 미쿠라자키시(枕岐市)
다례(多禮): 다례국(多禮國)→가고시마현(鹿兒島縣) 구마게군(熊毛郡) 야쿠시마초(屋久島町)
그러니까 『일본서기』에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라는 주석이 달려 있지만, 필자는 목라근자가 백제 근초고왕이나 성왕때의 인물이 아니라 큐슈백제 오오타라(=경행천황)때의 인물이라고 본다는 말이다. 앞에서 목라근자(木羅斤資)가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과 동일한 인물로 추측된다고 했는데, 기실은 같은 『일본서기』 내에서 동일인물로 여겨지는 인물들은 더 있다.
응신천황 3년조 기록에 나오는 ‘기각숙니(紀角宿禰)’와 웅략천황 9년조 기록에 나오는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이다. 웅략천황 9년조 기록 은 길고 장황하여 독자들이 지루할 수 있기에 필자가 임의로 간추려서 인용한다.
(응신 3년) 이 해에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즉위하여 귀국(貴國)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녜(紀角宿禰;키노츠노노스쿠네), 우전시대숙녜(羽田矢代宿禰;하타노야시로노스쿠네), 석천숙녜(石川宿禰;이시카와노스쿠네), 목토숙녜(木菟宿禰;츠쿠노스쿠네)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녜 등은 아화(阿華)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 『일본서기』 응신기 3년조
(웅략 9년) 3월에 천황이 친히 신라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神)이 가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직접 가지는 않았다. 대신에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 키노워유미노스쿠네), 소아한자숙니(蘇我韓子宿禰), 대반담련(大伴談連), 소록화숙니(小鹿火宿禰) 등을 4대장으로 임명하고 신라를 정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기소궁숙니의 아내가 죽고 없어서 시중들 사람이 없다는 말에 천황은 길비상도채녀 대해(大海)를 기소궁숙니에게 내려주고는 수레를 떠밀어 전장으로 보냈다. 기소궁숙니 등은 신라로 들어가 여러 고을을 행도(行屠-도살하고 다님)하였다. 신라왕은 도망쳤고, 탁지(啄地)를 모두 평정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도망치지 않은 신라군이 반격을 해왔고, 대반담련 등 여러 명이 죽었다. 기소궁숙니는 병에 걸려 죽었다.
5월에 기소궁숙니의 아들 기대반숙니(紀大伴宿禰)가 아버지 대신 지휘권을 함부로 행사하려고 했고, 이에 소록화숙니와 소아한자숙니는 기대반숙니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백제와 힘을 합쳐야 하는데 내부 분열이 생겨 백제에 연합을 제의하러 가지도 못했다. 기소궁숙니는 관 속에 든 시신이 되어 채녀 대해와 함께 돌아왔고, 웅략천황은 용맹무쌍한 대장군 기소궁숙니가 먼 곳까지 가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결국 삼한(三韓)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고 애통해 하며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주라고 명령하였다.
- 『일본서기』 웅략기 9년조
목라근자의 ‘목라(木羅)’가 [ᄆᆞᆮᄂᆞᆯ/mot-nor]을 음차한 표기인 바, 일본 열도 서부의 임나(任那) 지역에서는 ‘말로(末盧), 말라(末羅)’ 등으로도 썼고, ‘목출(木出)’, ‘목생(木生)’이라고도 쓸 수 있었을 터인데, 일본의 2차 3차 표기자들은 그것을 다시 자기네 식으로 차자하여 ‘모야(毛野; 모노)’라고도 쓰고 ‘기각(紀角: 모츠노)’이라고도 쓴 것이다. 일본어로 木을 “키(き)”라고 하는 바, 본래는 음차한 표기임에도 후대의 일본인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른 채 木을 “키(き)”라고 훈독하였고, 더 후대인들은 [키/ki]라 하는 말을 그대로 음차하여 ‘紀(기)’ 혹은 ‘奇(기)’ 같은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러니까 [mot-nor]을 ‘木羅, 木出, 木生’ 등으로 표기하다가 일본어로 木을 키(き)라고 훈독하였고, 그래서 [모츠노]→木角→紀角이라는 표기가 나오게 되었다고 본다는 말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기각숙니(紀角宿禰)’를 “키の츠노の스쿠네”라고 읽고 있는데 이는 후대인들에 의해 두 번 세 번, 왜곡에 왜곡이 거듭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웅략기 9년조에 나오는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 역시 대동소이하다.
‘목라(木羅), 목출(木出), 목생(木生)’ 등으로 적었던 이름은 모두 실제 부르기는 [mot-nor]이었고, 일본의 기록자들이 그것을 ‘모야(毛野)’라고도 적었는데, 후대의 일본인들은 ‘모야(毛野)’의 뒷글자를 훈독하지 않고 그대로 음독하여 “moya”라 읽었으며, 더 후대인들은 [모오야]를 ‘목소시(木小矢)’라는 한자로 표기하게 된다. 일본어로 ‘작은 화살(小矢)’을 ‘오야(おや)‘라고 하니 [모오야]를 그렇게도 쓴 것이다. 그리고는 ‘작은 활(小弓)’도 똑같이 ‘오야(おや)’라 하는 줄로 착각하여 [모오야] ‘木小矢’를 ‘木小弓’이라고 썼고, ‘木小弓’의 앞글자를 “키(き)”라고 훈독한 후, 그 [키/ki]를 ‘紀’라는 한자로 바꿔 표기하게 되니 ‘紀小弓’이란 이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착각이 또다른 착각을 낳고 오해가 또다른 오해를 부른 결과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는 오늘날 일본어로 “키の오유미の스쿠네”라 읽고 있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 읽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기각숙니(紀角宿禰)’와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 둘 다 동일한 인물의 이름을 표기한 것이며, 둘 다 [모노손이/mono-soi] 정도로 읽어야 본래의 이름에 근접한 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상당수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목라근자(木羅斤資)’와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은 [모노근갈/mono kunkar]을 적은 것이고 기각숙니(紀角宿禰)와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는 변형되기 전 본래의 이름이 [모노손이/mono soi]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면, 어떻게 이들이 모두 동일인일 수 있단 말인가? 이름의 일부는 같지만 [모노-근갈]과 [모노-손이]로 나머지 부분이 맣이 다르지 않은가?
그렇다. 이름만 놓고 대조해 보면 이들은 분명 동일한 이름을 표기한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동일인물이라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들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바로 『일본서기』의 여러 천황기 기록들이다. 신공기와 응신기 웅략기 계체기 등을 한데 놓고 대조해 보면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대목들이 있다.
앞에서 인용한 신공기 49년조에는 목라근자(木羅斤資)와 함께 ‘황전별(荒田別)’, ‘녹아별(鹿我別)’ 같은 장군의 이름이 나오고, 계체기 21년조에는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과 함께 ‘소록화숙니(小鹿火宿禰)’, ‘소아한자숙니(蘇我韓子宿禰)’, ‘기대반숙니(驥大伴宿禰)’ 같은 장군의 이름이 나온다. 필자가 『임나의 인명』이라는 책에서 썼듯이 ‘녹아(鹿兒)’는 한국어 [사슴-아]를 ‘사음훈차+음차’한 표기로 살마국(薩摩國)의 [살마/사츠마]를 차자방식만 다르게 하여 적은 것이며 비전국(肥前國)의 ‘비전(肥前)’ 역시 살찔 비(肥)와 ‘맞은 편’을 뜻하는 한자 전(前)을 차용하여 [살ㅉ맞]을 적은 표기이니, 肥前을 일본어로 “히젠(ひぜん)”이라 읽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생각되고 추찰도 가능하지만, 그 “히젠”을 ‘화전(火前)’이나 ‘화국(火國)’이라 표기하고 “히노쿠니(ひのくに)”라고 일컫게 되는 단계에 이르면 왜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도 없고 추찰도 불가능해져 난독지명이나 난독국명이 되고 만다.
어쨌든 이를 참고로 하면 ‘녹아별(鹿我別)’이란 이름은 [사스마-베] 정도로 일컬었던 이름을 적은 것이고, 그가 살마(=사츠마) 지역 출신이거나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는 걸 나타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소록화숙니(小鹿火宿禰)’도 비슷하다. [사스마-부르-소이/sasma-bur-soi] 정도로 일컬었던 이름을 그렇게 적은 것이며, 만약 응집발음의 경향이 강한 한국어에서라면 아마 [삿마-불-쇠] 정도로 일컫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계체기 21년조에 나오는 ‘물부추록화(物部麤鹿火)’도 아주 비슷하다. 물부(物部)는 [모노-베] 즉 임나(任那) 지역 출신이란 걸 나타내고 있고, 추록화(麤鹿火)는 사슴을 나타내는 한자를 중첩사용한 표기이다. 그러니까 [사스마-불] 정도로 일컬었던 이름을 그렇게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동일한 인물의 이름을 적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 기사는 천황도 다르고 연도도 다르며, 출정한 장군들의 이름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실제로는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계체천황 21년(서기 527년)에 축자국조 반정(磐井; 이파이)의 난을 진압할 때의 ‘물부추록화(物部麤鹿火)’와 웅략천황 9년(서기 465년) 신라를 정벌할 때의 ‘소록화숙니(小鹿火宿禰)’, 신공황후 39년(서기 249년) 신라를 정벌할 때의 ‘녹아별(鹿我別)’이 동일한 이름을 가진 동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목라근자(木羅斤資)’,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 ‘기각숙니(紀角宿禰)’,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 역시 동일한 이름을 표기한 것으로 보이며 동일한 인물로 추측된다.
물부추록화(物部麤鹿火)=소록화숙니(小鹿火宿禰)=녹아별(鹿我別) |
목라근자(木羅斤資)=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기각숙니(紀角宿禰)=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 |
앞에서 목라근자의 ‘근자(斤資)’와 근강모야신의 ‘근강(近江)’이 [kun-kar]을 표기한 것으로 백제 근개루왕(近蓋婁王)의 이름과 똑같다고 얘기한 바 있다. 그리고 숙니(宿禰)는 [소이/손이]를 음차한 표기로 고대한국인의 인명에서는 망소이(亡所伊)의 ‘소이(所伊)’나 막금(莫金) 말금(末金) 등의 ‘금(金)’으로도 차자되어 쓰였다고 한 바 있다.
차자표기와 이름만 놓고 보면 ‘목라근자(木羅斤資)’와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들과 ‘기각숙니(紀角宿禰) ’,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는 동일한 이름이라 말하기도 어렵고 동일인물이라 추정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필자가 이들을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함께 등장하는 이름 ‘물부추록화(物部麤鹿火)’와 ‘소록화숙니(小麓火宿禰)’, ‘녹아별(鹿我別)’이 [삿마불]이라는 동일한 이름을 차자만 다르게 했을 뿐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래는 [모츠노소이]를 목각숙니(木角宿禰)라 차자하여 적었는데 후대의 일본인 표기자들이 木을 키(き)로 훈독한 후 그것을 다시 ‘기각숙니(紀角宿禰)’라 적게 되었을 거라는 필자의 추측이 맞다면 ‘기각숙니(紀角宿禰)’라는 이름은 사실 ‘무내숙니(武內宿禰)’와 더 비슷하고 이들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모노근갈]과 [모노소이]는 분명 다른 이름인데, 『일본서기』의 기록들을 찬찬히 대조해 보면 이들을 동일인물인 것처럼 혼동하여 기술해 놓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실제로 이들이 동일인물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목라근자(木羅斤資)가 바로 무내숙니(武內宿禰)이고 기각숙니(紀角宿禰) 기소궁숙니(紀小弓宿禰)와도 동일한 인물인데, 후대의 『일본서기』 집필자들은 이들이 동일인물이란 사실을 모른 채 제각기 다른 사건에 관련된 제각기 다른 인물인 것처런 기술해 놓은 것이라 본다. 그래서 천황기마다 다른 장군인 것처럼, 신라를 정벌하거나 무례하다는 이유로 백제왕을 손바닥 뒤집듯 가볍게 갈아치운 장군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목라근자(木羅斤資)를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맏노(=임나)]의 [근갈]이라 할 수 있는 바 한반도지역에 있었던 백제 21대왕 근개루(近蓋婁)와 똑같은 이름인데, 임나지역에서 활동하는 인물이라는 뜻에서 앞에다 ‘목라(木羅:[몯나])’를 붙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 21대 개로왕(蓋鹵王) 시대와 전혀 맞지 않음에도 마치 개로왕과 연관된 일인 것처럼 잘못 기술해 놓은 기사들이 많이 보이는데 어쩌면 바로 이 ‘목라근자(木羅斤資: [몯나근갈])’와 개로왕을 혼동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리하자면, 필자는 백제장군이라고 되어 있는 ‘목라근자(木羅斤資)’가 큐슈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던 인물이며, 그 활동 시기는 서기 500년대 중반으로 경행천황(景行天皇)이나 신공황후(神功皇后) 등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라근자(목羅斤資)가 바로 무내숙니(武內宿禰)와 동일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경행천황이나 신공황후가 서기 500년대에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을 참고하시기 바라고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최규성]
방송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최규성 ; burkurtar@naver.com